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도시(Radiant City)’는 근대건축의 거장 르 꼬르뷔제에 의해 창시된 도시 디자인 이론의 상징적 표제다. 비좁은 골목길을 따라 나지막하게 밀집된 건물들 대신에 초고층 건물을 세워 넓은 공원과 조망 좋은 오픈 스페이스를 확보하자는 게 이론의 주요 골자다. 꼬르뷔제의 이같은 거대 구조 중심 도시 조성론은 20C 초엽까지 도시 계획의 보편적 진리처럼 여겨져 왔으며, 실제로 꼬르뷔제는 브라질리아 시티 계획을 통해 자신의 이상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꼬르뷔제의 빛나는 도시론은 그러나 그로부터 30여년이 지나지 않아 철퇴를 맞는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제인 제이콥스(Jane Jacobs)가 ‘미국 대도시의 삶과 죽음(the Death and Life of Great American Cities)'이라는 책을 세계적 베스트셀러로 띄우면서 빛나는 도시론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선 후부터다.

“도시는 어느 한 계획가의 이론에 따라 견고하게 조직될 수 없다. 그곳에서 살아갈 사람들에 의해 살아있는 유기체처럼 만들어져가는 것이다”

“가로(street) 그 자체는 아무것도 아니다. 여기에 오가는 사람들이 가득차고 생기 있는 행위가 일어나야만 그 역할을 다하는 것이다”

“도시는 우리의 몸과 다름이 없다”

제이콥스의 이같은 당대의 역설은 폭발적인 공감을 불러 일으켰다. 고층 빌딩군 중심으로 선을 긋고 구역을 잘라 개발된 도시들이 이미 슬럼화와 주택난, 공해, 양극화에 따른 도시범죄의 급증 등 심각한 병폐들을 쏟아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생태 도시의 꿈으로 진전된 제이콥스의 주창은 이제 현대 도시 계획 이론의 대세가 됐다. 뿐만 아니라 제이콥스는 도시를 보는 엘리트주의적 통념을 전복한 혁명적 도시 계획가로 회자되고 있기도 하다. 구시가지 보존, 축출이 아닌 재활 방식의 재개발, 골목 살리기, 도보 공간의 존중 등 진보적 공간 운동들이 모두 제이콥스의 사고로부터 출발했기 때문이다.

구 현대극장 중앙초등학교 교사

광주 근대유산 재조명 프로젝트

그렇다면 ‘아름다운 도시’의 21세기적 의미는 무엇일까?

제이콥스의 논점대로라면 ‘걷고 싶은 도시’라는 상식적인 답변이 마련돼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눈길을 끄는 가로라는 캔버스는 공동체의 기억이 공유되는 낯익은 감흥이 핵심 구성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로부터 걷는다는 일 자체가 단순한 속도의 전개가 아닌, 활기차고도 유의미한 행위가 되는 까닭이다. 근대 건축물 보존 사업과 같은 기억 재현 프로젝트가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광주시가 최근 근대건축물 기록보존 사업 추진 계획을 밝혔다. 늦은 감이 있지만 지당한 결정이다. 부산, 군산, 목포, 대구, 인천 등 도시들이 일찌감치 보존 사업에 나서 그 결과물들을 주요한 문화관광 콘텐츠로 활용하고 있음을 감안할 때, 광주시의 경우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바나 다름이 없다.

시의 조사 자료에 따르면 대상군도 결코 적은 숫자가 아니다. 84여개 건축물이 보존가치가 있는 것으로 집계되고 있다. 이들 건물들이 적정한 재생 과정을 거쳐 재조명될 수 있다면 광주의 훌륭한 유형 문화 콘텐츠로 각광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한 가지 우려되는 측면은 근대유산 발굴 사업이 단순한 기록 보존의 단계에 그쳐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과거의 것이든 현대의 것이든, 건축물은 쇼케이스에 갇혀있어선 안 된다. 박제화된 건물은 거리에 생기를 불어넣을 수 없다. 훼손이 염려되는 상황만 아니라면 근대유산 또한 일정한 역할과 기능으로 활용되어져야 한다. 눈부시게 아름다운 근대의 상징들이 그저 시간의 흔적만을 껴안은 채 빈 공간으로 남아있는 모습은 홀로 된 노인들처럼 안타깝고 을씨년스럽기 조차 하다.

이런 측면에서 유럽의 고도들에 즐비한 오래된 건물들의 재생 방식은 우리에게 교훈을 안겨준다. 20세기 후반에 건설된 고층 빌딩들이 이미 슬럼의 그늘 속으로 잠겨가고 있는 것에 반해 오히려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닌 고건물들은 여전히 일상의 용도로 잘 활용되고 있다. 상업 건물, 업무 시설, 주택 등 그 쓰임새도 다양하다. 승강 시설, 냉난방 설비, 방재 시스템 등 현대적 활용에 꼭 필요한 장치들을 안간힘을 다해 보완하면서도 건물을 버리지 않는 모습은 차라리 기이하게 느껴질 정도다.

퇴락한 모습이지만 여전히 살아 움직이는, 그러한 건물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늘어선 거리를 소요하는 재미가 누구나가 인정하는 유럽 대도시 체험의 빠트릴 수 없는 즐거움이기도 하다. ‘집은 모름지기 사람이 들어가 살지 않으면 망가진다’는 우리네 옛 선인들의 지혜가 새삼 가슴에 와 닿는 대목이다.

장동 골목길 단독주택 서석동 골목길 안철훈 내과

‘점· 선· 면’으로 본 공간의 맥락 찾기

모든 도형이 3요소로 형체를 갖추듯이 도시 또한 점· 선· 면으로 구성돼 있다. 점은 건물과 같은 장소이고 선은 이들 장소들을 잇는 도로나 가로를 상징한다. 면은 고저와 들고 남, 그리고 비껴남과 엇갈림으로 만들어지는 형상의 단면을 의미한다.

이 세 가지 요소는 하나의 맥락으로 얽혀있을 수밖에 없다. 묵은 시간이 내려앉아 만들어진 산하의 형상처럼 그 맥락이 자연스러운 도시가 곧 ‘좋은 도시’의 이상형이다. 정주민들에게 삶의 어메니티를 안겨주기 때문이다. 반면에 점이 홀로 떠돌고 선이 엇갈리며 면이 뒤틀린 도시를 우리는 난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비하한다. 아무리 훌륭한 공간 계획도 그 맥락 속에 용해되지 않으면 낯선 오브제일 뿐이다.

근대 건축물의 재조명 사업 또한 그 맥락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시간의 침잠이 공유되는 거리로 그 이미지가 이어졌을 때 제몫을 할 수 있다. 인천, 군산, 대구의 근대유산 살리기가 성공적인 프로젝트로 특별히 각광을 받게 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개항기의 건물들이 오래된 거리나 골목 풍경으로 이어져 이야기를 낳으면서 도보 투어의 즐거움을 선사하고 있다.

근대유산이라는 하나의 점에 대한 관심도 중요하지만 이 점들이 장소성(site-specificity)의 가치로 발현되기 위해서는 시간의 흐름이 공유되는 가로와 하나의 흐름 속에 섞여야 한다. 근대건축물의 재조명과 함께 도시 공동체의 오래된 삶의 흔적이 남아있는 가로나 골목길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한다는 얘기다.

다행스럽게도 광주의 옛 도심 또한 걷는 즐거움을 선사할 만한 시간의 흔적들이 적지 않다. 동명동과 장동, 사동, 불로동, 양림동, 계림동의 골목길을 걸으며 유심히 주변을 살펴보면 기억 속에 아스라이 남아있는 뜻밖의 기호들을 발견하게 된다. 조금은 과도하게 치장된 적벽돌 굴뚝, 검게 녹이 슨 장석 달린 대문, 기와를 이용한 담장 장식 등을 보노라면 슬그머니 입가에 웃음이 괸다. 그 거리에 대한 남다른 얘깃거리들을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라면 도보의 즐거움은 더욱 배가될 것이다.

고 김수근 설계, 빛고을 아트 스페이스 양림동 우일슨 선교사 사택

‘걷고 싶은 광주 만들기’ 청사진 짜여야

세계사는 도시사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어느 시대, 어느 사회든 역사에 회자되는 찬란한 문화를 일궈낸 곳은 창조적이고 활력에 넘치며 살만한 도시가 그 중심에 있었다는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또한 그 도시의 몰락과 함께 그 시대의 영화 또한 종언을 고했음은 물론이다.

광주는 지금 아시아문화중심도시로의 비상을 꿈꾸고 있다. 아시아문화전당이 문을 열고 나면 그 꿈은 더욱 구체화될 것이다. 이를 광주 도약의 기회라 여기지 않을 사람들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시아문화중심도시, 꿈의 광주를 그려내는 지역 공동체의 담론은 솔직히 취약하기 짝이 없다. ‘살만한 도시는 무엇인가’ 라는 인문적 고찰 또한 터무니없이 부재함은 물론이다. 이러한 질문들에 답할 수 있는 시민 사회의 가치 통합 없이는 ‘살만한 도시 광주’의 미래 또한 암울할 수밖에 없다.

최근 광주시가 다행스럽게도 근대유산 복원에 나섰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차제에 광주 전체의 공간들을 도상에 올려놓고 ‘걷고 싶은 도시’, ‘찾고 싶은 도시’, ‘살만한 도시’를 좌표로 총체적 재생의 시간표를 짜보았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대동문화 73호 [2012 11.12월호]

박호재 광주문화재단 문화정책실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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