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산방하면 사람들은 충주라는 지명을 떠올리지만 사실 충주는 지명이 아닙니다. 충주는 충성 충(忠)에 주인 주(主)자를 쓴 충성된 종이라는 뜻입니다. 충주는 저의 아호이기도 합니다. 짐작하셨겠지만 저는 크리스챤입니다.”

황토의 도예가 노근진 작가

우리나라 황토도자기의 최고 권위자로 인정받고 있는 노근진 도예가(62)는 차분하게 자신의 공방이름에 대해 이야기해주었다. 그의 말은 의외였다. 영혼의 자유로움과, 예술을 위한 방황과, 일탈과, 새로운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온 생이 위태로워 보이는 것이 예술가의 삶이고, 모습일진대 그에게서는 전혀 그런 기미가 느껴지지 않았다.

예술은 본디 현실의 전복을 꿈꾸고, 그런 방황 중에 작품이 배태되고 세상에 나오지 않던가. 고통의 흔적이고, 방황의 흔적이 바로 예술작품인 것이다. 헌데 노근진 도예가는 충성된 종으로서의 삶을 정갈하게 지켜내면서 작품 활동을 하고 있었다.

“제 모든 작품의 테마는 성경에서 가져옵니다. 예술가들은 나름대로 산책을 한다든지, 방황을 한다든지, 술을 통해 영감을 얻기도 하는데, 저는 제 작품 대부분을 성경에서 얻습니다.”

그래서 그의 표정이 차분하면서도 안온해 보이는지 모르겠다. 노 도예가는 생의 불안정성을 종교로 극복하고, 끊임없이 종교를 통해 자신을 비우며, 발밑을 살피고, 자신이 하고자 하는 일을 묵묵히 해나가고 있다. 그는 현실의 전복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다. 다만 충주라는 단어처럼 가장 낮은 자세로 엎디어 기도하는 순실함만 떠오른다.

산고홍, 글자이되 그림이며 또 다른 무지개

노근진 도예가는 조형성이 뛰어난 갑골문자를 통해 세상에 희망을 전하고 있다. 그런 도예가가 가장 좋아하는 단어는 ‘산고홍’이다. 산고홍(山高虹). 산고홍은 그대로 높은 산에 걸린 무지개라는 뜻으로, 무지개는 우리에게 희망의 상징이며 고난 뒤에 맞는 위로이기도 하다.

“창세기에 보면 노아는 홍수를 만나 절망에 빠지게 됩니다. 하지만 결코 절망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희망을 잃지 않죠. 그러다 어느 날 비둘기를 날려 보내는데 그 비둘기가 나뭇잎을 하나 물고 돌아옵니다. 물이 빠졌다는 증거입니다. 그때 노아는 비로소 방주에서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무지개를 봅니다. 무지개는 하나님의 약속이자 희망이기도하지요. 다시는 물로 벌을 주지 않겠다는 언약을 무지개로 통해서 나타내지요.”

노근진 도예가가 보여주는 산고홍은 글자이되, 그림이며, 그가 표현해내는 또 다른 무지개이다. 글자와 그림의 경계가 모호하다. 하긴 상형문자가 그렇듯 글자도 조형성을 지니고 있어 그 자체로 그림이기도 하다. 헌데 채색 없이 그 모든 것을 유약으로만 만들어내는 그의 노력이 그저 놀랍기만 하다.

“황토에는 철분이 많아 유약을 발라 구우면 붉은 색이 납니다. 꼭 붉은 색만 나는 것은 아닙니다. 유약에 따라 다른 색깔이 나지요. 어떤 유약이 어떤 색깔을 낼지, 그저 짐작만 할 뿐입니다. 그래서 늘 불을 때는 순간이 설레고, 초조합니다.”

지금까지 수없이 해온 작업과정이지만 매번 처음처럼 설레고 걱정이 된다고 노 도예가는 고백했다.

초벌 800도와 1250도의 재벌굽기에서 토기는 불에 부대끼고 단련돼서 더 단단한 성질을 갖게 되는데 이를 소성이라고 한다. 이 소성과정을 거치면서 유약은 다양한 색으로 발현이 된다. 다만 그 빛깔이 어떠하리라 짐작은 하지만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흙과 유약은 가마 속에서 불을 만나 비로소 자신들을 드러낼 뿐이다. 그러니 어쩌면 그 작품들은 도예가에게 있어 첫물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우리의 삶도 이와 같을 터. 시련이 사람을 더 단단한 사람으로 키우듯 불을 만나 소성의 과정을 겪는 도자기역시 사람살이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인다.

노근진 도예가의 성실함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초벌 재벌을 마쳤다해서 작품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노근진 도예가는 네 번이고 다섯 번이고 여섯 번이고 원하는 색과 작품이 나올 때까지 다시 굽기를 마다하지 않는다. 어떤 작품은 열 번이나 굽는 과정을 반복했다. 재벌과 삼벌, 사벌, 그리고 열 번의 불을 견딘 도자기는 어떤 점이 다를까. 헌데 그런 도자기를 사람들은 과연 알아볼까 궁금했다.

“모든 작품과 작품들이 다 애착이 갑니다. 그 중에서도 정말 공들여 만든 작품을 알아봐주 시는 사람들이 계시는데, 그럴 때면 무척 고맙습니다.”

자신의 작품을 알아봐주는 특별한 심미안을 만났을 때. 그의 힘듦은 한순간에 기쁨으로 바뀔 것이다. 어쩌면 많은 예술가들은 그 심미안을 만나기 위해 스스로 고행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노근진 작가 작업실에서

흙에서 나고 흙으로 돌아가는 운명이다

본인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그가 흙을 만지는 일은 결코 우연한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은 흙에서 나서 흙으로 돌아가니 흙은 바로 모든 생명의 근원이다. 생성과 소멸의 반복 속에서 어쩌면 노근진 도예가가 만지는 그 황토는 한때 ‘그 누군가’일지도 모를 일이다.

황토는 그의 손에서 순해지고 차지고 수굿해지고, 다시 불을 만나 전혀 다른 모습으로 탄생한다. 비로소 예술품으로 탄생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는 신이 흙으로 인간을 빚듯, 그 마음으로 흙을 대하는지도 모르겠다.

왜 굳이 황토인지 묻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토속적인 면을 내는데는 황토가 효과가 큽니다. 토속적이라 더 친근하고 익숙함을 느낄 수 있지요.”

황토의 작가 노근진 도예가는 도자기의 새로운 분야를 개척한 사람이기도 하다. 구형이나 마름모, 또는 다른 형태의 입체적 도자기가 아닌, 평면 형태의 작품을 선보임으로써 도자기의 지평을 확대했다는 평가를 얻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꼭 평면이라 할 수 있을까. 평면 도판에 조각하듯 글자를 새겨 넣은 작품은 그 자체로 평면이되 글자들의 요철로 입체의 형태도 띄고 있다. 다시 말해 평면이되 입체이고 입체이되 평면의 형태를 갖고 있는 것이다. 그 노력을 인정받아 작가는 한국예총에서 한국예술문화명인 도예도판각 부문에서 명인 인증을 받았다.

그가 처음부터 도자기를 공부했던 것은 아니다. 초등학교에 다니던 시절, 서예를 공부했다고 했다. 그러다 성인이 돼서는 자연스럽게 흙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흙에 글자를 새기면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도자기에 글씨를 가져와 구워보았는데, 그게 반응이 참 좋았습니다. 갑골문자가 주는 조형성역시 저를 매료시켰구요. 그래서 갑골문자로 무언가를 만들어 보자고 생각한 것이 오늘에 이르게 됐습니다.”

오래전에 익혔던 서예는 그렇게 도예가의 작품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렇다고 그가 따로 도자기를 배웠던 것은 아니다. 혼자 연구하고 혼자 실패를 거듭해가며 체득했다. 예술의 가치는 그런 것에서 더 빛을 발하는 법! 남이 가보지 않고 해보지 않은 미답지를 개척하는 것. 그래서 더 외롭고 힘들고 두렵고 자꾸만 반복되는 실패에 좌절하지만 그래도 끝내 일어나 가보는 것. 그게 예술가의 책무이자 의무이며, 천형인 것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것은 예술가에게 주어진 명령이자 과제입니다.”

그의 말이 묵직하게 가슴에 얹힌다.

노근진 도예가는 앞으로 독도를 작품으로 만들어볼 계획을 세우고 있다. 그의 손끝에서 독도가 어떤 풍경으로 탄생할지 매우 궁금하다.

<대동문화 102호. 2017년 9월 - 10월>

은미희 소설가  somchan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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