10년 전 2007년 5월, 9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난 영원한 ‘오월의 소년’ 금아(琴兒) 피천득 시인은 오월을 이렇게 예찬했다.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하얀 손가락에 끼어 있는 비취가락지다. 오월은 앵두와 어린 딸기의 달이요, 오월은 모란의 달이다. 그러나 오월은 무엇보다도 신록의 달이다. 전나무의 바늘잎도 연한 살결같이 보드랍다. 신록을 바라다보면 내가 살아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즐겁다. 내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계절의 여왕’이라는 오월이다. 광주의 산천 초목들은 연두에서 초록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수채화 물감을 풀어놓은 듯 눈이 부시게 날로 푸르게 푸르게 변해 가고 있지만 그 푸르름 속에 애잔함이 묻어 있다. ‘광주의 오월’은 37년 전 그날의 기억과 함께 참여하지 못한 사람들의 부채의식으로 집단 트라우마를 앓는 달 이기도 하다.

오월은 울긋불긋 화려한 색깔로 한바탕 꽃대궐을 이루었던 봄꽃들이 서서히 물러가는 시기이다. 이제부터는 향기 가득한 하얀 여름꽃들이 피어날 차례다. ‘붉은 꽃의 아름다움도 십일을 넘기지 못한다’ 하지 않았던가.

‘오월 광주’를 대표하는 꽃을 들라면 단연코 순백색 이팝나무 꽃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이팝나무의 꽃은 가슴 저리도록 하얗고 처연하다. 아프고도 슬펐던 그날을 떠올리게 한다. 하얀 꽃이 광주항쟁의 정신과 이미지가 잘 맞고 개화하는 시기도 오월이라서 ‘광주의 꽃’이 되었다. 향기 또한 너무 진하지 않고 은은하게 퍼진다.

올해도 어김없이 광주광역시 망월동 5·18 민주묘지로 가는 민주로에는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었다. 광주·담양 간 국도에서 5·18 묘지를 거쳐 옛 망월묘역까지 도로변 양쪽에 이팝나무가 가로수로 심어져 있다. 도로변은 물론 주택가 골목 구석구석까지 이팝나무들이 자라고 있다.

잎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새하얀 꽃들이 가지마다 눈처럼 소복이 쌓여있다. 추모 행사를 알리는 현수막과 함께 만장(輓章)처럼 나부끼고 있다. 하얀 소복 차림의 유족 인양 흐느끼고 있다. 영령들의 제단에 올리는 하얀 뫼밥 같다.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사는 것이 소원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이밥은 ‘이(李)씨의 밥’이란 의미로 조선왕조 시대에는 벼슬을 해야 비로소 이씨인 임금이 내리는 쌀밥을 먹을 수 있다 하여 쌀밥을 ‘이밥’이라 했다. 이팝나무는 이밥나무에서 유래된 이름이라고 한다.

꽃의 모양과 색깔이 멀리서 보면 힌 쌀밥을 수북이 담아놓은 모습을 연상케 한다. 꽃이 피는 오월은 식량이 다 떨어진 배고픈 ‘보릿고개’ 시기와 겹친다. 아름답기보다는 주린 배를 채워줄 쌀밥으로 보이는 것은 당연했으리라. 슬픈 사연이 녹아있는 꽃이다.

“… 해마다 오월 중순이면 이 마을 한복판엔 어김없이 거대한 쌀밥 한 그릇이 고봉으로 차려집니다. 멀리서 보면 흰 뭉게구름 같지만 가까이서 바라보면 수천 그릇의 쌀밥이 주렁주렁 열려 있으니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르지요…”(김선태의 시 ‘그 섬의 이팝나무’ 중에서)

80년 광주의 오월은 완전히 ‘고립된 섬’이었다. ‘화려한 휴가’를 나온 신군부는 철도, 도로, 하늘, 심지어 통신까지 두절시켰다. 정규방송과 신문에서 시민군들은 모두 ‘폭도’였다. 공수부대와 시민군들이 밀고 밀리는 상황에서 먹는 문제는 절박했다. 하얀 쌀밥이 그리웠을 것이다.

양동시장과 대인시장의 아주머니들이 주먹밥을 들고 나섰다. 광주시민들은 주먹밥을 나누어 먹으며 하나의 공동체가 되어 광주를 사수했다.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하얀 쌀밥을 연상시키는 이팝나무 꽃에는 주먹밥을 나누던 영령들의 순결한 혼이 서려 있어 더욱 애잔하다.

세월과 함께 풍화되어 가고 있는 오월의 광주는 아직도 슬프다. ‘광주의 피’를 먹고 탄생한 제5공화국의 책임자는 최근 발간한 회고록을 통하여 오히려 5․18의 피해자라고 주장하며 “나는 광주사태 치유를 위해 내놓을 씻김굿의 제물”이라고 했다. 언제까지 5․18을 폄훼하고 영령들을 능욕할 것인가. 최근 국과수의 보고서에 의하면, 그동안 소문으로만 떠돌던 전일 빌딩에 무장헬기의 무차별적인 기관총 난사가 있었던 것으로 공식 확인되었다.

37년 전 국가폭력에 맞섰던 민초들의 오월 함성은 ‘촛불의 힘’으로 이어져 새로운 정권을 탄생시켰다. 새 정부에서는 ‘임을 위한 행진곡’이 5․18 공식 기념곡으로 지정되어 목이 터져라 불러져야 한다. 발포 명령자가 밝혀져 이팝나무 아래서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한다. 더 이상의 왜곡과 폄훼가 없도록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

열사들의 나이를 세어 무엇하리. 금방 찬물로 세수를 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 이 푸르른 날, 이팝나무 꽃향기 날리는 망월동에는 보름달을 바라보며 광주의 영령들이 오월 속에 있다. 영령들이시여 편히 잠드소서!

임영열 시민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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