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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정할 수 없는 수채화의 길에서아트라이프 - 한부철 화가
은미희 소설가 | 승인 2018.01.04 08:12

장독 위 정화수 그릇 하나.

담다. 245x122cm WaterColor on Arches. 2017

그곳엔 별 같은 매화가 한가득이었다. 아니, 그것은 별도 아니고 매화도 아니고 화가의 비밀한 소망인지도 모른다. 비손으로 소망을 빌었던 마음 속 은밀한 신새벽의 날들이 오롯이 꽃잎으로 사방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정화수가 놓인 장독 뒤로 매화가지 하나가 흐드러진 꽃잎을 매달고 늘어져 있다. 아침 여명에 꽃잎은 꿈인 듯 난분분 흩어지고, 그렇게 꽃잎의 군무 속에서 시나브로 아침은 밝을 것이다.

온통 꽃이었다. 이층, 한부철 화가(47)의 작업실에는. 꽃들은 이미 피어나 있거나 숨죽이며 피어날 날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매화, 자목련, 민들레, 백목련, 동백…… 꽃들은 화가의 손끝에서 다시 숨을 부여받고 있었다. 헌데 화가의 손끝에서 탄생하는 꽃들은 다 순하다. 화려한 동백과 자목련도 화가의 손끝에서는 요염함이나 도발적인 유혹보다는 어딘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는 그런 힘이 느껴진다.

 

바라보다-存在. 100x73cm WaterColor on Arches. 2008

세상의 중심을 그리다

이름이 있는 꽃이건 이름이 없는 꽃이건 화가에게 꽃은 다 같다. 모두 어여쁜 꽃이고, 귀한 꽃이다.

다 저만의 향기가 있고 저만의 색깔이 있고, 저만의 형태가 있는 꽃!!

화가의 꽃은 화폭의 정중앙을 차지하고 있다. 그 꽃은 때로는 바다를 배경으로 서있기도 하고, 담장을 오르기도 한다. 어디에 있건 그건 꽃이다.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름 없는 들풀이건, 당당히 이름이 있는 꽃이건, 향기를 지닌 꽃이건 향기가 없는 꽃이건 꽃들은 차별 없이 언제나 정중앙을 차지한다.

그는 왜 꽃들을 화면 정 중앙에 앉힐까.

“꽃은 다 아름답습니다. 이름 없는 들풀일지라도 그 꽃은 그 존재자체로 아름답습니다. 하나의 존재는 모두 세상의 중심입니다. 다들 주인공이지요. 조연이 아닙니다.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세상의 중심입니다. 그게 바로 꽃들을 중앙에 두는 이유입니다.”

세상의 중심! 세상을 살아가는 그의 단단한 중심을 보는 듯 했다. 어딘지 수줍어하는 듯하면서도 얼굴 어느 어름에선가 올곧은 믿음과 강단이 느껴지는 것은 모두가 세상의 중심이라는 그의 신념 때문이리라. 헌데 그의 꽃들은 도시에 피어있는 요염한 꽃들이라기보다는 어느 시골집 담장이나 보도블럭의 틈새를 비집고 피어나 있거나, 정화수 위로 휘늘어진 순박한 꽃들이다.

空. 153.5x122cm WaterColor on Arches. 2004

그 풍경은 화가의 고향에 닿아있다.

“일찌감치 고향을 떠나 도시로 나와 살면서 마음이 무척 힘들었습니다. 처음에는 고향이 싫었습니다. 부모님은 그곳에서 무척이나 고생하셨지요. 눈만 뜨면 고된 일로 하루를 보내야 했으니까요. 형제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저는 그런 고향이 싫었습니다. 그래서 도시를 동경했는데, 막상 도시에 나와 살고 보니 또 그리운 건 고향이었습니다. 시골출신인 제가 도시생활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여러 가지 문화적 충격들은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것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날 고향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는데, 마음이 무척 편했습니다. 사람들도 좋아해주구요. 그래서 그 뒤로 고향의 이미지를 떠올리며 작업하고 있습니다.”

도시생활에서 오는 문화적 충격으로 한동안 마음고생을 해야만 했던 화가는 고향의 토속적인 이미지들을 담아내면서 그는 좀 편안해졌고, 자기만의 세계를 구축할 수 있었다.

그의 고향은 진도.

예술적 기운으로 충만한 토양에서 그는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고 자랐던 것이다.

 

화업 20년만의 첫 외출

담다. 90x45cm WaterColor on Arches. 2017
담다. 90x45cm WaterColor on Arches. 2017

처음부터 한부철 화가가 꽃을 그렸던 것은 아니었다.

“얼마 전 20여년 동안 해왔던 제 작업을 정리해보는 귀중한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그때 전시회를 준비하면서 가만 돌이켜봤더니 그동안 제가 해왔던 작업들을 4가지로 요약할 수 있더군요.”

‘고향이야기’와 ‘사유하다’ 그리고 ‘바라보다’와 ‘담다’라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다.

첫 번째 ‘고향이야기’는 화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고향의 풍경들을 담아낸 것이고, 두 번째 ‘사유하다’ 시리즈는 떨어지는 낙엽이나 여백을 통해 삶과 죽음에 대한 성찰을 표현한 작품들이며, 세 번째 ‘바라보다’ 시리즈는 바다나 갯벌을 배경으로 꽃이 등장한다. 그 꽃, 혹은 그 꽃과 바다를 바라보는 ‘나’와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이 풍경이되, 바로 타인과 나의 관계이며, 자신의 존재에 대한 각성이기도 하다.

네 번째 ‘담다’ 시리즈는 토속적 신앙의 요소가 결합된 작품들이다. 꽃잎과 장독, 장지문 같은 토속적 소재들과 정화수를 통한 순결함과 정결함 경건함, 혹은 희망을 선보이고 있는 것이다. 그것들을 가만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놀라움을 금치 못 한다. 마치 사진을 찍어놓은 것처럼 매우 사실적이기 때문이다. 장지문의 결 하나하나, 보도블럭이나, 담장의 차가운 시멘트의 질감이나, 장독을 묶고 있는 철사나 꽃잎 같은 사실적 표현들은 마치 사진을 보는 듯 하다.

늘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화가는 한동안 힘들었다고 고백했다. 헌데 그 상실감을 메워준 이가 바로 지금의 부인이다. 한 미술 특강 프로그램에서 부인을 만났고, 만난 지 얼마 안 돼 결혼까지 하게 됐다.

중학교에 진학했을 때 이젤을 선물하고 목포에서 미술학원을 보내줄 만큼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도와준 이가 큰형이었다면 정작 화가가 된 다음에 모든 면에서 자신을 지지해주고 격려해주고 응원해준 사람은 바로 부인이라고 말했다.

“아내와 저는 그림의 대한 생각이 같습니다. 언제나 제 그림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지요. 게다가 아내는 제가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세심한 배려도 잊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 미안하고 고맙습니다.”

부부는 지금도 친구 같고 연인 같다고 고백한다. 화가의 부인은 하늘에서 내린다는데 한부철 화가에게 딱 들어맞는 이야기다.

 

수정할 수 없는 수채화의 길

그런 화가가 처음 그림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이었다. 초등학교 방학숙제로 그림을 그려갔는데, 그게 복도에 걸린 것이다. 오며가며 그 그림을 볼 때마다 이상하게 마음이 뛰는 것을 느꼈고, 화가는 그림을 그리겠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하기 시작했다.

화가는 특히 수채화에 마음을 빼앗겼다.

스밈과 번짐, 밑바탕의 붓의 터치가 투명하게 보이는 수채화의 가벼움은 화가에게 오히려 더 매력적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대학에 진학하고 나서부터는 하고 싶은 만큼 수채화를 할 수 없었다. 유화가 대세인 시절, 스승은 수채화를 하려는 화가를 마뜩찮게 생각했고, 주변에서도 화가를 이상하게 여겼다고 했다.

하지만 화가는 수채화를 놓을 수 없었다.

“사실 유화보다 더 어려운 건 수채화입니다. 자꾸 붓을 가져다대면 색이 망가지고 그러면 그림을 망치게 됩니다. 수채화는 수정을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더 매력적이지요.”

기어이 주변의 만류를 물리치고 화가는 수채화를 고집했다. 그런 화가에게 모아지는 질타는 상처를 주었지만 화가는 포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화가의 고집이 빛나는 순간이 있었다. 올곧게 지켜온 수채화에 대한 애정이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는 순간이었다.

첫 개인전 뒤로 수채화를 고집하는 그에게 사람들은 격려를 보내왔다. 한부철 화가는 수채화의 가벼움을 덜어줄 화가만의 기법을 발견했던 것이다.

가만 보면 그의 작품은 수채화이되 수채화 같지 않은 풍경을 보여준다. 은근한 번짐과 스며듬의 아름다움도 있지만 그 보다는 경계가 뚜렷하며 색이 선명하다. 거기서 더 나아가 밑바탕의 붓 자국이 드러나면서도 어느 지점에서는 입체적 질감까지 느끼게 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 질감이 꽃들을 더 생기있게 만들고 아름답게 만든다.

마스킹 기법. 번지지 말라고 붙여둔 고무를 걷어내지 않고 바로 그 위에 색을 입혀 그려낸 것이 마스킹 기법인 것이다. 그래서였다. 수채화이면서도 유화의 느낌이 나는 것이.

“지금 계획 중 하나는 제가 하고 있는 수채화의 기법서를 내는 것입니다. 그동안 제가 수없이 실험하고 실패한 경험들을 되살려 책으로 묶어서 사람들에게 알릴 예정입니다.”

이십 여년 동안 자기 성찰을 계속해왔듯 화가는 끊임없이 자신이 걸어온 길을 돌아보고 자신이 담아야 할 소중한 가치들을 잊지 않으려 노력한다.

앞으로 그가 보여줄 새로운 그림들이 기다려진다.

은미희 소설가  somchan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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