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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의 노래가 된 ‘오라비들의 엘레지’분단의 시기 '이데올로기의 희생양', 음악가 안성현과 시인 박기동
임영열 시민기자 | 승인 2018.07.23 11:38
고려시대 처녀 '드들이'의 슬픈 전설을 담은채 드들강은 풍요로운 남도땅 나주평야를 적시며 영산강 본류와 합류 한다 ⓒ정찬용

아기 손처럼 보드랍던 연둣빛 신록이 검푸른 녹음으로 짙어가며 원숙한 여인의 모습으로 변해가고 있다. 연분홍치마 휘날리던 봄날의 강도 가뭇없이 사라지고 어느새 계절의 강은 여름을 향해 흐르고 있다.

온후하고 순한 사람들이 사는 땅, 화순(和順)의 왕피나무골에서 발원한 '여름날의 강'은 목사골 능주를 거쳐 구비구비 그림 같은 풍경을 연출하며 약 4km를 흘러 나주 남평에 이른다. 이곳 사람들은 이강을 지석강(砥石江)이라는 공식적인 이름 대신에 늘 부르던 익숙한 이름, '드들강'이라고 부른다.

드넓은 남도 땅, 나주평야를 흥건히 적시며 목포 앞바다로 흐르는 영산강의 지류인 드들강변에는 여름이 가득하다. 능수버들의 검푸른 초록과 새로 돋아난 갈잎. 울창한 솔밭 사이를 흐르는 초록의 강은 가히 서정적이다. 여름 풍경의 백미는 강변이 아닐까 싶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탄생한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가 이곳 나주 남평 드들강변에서 낭만파 음악가 안성현을 만나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정찬용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가 노래로 태어난 곳

강변 솔밭 유원지에는 낙랑장송들이 하늘을 향해 쭉쭉 뻗어있고 조선 선조 때 지암 윤선기가 탁족(濯足)을 즐겼다는 탁사정(擢斯亭)이 멋스럽게 자리하고 있다. 탁사정 옆에 '엄마와 누나'의 모습을 청동상으로 형상화한 모던한 스타일의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유년시절, 이 아름다운 강변에서 반짝이는 금모래 빛과 뒷문 밖에서 들리는 갈잎의 노래, 고운 쪽빛 물길을 자양분 삼아 음악적 감수성을 키웠던 한 낭만파 음악가가 있었다.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 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

강변 안쪽 솔밭에는 조선 선조때 지암 윤선기가 탁족을 즐겼던 탁사정과 안성현의 <엄마야 누나야> 노래비가 세워져 있다. 엄마와 누나의 모습을 형상화한 청동상이 강변의 풍경과 조화를 이루고 있다 ⓒ정찬용

누구나 다 아는 김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다. 마치 소월이 이곳 드들강변에서 이 시를 지은 듯 풍경과 시가 오버랩된다. 평안북도 정주에서 탄생한 소월의 시는 남도 땅, 나주 남평에서 음악가 안성현을 만나 노래로 다시 태어났다.

초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실려 있어 누구나 다 불렀던 노래였지만 작곡가는 알려지지 않았다. 이 노래를 최초로 만든 원조 작곡가가 남평 드들강변에 살았던 안성현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그럴만한 사연이 있다.

다소 생소한 이름의 낭만주의 음악가 안성현(安聖絃 1920~2006)은 나주시 남평읍 동사리에서 태어났다. 남평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열일곱 살이 되던 1936년에 가야금산조 명인이었던 아버지 안기옥(安基玉 1894~1974)을 따라 함경남도 함흥으로 이주해서 살다가 일본에 유학, 도쿄의 도호 음악대학 성악부를 졸업했다.

음악선생과 국어선생의 운명적 브로맨스

대학을 마치고 고국으로 돌아온 안성현은 전남여중과 광주사범학교, 조선대학교에서 음악교사로 재직했다. 그러던 중 안성현은 1947년에 목포의 항도 여중(현 목포여고)으로 자리를 옮긴다.

당시 광주사범학교에서 국어를 가르치며 시인이자 수필가로 활동하던 조희관이 항도여중 교장으로 부임하면서 안성현을 음악교사로 스카우트해 간 것이다. 항도여중을 최고의 명문학교로 만들겠다는 조희관 교장의 의도였다.

안성현은 곧바로 합창단을 구성하여 그해 전국 합창대회에서 준우승을 했다. 일 년에 두 차례의 작곡 발표회와 작곡집을 발간하며 실력 있는 음악 선생으로 명성을 얻게 되었다. 그러던 이듬해 운명의 친구, 국어선생 박기동 시인을 만나게 된다

1954년 평양에서의 안성현(좌측)과 2004년 54년만에 누이동생이 묻힌 벌교를 &#52287;은 박기동 시인. ⓒ 나주시청. 벌교청년회의소

박기동(朴璣東 1917~2004) 시인은 1917년에 여수 돌산도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이 되던 해에 가족과 함께 전남 보성 벌교로 이사 왔다. 한의사였던 아버지 박준태의 넉넉한 가정 형편 덕에 14세의 어린 나이에 일본으로 조기 유학을 떠났다. 그곳에서 중학교를 마친 후 관서대학에 진학하여 영문학을 전공하지만, 식민지 현실에 절망하며 우리말과 글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시인이 되기로 결심한다.

1943년에 귀국하여 벌교 남초등학교와 벌교 상고에서 국어, 영어 교사를 지내고 1947년 순천사범학교에서 근무 중 좌익 계열의 '남조선교육자협의회'에 가입한다. 이때 세칭 '교협 사건'이 발생하여 순천경찰서에 구금되고 교사직을 박탈당한다. 시인에게 '빨간 색깔의 옷'이 입혀지는 순간이었다. 이때, 실의에 빠져 있는 박기동을 조희관 교장이 항도여중의 국어교사로 초빙한다.

그렇게 음악선생 안성현과 국어선생 박기동은 목포 항도여중에서 만나 단짝으로 지냈다. 조희관 교장이 두 사람을 아껴 자연스럽게 어울리면서 친해진 탓도 있었지만, '음악과 시'라는 예술적 감수성이 통했기 때문이다. 박기동은 시를 쓰고 안성현은 그의 시에 운율을 입혀 노래로 만들었다. 이즈음에 그들에게 붉은색이 덧씌워지는 슬프고도 애달픈 노래 <부용산>이 탄생한다.

요절한 누이를 그리는 오라비들의 비가(悲歌)

안성현과 박기동에게는 어린 누이들이 있었다. 안성현에게는 아버지 안기옥이 북으로 떠난 뒤 그가 보살폈던 안순자가 있었고 박기동에게는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동생 박영애가 있었다. 이런 걸 운명이라고 할까. 공교롭게도 두 동생들은 1947년 같은 해에 불치의 병, 폐결핵으로 오라비들의 곁을 떠난다. 박영애는 스물넷이었고 안순자는 열다섯의 피어나지도 못한 꽃봉오리였다.

박기동은 벌교 읍내에서 오리 길인 연꽃 모양의 부용산 기슭에 어린 동생을 묻고 내려오면서 사무치는 그리움과 애틋함이 담긴, 누이를 기리는 시 <부용산>을 남긴다.

"부용산 오리 길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 사이사이로/ 회오리바람 타고/ 간다는 말 한마디 없이/ 너는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 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 부용산 봉우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연꽃 모양의 벌교 부용산. 박기동시인은 부용산 기슭에 간다는 말한마디없이 가버린 어린 누이를 묻고 내려와 <부용산>이라는 '제망매가'를 남겼다 ⓒ박성환

먼저 저세상으로 간 어린 누이들을 가슴에 묻고 동병상련을 앓고 있던 음악가와 시인은 또 다른 죽음을 맞이 한다. 해방을 맞아 경성사범학교에서 고향인 목포 항도여중으로 전학 온 문학소녀, 김정희라는 학생이 폐결핵으로 열여섯의 나이에 요절한다. 안성현은 아끼던 제자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며 박기동의 시 <부용산>에 운율을 입혀 노래로 만들었다.

그렇게 시와 노래로 만들어진 <부용산>은 안성현과 박기동의 누이 안순자(15)· 박영애(24)· 제자 김정희(16), 세 명의 어린 죽음을 애도하는 만가(挽歌)이자, 요절한 누이를 그리는 오라비들의 비가(悲歌)였다.

빨간 줄이 그어진 음악가와 시인

격동의 시기, 남도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구전되어 가던 슬픈 노래는 또 다른 운명을 잉태하고 있었다. 1948년 10월에 발생한 '여순사건'으로 산으로 쫓겨간 빨치산들은 애잔한 곡조와 노랫말에 매료되어 <부용산>을 즐겨 부르며 슬픔을 달랬다. 오라비들의 엘레지는 '빨치산의 노래'가 되어버렸다.

한국전쟁이 발발한 1950년 9월 안성현에게 붉은 줄이 그어지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한다. 동경 유학시절 알고 지냈던 '월북 무용가 최승희'의 딸 안성희가 무용 공연차 목포에 왔다. 안성현은 아버지 안기옥과 최승희를 만나볼 요량으로 안성희의 북행길에 동행했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길이 막혀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안성현은 그렇게 '월북자'라는 붉은 낙인이 찍혀 금기어가 되었다.

박기동 시인도 1957년에 교직을 떠났다. 안성현과 연좌되어 좌경 시인으로 몰려 가택수색과 연행·구금을 당하며 시집 한 권도 내지 못했다. 더 이상 시를 쓸 수 없다는 절망감에 시인은 76세의 노구를 이끌고 혈혈단신 조국을 버리고 이역만리 호주로 떠났다.

어린 누이를 가슴에 묻은지 53년이 지난 2000년 9월 별교 부용산을 &#52287;은 박기동 시인. ⓒ 벌교청년회의소

작자 미상의 노래로 은밀하게 불려지던 <부용산>은 1997년 민중가수 안치환을 만나 세상 밖으로 나온다. 안치환은 신곡 앨범 <노스탤지어>를 내면서 <부용산>을 취입하였다. '작자 미상의 구전가요'라는 설명과 함께. 그 뒤 원작자가 밝혀지면서 한영애·이동원이 취입하였고, 많은 예술인들의 작품 소재가 되었다.

목포 출신 연극인 김성옥(전 환경부 장관이며 연극인 손숙 씨의 남편)도 그중 한 사람이다. 2000년 박기동 시인은 김성옥의 부탁으로 호주에서 부용산 2절을 작시한다. 그해 5월에 열린 '목포 부용산 음악제'에서 실로 53년 만에 <부용산 2절>이 소프라노 송광선에 의해 선보였다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 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데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음악선생 안성현과 국어선생 박기동이 근무했던 항도여중(현 목포여고) 교정에 세워진 부용산 노래비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 있으니' 이 부분을 지으면서 83세의 노 시인은 통곡을 했다고 한다. 그 뒤 시인은 2003년 호주 생활을 청산하고 영구 귀국하여 서울에서 살다가 2004년 87세를 일기로 한 많은 생을 마감했다.

안성현도 86세가 되던 2006년 4월 북한에서 눈을 감았다. 북한의 <문학신문>은 음악가의 부고를 전하면서 민족음악 발전에 큰 공을 세운 '공훈예술가 안성현'의 죽음을 애도했다.

분단의 시기, '이데올로기의 희생양'이 된 두 예술가의 기구한 삶을 아는지 모르는지 시인의 시비가 세워진 벌교 부용산의 잔디와 하늘은 '그날'처럼 푸르디푸르고, 음악가를 키운 남평 드들강변 '갈잎의 노래'는 애달프기만 하다.

덧붙이는글: 이 기사는 대동문화 107호 (2018 7. 8월호)에 실렸습니다.

임영열 시민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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