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림양화 제화장인 안민식

골퍼에게 명품 골프채는 로망이다. 등산가에게 등산화도 그렇다. 허나 어디 숫한 초보등산가에게 70~80만원 하는 명품 수제 등산화가 당키나 한가. 기껏해야 10만 원대 등산화를 그것도 큰마음 먹고 사서 죽자 사자 신다가 밑창을 1~2번 갈고서는 드디어 눈물을 머금고 등산화를 바꾼다. ‘유행 따라 살지 말고 형편대로 살자.’는 ‘헝그리 정신’ 구호를 신봉하는 등산가의 경우다.

계림동 오거리 쪽 대인시장 초입에 계림양화점이 있다. 시장 골목길 중앙에 ‘계림 양화’라고 쓰인 입간판이 있고 가게 전면 유리창엔 ‘남여 싸롱화 등산화’라고 선팅 글씨가 씌었다.

“싸롱화가 뭐냐?”고 물었더니 “수제 맞춤형 고급 구두”라고 주인이 고급스럽게 답한다. ‘남여 싸롱화’는 ‘남녀 살롱화’라고 외래어 표기해야할 일이지만, 이런 가게의 간판 서체나 맞춤법이 고급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구두장이 안민식(82세) 씨에게는 그런 오래된 시장 간판 글씨체가 더 어울린다. 어두침침한 가게에는 ‘남여 싸롱화’들이 전시되어 있고 작업장 바닥에는 가죽똥과 본드와 구두약 찌꺼기가 쌓여 지저분하다.

이 세상에 하나뿐인 내 구두

50년 된 일제 갑피(가죽 재봉) 제작용 미싱과 미군 부대에서 쓰던 것을 가져와 상표 자체 글씨마저 희미해진 60년 이상이 된 저부(가죽을 씌운 뒤 굽과 외피 사이를 재봉하는) 작업용 재봉틀이 예전 멋 그대로다. 주걱칼과 마치와 펜치, 끌, 니퍼, 드라이버, 숫돌, 본드통 등이 가게 주인의 세월의 내공을 증명하고 있다. 수선하기 위해 이리저리 흩어놓은 헤진 구두, 운동화, 하이힐, 단화 등이 고단한 주인들의 모습을 닮았다.

구두를 벗고 종이 위에 양쪽 발을 대니 볼펜으로 발본을 뜬다. 지금이야 3D 프린팅으로 해야 할 일이지만 그마저도 옛정이 간다. “등산화는 조금 낙낙하게 문수를 잡아야 편안해.” “조금”이라는 수치는 제화장의 경험의 가늠 수치다.

5일 이후면 수제 등산화를 찾아갈 수 있고 30만원이라고 한다. 5만원은 선금으로 냈는데 이 방식도 예전 방식이다. 처음이라 그렇지 단골이 되면 선금은 없다. 좋은 점은 수선을 아주 저렴하게 싼 값에 할 수 있다는 점과 애프터서비스를 무한정 받을 수 있다는 점이다. “수제 가죽 등산화는 잘 질들이믄 30년 넘게 신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어.” 믿고 싶은 이야기다. 수제 구두는 남녀 공히 12만 원대에 맞춤할 수 있다.

안민식(安玟植) 계림양화 대표는 1936년생이다. 장흥 장동면에서 3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전쟁이 끝난 1953년 18살 때 형님 친구 소개로 광주로 올라와 지금의 충장로 2가 남성양화점에서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일단 배우면 평생 먹고 산다는 기술이라 견습생들은 이발비와 목욕비만 받고서도 일을 배웠다.

끈기 있게 구두에 붙어 일을 배우는 사람의 손속이 빠르고 지긋하게 일을 하는 사람이 이런 판에서 이긴다. 잔심부름을 하다가, 가죽을 다루고, 재봉틀로 실을 박는 상견습에서 재봉을 하는 갑피 단계까지 묵묵히 도제식 수업을 따라가야 했다. 만 2년 만에 기술자 대열에 끼었다.

그러다가 서울 종로4가의 로마 양화점으로 추천을 받아 가서 일했다. 21살 때였다. 트럭 타이어에서 고무를 잘라내 밑창을 만들고 미군 부대에서 나온 단화 굽을 잘라내 붙이던 시절이었다. 가죽 밑창으로 홍창과 청창이 있었던 시절이었다.

명동의 미진 양화점에서 5년 정도 일하던 시절 가장 기술력을 끌어올렸다. 라스트(신발 틀) 깎기, 패턴 만들기, 가죽 재단, 갑피 만들기, 저부 만들기, 윤내고 장식 붙이기 등 여러 단계의 공정에 기술자들이 투입돼 일했다.

1970년 80년대 광주 충장로는 양화 양품 양장점의 전성 시대였다. 맞춤 구두장이가 하루 1켤레를 만들었다. 견습 2명 데리고 2켤레 만들기 위해 밤샘 작업을 했다. 70년대 중반 1컬레 공전(삯)이 쌀 3말이었다. 수제화 기술자로 일주일 일하면 직장인 한 달 월급을 받았다. 도급제로 일하면서 구두 한 족에 얼마 하면서 사장에게 돈을 받았다.

구두 만드는 풍경 65년

수제 등산화 광주에서 최초로 제작

29살에 광주에 온 구두장이는 최고 기술자가 되어 있었다. 대성 양화점과 남성 양화점 등에서 기술자로 10여 년 일했다. 그러다가 동구 불로동에 호프 양화점을 열었다. 전남대 병원 5거리에 희망 양화점을 차린 것이 1976년이었다. 막 일어서려던 수제화 맞춤 사업은 5•18을 맞으면서 하강 곡선을 탔다. 1984년 교통사고가 나서 1년 정도 쉬다가 1985년 다시 계림동에 계림양화점을 내면서 양화 일이 계속됐다. 지금의 가게로 2000년 이사를 왔다.

1990년대부터 수제화는 쇠퇴의 길을 걷는다. 기성화가 등장하고 대형마트가 활성화하면서 수제화 시스템으로는 시장에 대응하기 못했다. 2000년 들어 인터넷 쇼핑몰이 활성화되고 중국산 값싼 기성화에 맥을 못 추면서 수제화 가게들은 주저앉았다. “겨우 숨만 깔딱깔딱하게 됐다.” 3D 업종으로 구두 만드는 일을 배우려는 사람이 없어졌다.

말끔해진 구두 해에게 보여줄 때

광주에서 수제 등산화를 만드는 곳은 이곳이 유일하다. 등산 붐이 일던 1990년대 초창기 레저 장비 판매점인 ‘무등 레저’에 수많은 산악회 사람들이 방문해서 우리 광주에도 수제 등산화를 만들 만한 사람이 없냐고 물었다. 안민식 대표가 무등레저에 수제 등산화를 납품하게 됐다. 1992년 이후의 일이다.

구두가 없어지는 세상은 없을 것이다. 등산화 없이 등산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의 밑에서 일을 배운 기술자만 50여 명. 부인과 1남 4녀의 구두를 만들어 신겼다. 정장구두와 여성용 구두 및 하이힐, 작업화와 일반 운동화 등을 수선해왔다. 골프화도 만든다. 망신창이가 된 구두도 그의 손을 거치면 새것처럼 말끔해진다.

시간을 견뎌온 구두 기술자. 65년을 한결같이 미싱 바늘을 들여다보며 구두 밑창을 붙여온 그 수많은 시간의 공식을 아는 눈 밝은 소비자들이 있어 아직 제화장인은 가게로 출근한다. 무지외반증, 짝짝이 발, 뒤틀린 발, 장애인 구두는 더더구나 이 장인에게 맞춤을 의뢰해야 한다.

제화장이 장담한 것처럼 30년 이상은 더 이 등산화를 신고 산을 넘고 싶다. 등산화의 바닥을 산속 해에게 보여고 싶다. 제화장에게 30년만 애프터서비스를 받고 싶다. 편하고 미끄러지지 않고 등판능력이 강한, 그러면서 울퉁불퉁한 인생 산길에 투정부리지 않는 수제 등산화를 드디어 만났다. 이 등산화가 과연 기대대로 성능을 발휘했는지 알고 싶다면 이 허름한 구두 가게에 들어가 주인의 무욕의 웃음을 들여다보기 바란다.

계림양화 062-228-6953

대동문화 101호. 2017. 7-8월

백승현 기자  porum88@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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