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아, 넌 꿈이 뭐니? 나에게 물었을 때 마음 깊은 곳에서 작은 울림이 들려온다. ‘꿈? 그건 하루하루 만들어 가는 거잖아. 그리고 네가 행복하면 그게 네 꿈인 거야. 그래서 난 오늘도 노래한다. 그것도 트로트를!

신인가수 박하늘 양

요즘 TV를 보다 보면 여기저기 K-POP 열풍이 한창이다.

친구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거나 옆에서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걸 들어봐도 K-POP이 대세임을 실감케 한다. 올해 나이 28. 트렌디한 유행가가 좋을 나이. 나도 K-POP이 좋다. 그런데 엄마 아빠가 좋아하고 또 할머니가 좋아하셨던 트로트를 부를 때가 가장 행복하다.

‘나이에 맞는 노래 좀 해’~

‘애늙은이처럼 촌스럽게 무슨 트로트야~’

내가 트로트를 부를 때면 늘 들려오는 소리. 사실 나도 왜 트로트가 좋은지 딱히 설명은 못하겠다. 그런데 트로트를 부를 때면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해진다.

1남 6녀. 뜬금없이 웬 새마을운동 시대 자녀구성이냐고.

시대에 맞지 않는 대가족이다. 새 학기 자기소개 시간에 남들과 달라 조금은 얼굴을 붉게 만들었던, 그 대가족 중에서도 막내딸이다. 진짜 막내는 당연히 금지옥엽 아들내미. 딸 부잣집인 우리 집은 언제나 흥이 넘쳤다. 위로 5명이나 있던 언니들은 늘 노래하고 춤추는 걸 즐겼다.

문화 대통령 서태지와 아이들이 음악계를 장악했을 시절 언니들은 랩이란 걸 선보이며 로보트 춤에 빠졌었고 룰라의 엉덩이춤을 줄줄이 서서 흉내 낼 땐 나도 맨 끝에 있는 언니 바지가랭이를 붙잡고 있는 힘껏 엉덩이를 두드려 줬다. 그때부터 좋았다. 노래하고 춤추는 것이.

그런데 왜 하필 트로트가 좋은 걸까.

다른 집과 다르게 아이들이 많았던 터라 방학이 되면 늘 할머니 집으로 휴가를 가곤 했었다. 아마도 힘들었을 엄마를 도와주기 위한 할머니의 작은 배려가 아니었나 싶다. 지금은 저 높은 하늘에서 보고 계실 할머니, 할머니는 늘 따뜻하고 유쾌했다. 우리가 노래를 부르면 할머니는 리듬감 있는 박수로 밴드를 자청하셨고, 얼씨구~ 추임새로 코러스 역할까지 놓치지 않으셨다.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트로트를 부르면 마음이 따뜻하고 행복했다. 앵콜~!을 외치는 할머니의 행복한 모습이 나를 행복하게 했다. 그리고 알았다. 트로트는 머리가 아닌 마음으로 부르는 노래라는 것을. 자기 전 이 곳 저 곳 어루만져주는 할머니의 손길 같은, 그 노래가 나를 행복하게 한다는 것을.

지금도 할머니를 만나러 갈 때면 할머니 주위를 길게 둘러싼 잡초들을 뽑아내며 가장 좋아하셨던, 마지막 날에도 불러드렸던 그 노래를 선물해 드린다. 환하게 웃음 지으며 박수 치고 계실 할머니를 생각해 본다.

어느덧 시간은 흐르고 기술이 최고(?)라는 부모님의 권유와 자발적인 관심으로 피부테라피스트라는 직업을 갖고 어엿한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었다. 늘 듣고 보고 왔던 대로 사회생활이란 것은 녹록치 않았지만 통장에 일정하게 찍혀나가며 높아지는 숫자를 보는 성취감 역시 컸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내며 손꼽아 기다려지는 것이 있었으니 바로 휴가! 특히 여름휴가철이 되면 에메랄드 빛 태평양 섬은 아니어도 가족들과 함께 늘 찾는 곳이 있었다. 지난여름 역시 찾아간 그 곳에서 어쩌면 내 인생이 바뀔 사건이 벌어진 게 아닌가 싶다. 휴가철이라 인산인해를 이룬 바닷가에 뜻밖에 노래 대회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부모님은 물론 언니들까지 재미삼아 나가보라며 어찌나 등을 떠미는지.

그런데 재미 삼아 노래 부르기엔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게 흠이라면 흠이랄까. 그렇게 가족들의 제안을 정중히 거절하고 분위기를 다운시키고 앉아있는데 잠깐 화장실 다녀온다며 갔던 언니가 빨리 오라며 재촉하기 시작했다. 다섯째 언니가 자기 이름으로 대회 참가 신청을 해놓았다는 것.

‘아….이게 무슨 일이람…’

내 기분을 무시한 언니한테 짜증이 나 잔뜩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데 드디어 올 것이 왔다.

“참가번호 00번~ 박!소!미!”

언니의 이름이 호명된 것이다. 도망가는 게 더 우스울 것 같아 그냥 눈 질끈 감고 무대에 올랐다. 내가 아닌 언니 박소미가 되어 무대에 섰지만 어쨌든 나의 무대였다. 어떻게 부른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떨었던 것 같다. 그렇게 많은 관객은 처음이었기에.

그런데 중요한 걸 잊고 있었다. 얼떨결에 부르게 된 노래였지만 상금이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 오랜만에 부모님께 용돈 드릴 수 있는 절호의 효녀 찬스였다. 동상이라도 타고 싶다는 욕심이 뭉글뭉글 가슴 속에서 차 오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참가자들 실력이 소위 말하는 장난이 아니었다. R&B를 비롯해서 발라드, 댄스까지 정말 다양한 장르의 진짜 실력자들이 무대를 뒤흔들었다.

호남 3대해수욕장의 명예를 건 영광 가마미 해수욕장 해변가요제(1천 6백여명의 인파로 보도됨)에서 트롯트를 부른 내가 조금 창피해지기 시작할 즈음 결과가 발표됐다. 한 명 한 명 호명이 되기 시작하고 마지막 대상만을 남겨놓았다. 이미 상금에 대한 미련은 버리고 어서 빨리 내려가고 싶다는 마음만 굴뚝인데 무대 아래서 보고 있던 언니와 엄마가 뛸 듯이 기뻐하고 있었다.

대상이었던 것이다. 정신줄 놓고 있었던 데다 언니 이름이 호명돼 즉각 반응이 늦어진 것이었다. 정말 너무 너무 기뻤다. 그 많은 실력자들을 제치고 우승했다는 것도 기뻤지만 두둑한 우승 상금으로 효녀 찬스를 잡았다는 사실에 뿌듯했다.

그런데 대상의 영예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가수 활동의 자격을 동시에 얻은 것이다. 이게 갑자기 무슨 일인가 싶었다. 언니가 몰래 신청한 노래대회에서 대상을 타고 가수가 되는 기회까지 얻다니. 어안이 벙벙하고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릴 정도로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하룻밤 사이 난 가수가 되었다. 가수라는 타이틀이 생겼다고 해서 변화된 것은 크지 않지만 무대에서 노래를 부를 수 있는 기회가 잦아진 것임에는 틀림없다.

열창하는 박하늘 가수

그저 매일 열심히 살아가는 꿈 많은 청춘, 그런데 조그마한 꿈이 하나 더 추가 된 것이다. 나의 곡을 만들어 대중들에게 들려주고 싶다는 작은 소망. 그 날을 기다리며 오늘 하루도 열심히 생각하고 그리며 연습에 열중한다. 그렇게 나만의 미래 노트를 만들어 가는 중이다.

사실 난 뛰어나게 노래를 잘한다거나, 젊은 트로트 가수들이 무조건 갖춰야 한다는 미인형의 외모도 아니거니와 어깨춤을 들썩이게 하는 춤꾼도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나에게 왜 트로트 가수가 되려 하느냐고 묻는다. 아쉽게도 고개 끄덕여 수긍할만한 완벽한 정답은 줄 수가 없다.

왜냐고. 나도 잘 모르니까. 난 단지 노래하는 게 즐겁고 그 중에서도 특히 트로트가 좋다는 말 밖에. 그리고 내가 하는 노래로 웃음 짓고 잠시나마 행복해하는 사람들의 얼굴을 보는 것이 그저 행복하다는 말 밖에.

[대동문화 92호. 2016년 1,2월호]

박하늘 가수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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