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허에 쌓이는 은행잎은 더욱 노랗다. 건물이 낡고 바란 만큼 그곳을 차지한 자연의 섭리는 제 색을 더하는 모양이다.

야은 길재(1353-1419)는 고려 말 목은 이색, 포은 정몽주와 더불어 ‘여말삼은’으로 불리는 실천적 주자학자로 신흥사대부였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됐다. 거친 갈림길에서 은거하던 야은은 오랜만에 옛 고려의 도읍 송도를 찾아가 ‘회고가’를 남겼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는 시 구절이 자꾸만 되뇌어진다. 광주 적십자병원, 그 터전에 서서 그리 오래되지 않은 옛날을 회상한다.

(구)광주 적십자병원

택시운전사, 그날의 함성을 보다

산천초목이야 어디엔들 없으랴만 광주의 ‘채미(採薇)’가 남다르게 보이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금 과장일지는 모르나 광주의 오월이 없었다면, 지금의 이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언제나 시대의 모서리에서는 정을 맞는 사람들이 있듯이, 광주는 시대를 대신해서 바위를 깨뜨리고 부서졌다. 그리고 모질게 살아남았다. 광주 적십자병원이 안타깝다. 거의 방치된 느낌, 자본주의는 그곳에 높은 담장을 치고 쇠못을 박았다. 저 안에 들어가 이곳저곳 둘러보고 만져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오월항쟁, 광주민주화운동이 한창일 때, 아마도 이곳 적십자병원은 전성기가 아니었을까. 사람을 치료하는 병원으로써 그보다 영광된 일은 없었을 것이다. 광주 적십자병원 앞 구동교를 바라보며 ‘5‧18민중항쟁 사적11호’가 세워져있다. 그 비문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이 병원은 5‧18광주민중항쟁 당시에는 광주적십자병원으로 부상당한 시민과 시민군을 헌신적으로 치료하고 돌본 곳이다. 당시 긴박했던 상황에서도 의료진은 부상자들의 생명을 돌보고 살리기 위해 헌신적이고 희생적인 활동을 폈다. 혈액이 부족하다는 것이 알려지자 시민뿐만이 아니라 인근 유흥업소 종업원들까지 헌혈에 참여, 뜨거운 시민정신을 발휘했다. 항쟁 후에도 계속 부상자들을 따뜻하게 치료해주는 등 적십자 정신을 빛낸 곳이다.’

비문을 읽고 또 읽는다. 말 그대로 새겨 읽었다. 눈동자처럼 서있는 비석에 한 점 불꽃이 타오르고 충혈 된 시선을 들어 옛 도청 쪽을 바라다본다. 우수수, 은행나무가 잎을 쏟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것도 다른 사람에게 낯선 일일 수가 있다. 모두가 다 안다고 생각하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가 허다하다. 영화 속의 택시운전사는 방송을 믿었고 정부를 믿었다. 그러나 믿을 수 없는 이유를 뒤늦게 깨닫는다. 우리가 수박 겉핥기식으로 알던 광주항쟁이 왜 민주화운동이라고 하는지, 그리고 광주에 여기에 고마워해야 하는 이유를 다시 한 번 깨닫는다.

‘누가 하겠지’가 아니라 내가 해야 할 이유가 분명 있었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는 말이 있듯이, 두 번 다시 같은 역사를 쓴다는 것은 수치스런 일이다. 광주 민주화운동이 기억 속에서 멀어져 간다면 다시 한 번 옛 전남도청과 ‘오월길’을 걸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글로써 아는 것은 몸으로 알기 위해서는 현장에 서보아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 광주적십자병원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준다.

(구)광주 적십자병원

적십자여! 영원하라

흔히 레드크로스(Red Cross)캠페인으로 알려진 적십자운동은 전쟁과 자연재해 등으로 피해를 본 난민을 돌보기 위한 목적으로 조직된 인도주의 단체다. 중립과 평등, 독립을 기본 정신으로 1863년 앙리 뒤낭이 창설한 이래 146개국에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는 1905년 고종의 칙령으로 대한적십자사가 창설되고 경복궁 후문에 병원을 개설했다. 이후 대한의원에 폐합되었다가 1926년에는 일본적십자조선본부 적십자병원이 됐다가 다시 조선적십자병원으로 다시 이름을 바꾼 후 1942년 경성적십자병원으로 개칭됐다. 광복 이후에는 서울적십자병원이 되었고, 한국전쟁과 함께 피난생활을 하기도 했다.

대한적십자사는 우리나라 근대화의 곳곳에서 구호활동과 인권운동에 앞장섰다. 대표적인 예가 한국전쟁의 구호활동이며 전후의 포로송환 등에 공을 세웠다. 특히 1959년 사라호 태풍의 이재민 구호를 비롯해 청소년적십자 활동은 농촌봉사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1971년 한반도가 눈물바다가 된 ‘남북이산가족찾기’도 적십자의 성과다.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 훈훈한 레드크로스. 광주 민주화운동에도 그 이름을 남겼다. 그러나 어떤 이유로 광주적십자병원이 서남대학교병원이 됐다가, 오늘처럼 방치가 됐는지, 시내에 흉물스럽게 남아있는 병원의 건물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다시 한 번 광주적십자병원이 될 수는 없을까.

사람 중심 광주, 돈 없으면 귀빈

광주 적십자병원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참 좋은 병원’이었다고 한다. 치료를 받기고 했고, 입원을 하기도 했던 날들, 비록 몸이 아파서 병 치료를 위해 찾았지만 병원은 생명을 다루는 곳이기도 하다.

돈을 위한 병원이야기가 난무하는 가운데, 오월 광주의 선혈이 흐른 이 곳에서 사람 중심의 병원으로 거듭나길 바라는 마음이다. 어렵고 힘든 사람들을 우선 보살피고, 돈이 없는 사람이 귀빈이 되는 병원은 가망이 없는 것일까.

오월 항쟁의 그날처럼, 서로가 피를 뽑아 주고 주먹밥을 나눠주고 모두가 한 가족처럼 걱정하고 위로하는 광주. 민주‧인권‧평화의 도시에서 시민들이 십시일반으로 운영하는 병원, ‘광주에 가면 적십자병원이 있다’ 이런 훈훈한 소식을 듣고 싶다.

구 광주적십자병원 후원에 아름드리나무 두 그루가 다정하게 서있다. 역사의 산 증인이 되어 봄에는 신록을 피우고 여름에는 그늘을 준다. 지금은 초겨울,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낙엽만이 애처롭다. 곳곳이 막히고 칠이 벗겨져 나간 건물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떨어지지 않는 발길을 옮긴다. 그땐 그랬지, 인걸은 간 곳 없는 것이 아니라 ‘일기일회’의 기회를 보고 있을 터이니. 더구나 이곳은 1919년 3월 10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던 ‘광주작은장터’자리이기도 하다.

(대동문화 104호. 2018. 1-2월)

김을현 기자  somchanel@naver.com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