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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상원 열사 곁에 새겨진 총과 밥, 그 의미는?<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생가를 찾아서
임영열 시민기자 | 승인 2018.05.16 10:31

 

무등산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광주광역시의 모습

무등산(無等山)이 어머니 품처럼 포근히 감싸고 있는 도시, 빛고을 광주에 오월이 다시 왔다. '광주의 오월'은 여느 도시처럼 라일락 향기 짙어가고 산천은 연한 초록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빛의 도시' 답게 눈부시고 푸르게 빛나고 있지만, 그 찬란한 푸르름 속에는 서글픔과 애잔함이 배어 있다.

'오월 광주' 하면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대변인, 서른 살 청년 '윤상원 열사'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거의 동의어처럼 한몸으로 묶여 있다. 동시대를 살았던 사람으로 부채의식 때문일까. 매년 이맘때가 되면 조금씩 흐릿해져 가는 기억 속의 그를 호명해 낸다. 윤상원 열사의 생가가 있는 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천동마을로 향한다.

광산구 임곡동, 구한말 나주와 광산지역 의병 활동의 본거지였던 용진산이 자리하고 있다. 퇴계 이황과 함께 13년 동안 110여 통의 편지를 주고받으며 '사칠논변(四七論辯)'으로 조선 성리학을 꽃피웠던 고봉 기대승의 월봉서원(月峯書院)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의(義)와 학문(學文)'의 고장이다. 남도의 젖줄 영산강의 지류, 황룡강이 무심히 흐르고 지척에 천동마을이 있다. 광주광역시에 속하지만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소금을 연주하고 있는 생전의 윤상원 열사. ⓒ 윤상원기념사업회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 윤상원 열사의 생가 벽돌담에는 군 복무 중 윤상원 열사가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글이 적혀 있다

원래 마을 이름은 '샘골'이었다. 일제 강점기 때 한자어로 고쳐 '천동(泉洞)' 마을이라 부르게 됐다. 마을 입구를 걸어 올라가면 오래된 시골집들 사이로 열사의 생가임을 알리는 노란 배너와 벽화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좁은 골목길을 따라가는 하얀 벽돌담 에는 1974년 군 복무 중 아버지에게 보낸 윤상원 열사의 편지글이 소개돼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내가 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해낼 수 있을 것인지. 침울한 밤을 새운 적도 있습니다. 내년에 복학을 하면 어려운 현실과 싸울 작정입니다…"

1974년, 어떤 시대였던가. 서슬 시퍼렇던 '유신 독재'가 한창이었던 시절이었다. 암울한 현실을 바라보는 스물네 살 젊은 윤상원의 깊은 고뇌와 민주주의를 향한 갈망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광주광역시 광산구 천동에 있는 윤상원 열사의 생가.“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라는 팻말로 윤상원 열사는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열사의 생가에 들어선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은 2004년 겨울 화재로 소실됐다. 윤상원 열사의 뜻을 기리고, 민주주의의 숭고한 가치를 널리 알리기 위해 이듬해 5월에 '윤상원·박기순 열사 자료전시관'으로 복원했다. 열사의 호를 딴 '해파재(海波齎)'라는 현판이 걸려 있다.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주인이 없더라도 보고 가십시오"라는 팻말로 윤상원은 방문객을 맞이하고 있다. 기념관에는  5·18 광주항쟁의 역사와 정신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잘 정리된 사진과 일기장 등이 전시돼 있고 방명록 옆에 열사의 흉상이 놓여 있다.

마당 오른쪽 한편에 윤상원과 그의 '영혼의 반려자'인 박기순 열사의 얼굴이 부조된 기념비가 있다. 오월을 상징하는 오각형 기단석위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올려져 있다. 수레바퀴에는 "민주주의를 위해 우리가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라는 그의 마지막 연설문이 새겨져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놨다. 밥그릇에는 '민주'라고 새겨져 있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함축되어 있다.

열사의 생가 마당 한편에 윤상원 열사와 그의‘영혼의 반려자'인 박기순 열사의 얼굴이 부조된 기념비가 있다. 기념비 중간에 한 자루의 총과 '민주'라고 새겨진 고봉밥 한 그릇을 형상화해 놓았다. "총과 밥" 많은 의미가 담겨 있다

추모비 옆에는 기념 조형물들이 세워져 있다.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영혼결혼식 때 헌정된 <임을 위한 행진곡>과 5·18 항쟁 당시 열사의 활동을 중심으로 기록해 놓은 입간판 형태의 기념물 들이다. 거울로 만들어진 기념물이 있다. 자세히 보니 '역사는 미래의 거울이다'라고 적혀 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미래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까. 오월 광주의 상징이자 시대의 들불, 영원한 시민군 대변인 윤상원 열사의 시간은 1980년 5월에 멈춰 있다.

어떻게 살 것인가

윤상원 열사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해인 1950년 8월 19일 이곳 천동 마을에서 윤석동 선생과 김인숙 여사 사이에 3남 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본명은 윤개원이다. 장성한 후에 윤상원으로 개명했다. 이곳에 있는 임곡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고·대학교는 광주에서 다녔다.

고등학교 졸업 후 삼수 끝에 전남대학교 정치외교학과에 입학한다. 입학 후 연극반 동아리에서 극예술에 심취한다. 연극을 통해 인간의 깊은 내면세계를 탐구하며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해 깊은 고뇌에 빠진다.

재학 시절 학생운동을 주도했고, 졸업 후 노동운동을 하려 했던 그는 1978년 대학 졸업과 동시에 주택은행에 입사해 광주를 떠나 서울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다. 그 당시 은행은 높은 연봉에 정년이 보장된 선망의 직장이었다. 얼마든지 안락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나 유신독재의 암흑시대, 돈을 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동료·선·후배 동지들이 눈에 아른거렸다. 반년 만에 사표를 내고 광주로 내려온다.

생전의 윤상원 열사와 영혼의 부부가 된 박기순 열사 ⓒ 5.18 기념재단

영혼의 반려자 박기순을 만나다 

광주로 내려온 윤상원은 고졸 출신으로 학력을 위장해 광천 공단에 있는 플라스틱 공장에 위장 취업한다. 하루 10시간씩 트럭에 짐을 싣고 내리는 힘든 노동의 연속이었다. 윤상원은 '진짜 노동자'가 돼갔다. 윤상원 말고 또 한 명의 위장 취업자가 있었다.

스물두 살의 꽃다운 여성 박기순이다. 박기순은 전남대 국사학과 3학년 재학 시절 '교육지표 시위 사건'으로 강제 휴학을 당한 후 위장 취업해서 노동운동을 하고 있었다. 바로 '들불야학'이다. '야학(夜學) 운동'이야말로 현실에 입각한 노동운동이라는 박기순의 말에 공감했던 터라 윤상원은 바로 들불야학에 합류한다.

야학운동은 들불처럼 번져 나갔다. 유신독재 말기의 폭압도 그들을 막지 못했다. 그러나 그해 겨울 '노동자들의 누이' 박기순이 과로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윤상원은 일기장에 "훨훨 타는 그 불꽃 속에 기순이의 넋은 한 송이 꽃이 돼 가슴속에 피어난다"라고 눈물로 적어 놓았다. 노동운동가 윤상원과 박기순은 훗날 '혼령의 부부'가 된다.

그들에게 자비(慈悲)는 없었다

1979년 10월 26일 마침내 박정희의 죽음과 함께 유신독재가 무너지고 '서울의 봄', 1980년 5월이 왔다. 전국 각지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대학생들과 시민들이 연대한 광주의 집회는 그 어느 곳보다 뜨거웠다. 정권을 찬탈하려던 '전두환 신군부'는 광주를 목표로 삼았다. 바로 계엄군을 내려 보낸다.

작전명 '화려한 휴가'였다. 지상에서는 공수부대가 곤봉으로 머리를 깨부수고 대검으로 찌르고, 총으로 쏘았다. 공중에서는 무장 헬기가 콩 볶듯이 기관총을 난사했다. 시민들은 꽃잎처럼 떨어졌다. 두부처럼 뭉개지고 잘려 나갔다. 어린 학생, 막 결혼한 신혼부부, 임신한 여인 가릴 것 없이 닥치는 대로 짓밟히고 육신에 구멍이 뚫린 채 형채를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처참하게 죽임을 당했다.

1980년 5월. 그 푸르던 날, 가정의 달이며 이 땅에 자비를 베풀러 부처님이 오신 날, 그들에게 자비는 없었다.

5.18 당시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폭도'로 매도했다. 신군부의 삼엄한 검열 하에 어느 언론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 5.18 기록관

윤상원은 이 사실들을 똑똑히 목격했다. 당시 광주는 완전히 '고립된 섬'이었다. 정규 언론들은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매도했다. 분노한 시민들은 광주 MBC 방송국을 불태웠다. 훗날 MBC는 5·18 왜곡보도에 대한 반성문을 쓰기도 했다.

<전남매일신문> 기자들은 단 한 줄의 진실도 싣지 못하는 현실에 좌절하며 "우리는 부끄러워 붓을 놓는다"는 사직서를 제출했다. 어디에서도 진실을 접할 수 없었다. 윤상원은 진실을 알려야 한다는 생각에 들불야학 동지들과 함께 시민들의 '눈과 귀' 역할을 하는 <투사회보>를 만들기로 한다. 밤을 새워 등사기로 <투사회보>를 만들어 시내에 뿌렸다. <투사회보>만이 진실을 알리는 '유일한 언론'이었다.

5.18 항쟁 기간중 유일하게 진실한 언론 역할을 했던 <투사회보> ⓒ 5.18 기념재단

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다른 도시와는 달리 광주시민들의 저항은 거셌다. 시민군에게 밀려 외각으로 퇴각한 계엄군들은 전남도청을 장악하고 있던 시민들에게 최후통첩을 보내왔다. "폭도들은 무기를 버리고 투항하라." 도청 안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총을 내려놓자는 사람들과 끝까지 투쟁하자는 사람들로 양분됐다. 윤상원이 나섰다.

"우리가 비록 저들의 총탄에 죽는다 할지라도 그것이 우리가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민주주의를 위해 최후의 순간까지 굳게 뭉쳐 싸워야 합니다…"

봄날이 끝나갈 무렵인 1980년 5월 27일 새벽, 계엄군들은 M16 소총과 장갑차를 앞세우고 시민군의 본거지인 도청으로 진격해 오고 있었다. 복도 창가에 서있던 윤상원과 동지들은 이승에서의 마지막 인사를 나눈다.

"우리 저승에서 다시 만납시다…" 순간 귀를 찧는 파열음과 함께 총탄이 날아들었다. '아이쿠' 하는 소리와 함께 윤상원은 총을 든 채로 쓰러졌다. 어슴프레 동이 트고 핏빛으로 물든 전남 도청의 새벽을 무등산은 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렇게 '광주의 피'를 먹고 제5공화국이 탄생했다.

5.18 민주묘지에 함께 잠들어 있는<임을 위한 행진곡>의 주인공, 윤상원-박기순 열사의 묘소. 1982년 두 열사의 영혼 결혼식때 헌정된 노래가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영혼의 반려자 박기순을 먼저 떠나보낸 윤상원은 그렇게 1980년 5월 27일 서른 살의 젊은 나이로 박기순의 뒤를 따랐다. 그가 죽고 2년의 세월이 흐른 1982년 2월 20일 망월동 묘역에서는 특별한 결혼식이 열린다. 신랑 윤상원도 신부 박기순도 보이지 않았다. 세상에서 가장 슬프고도 아름다운 '영혼 결혼식'이다.

이 결혼식에 헌정된 곡이 바로 <임을 위한 행진곡>이다. 백기완의 장편시 <묏비나리>를 개작해 소설가 황석영이 가사를 썼다. 윤상원 열사의 전남대학교 후배이자 1979년도 대학 가요제에서 <영랑과 강진>이라는 서정성 짙은 노래로 은상을 수상한 싱어송라이터 김종률이 곡을 붙였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  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  동지는 간데없고 깃발만 나부껴/ 새날이 올 때까지 흔들리지 말자/ 세월은 흘러가도 산천은 안다…"

5.18 민주 영령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가는길에는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만장처럼 흐느끼고 있다. 멀리 보이는 무등산은 '그날' 처럼 말없이 광주를 지켜 보고 있다

올 오월에도 열사들이 잠들어 있는 망월동 국립묘지 가는 길에는 '하얀 쌀밥' 같은 이팝나무 꽃들이 흐드러지게 피어나 만장(輓章)처럼 흐느끼고 있다. 꽃잎처럼 떨어져 간 열사들은 말없이 누워 있다. 오월 영령들 앞에 선다. 물음을 던져본다. 열사들이 꿈꾸던 더불어 사는 대동세상. 우리는 지금, 함께 가고 있는가?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광주 5·18의 진실을 널리 알리기 위해 <오마이뉴스>에도 송고했습니다.

임영열 시민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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