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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칼럼> 나주 봉산서원(蓬山書院)의 르네상스를 꿈꾸며
백은하 기자 | 승인 2018.09.28 10:52
백은하 대동문화 취재부장

이끼 낀 골기와를 얹고 있는 서원은 옛 성현의 지극한 효성과 높은 학문, 헌신적 사랑과 배려, 올곧은 정의와 윤리의 덕목을 품고, 우리의 숨결을 기다리고 있다.

나주 봉산서원(蓬山書院)은 전라남도 나주시 남평읍 서산리 서원마을에 있는 사액서원이다. 앞으로 지석강이 바라다 보이고, 뒤쪽으로 소나무와 대숲에 둘러 쌓여있어 문기(文氣)가 깃든 수려하고 아름다운 풍광이다.

숲에는 봄의 정령이 불어넣은 입김으로 푸른 생명력이 움트고 있다. 숲에는 5백 여년의 전설과 향기가 깃들어 있다.

 

‘봉산서원’ 으로 사액

나주 봉산서원 (蓬山書院)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인 휴암 백인걸 (休庵 白仁傑 · 1497~1579) 선생을 배향하는 서원이다. 백인걸 선생은 1514년(중종 36) 남평현감으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고 후학을 양성하며 유풍을 진작시켰다.

『열읍원우사적』 『서원가고(書院可攷)』에 백인걸 선생의 학덕을 흠모해 오던 이 지역의 사림과 관리, 백성들은 힘을 합쳐 1590년 사당을 건립했다는 기록이 있다.

서봉령이 1669년에 지은 『봉산서원실기』에는 1650년 창건된 것으로 되어 있어 차이가 있다. 1590년에는 사당이, 1650년에는 강당이 추가되어 서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오랜 세월이 지나 건물이 퇴락하자 1666년(현종 7) 봉산(蓬山) 및 ‘부자송’이 있는 곳으로 이건 계획을 세웠다. 이때의 이건은 중창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으로 서봉령은 이때 서원의 부지를 세 번이나 바꾸고서야 묘우(廟宇)를 완성하였다고 『봉산서원실기』에서 밝히고 있다.

당시 남평현감은 송시걸이었는데 인척인 송시열의 후원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해에 유생 최상호가 소두(疏頭)가 되어 청액상소를 올렸고, 예조판서 박세모가 회계(回啓)하고 우승지 송시철이 사액을 재청하여 <蓬山>이라 사액받았다. 실제 사액은 이듬해인 1667년(현종 8)에 이루어졌다.

영호정에 있는 '영호정기'

한편 송시열은 백인걸의 학덕을 흠모하여 그를 진유(眞儒)라 칭하였으며 청액소를 직접 지었을 뿐만 아니라 사액이 내려지기까지 많은 후원을 하였고 사액 후에도 전라감사 홍처후에게 봉산서원에 대한 지원을 부탁하기도 하였다. 사액된 이후 봉산서원의 사정은 더 이상 밝혀지지 않으나 다른 서원들과 마찬가지로 1868년(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었다.

1972년 백종운의 주도로 신실만 복설되었다가 1984년 백주원 나주군수의 주력으로 백씨문중에서 건립위원회를 조직하여 1차 공사를 시작했다. 1994년 <휴암백인걸선생유적비>를 세웠다. 봉산서원의 경내 부지는 710㎡이다.

현재의 서원은 1983년 중건한 정면 3칸 · 측면 1.5칸의 맞배지붕 집인 사당 (21.6㎡)과 ‘내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관련 유적으로 <봉산서원유허비>는 서원 경내에 있다. <선정비, 영사비>가 서원 입구 옆에 있다.

'영호정' 전경

휴암 백인걸 선생,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

휴암 백인걸 선생은 조선 중기의 학자이자 문신이다. 본관은 수원(水原). 자는 사위(士偉), 호는 휴암(休菴). 시호는 인조 때 충숙(忠肅)을 받았으나 뒤에 문경(文敬)으로 고쳐졌다. 그리고 사후인 1603년(선조 36년)에 청백리로 녹선되었다.

사헌부지평 효삼(效參)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참교(參校) 사수(思粹)이다. 1497년(연산 3년) 왕자의 사부를 지냈을 정도로 학문적 인격적으로 뛰어난 학자였던 백익견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사직(司直) 우종은의 딸이다.

조광조(趙光祖)의 문인으로 김안국에게서도 학문을 배웠다. 송인수·유희춘·이이· ·성혼 등 당대 사림계 인물들과 널리 교유하였다. 김식이 대사성이 되어 새로운 학풍이 일어나게 되자 구도의 뜻을 세워 학문에 전심하였다. 특히 조광조를 존경해 그의 집 옆에 집을 짓고 사사하였다.

'영호정' 전경

파주를 중심으로 ‘성산학(城山學)’을 낳아

23세 때(1519년)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를 잃자 비분강개하여 금강산에 은거하였다가 35세에 사마시에 합격하고 41세에 식년문과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림의 일원으로 지목되어 성균관에 머물다가 이듬해에 예문관 검열, 예조좌랑 등을 지냈다.

45세 때 모친을 봉양하기 위해 남평현감으로 4년간 봉직하면서 서당을 세워 학문을 강론하고, 세금을 적게 거두면서 옥사를 처결함에 있어 청탁을 받아들이지 않고 공평하게 처리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너진 관청과 창고를 수리하는데 백성들에게 부역을 시키지 않고 공미를 덜어서 개수하니 백성들 모두 탄복하였다.

49세(1545년) 때인 명종 즉위 후 윤원형 등 소윤파가 대비 문정왕후를 등에 업고 을사사화를 일으켜 윤임 등 대윤파를 제거할 때 사간원 헌납으로 있으면서 극력 반대하다가 파직되고 옥에 갇혔으나 정순붕, 최보한, 허자 등의 도움을 받고 풀려나 낙향했다.

봉산서원 입구에 세워져 있는 선정비

그 뒤 51세(1547년) 때는 문정왕후의 수렴 첨정과 권신 이기 등의 국정문란을 비난하는 양재역의 벽서사건을 기화로 소윤세력이 대윤의 잔존세력과 사림계 인물들을 재차 축출할 때 연루되어 안변에 5년간 유배를 당하였다가 1551년 사면된 후에 낙향했다.

『태극도설(太極圖說)』과 정주학(程朱學)의 서적들을 깊이 있게 연구했다.

69세(1565년) 때 윤원형이 몰락하자 승문원 교리로 재 등용되었고, 71세 때 양주목사로 재직할 적에는 공납의 폐단을 개혁하는 치적 등을 쌓아 고을사람들이 선정비를 세워주기도 했다.

선조가 즉위한 뒤 72세 때 선조가 직접 편지를 보내 특별히 대사헌으로 임명되는 파격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이후 이조·공조·병조참판,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휴암 백인걸 선생 유적비

저서로는 ‘휴암집’ 전해져

휴암 백인걸 선생은 조정에 분당이 일어나자 당론을 잠재우려는 노력을 기울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74세 때 다시 파주로 낙향하였다. 83세 때는 지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율곡 이이와 함께 다시 동서 분당의 폐단을 논하고 진정시킬 것을 주장하였으나 서인을 편든다는 공격을 받는 등 국정에 대해 많은 의견을 제시하였고, 동지춘추관사로 『명종실록』의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나이가 든 뒤에도 성리학에 정진하여 후일 대학자가 된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을 문하에 배출하면서 퇴계 이황과 철학적인 토론을 전개한 바 있고, 파주를 중심으로 하는 이른바 ‘성산학 (城山學)’을 낳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기묘사화 이후 명종 대까지 계속되는 훈구세력의 발호에 맞서 사림파를 유지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특히 1545년 을사사화 때 일신을 돌보지 않고 윤원형의 음모에 대항한 것은 후대에 길이 칭송되었다.

1579년(선조 12년) 83세에 별세하였는데, ‘거처하는 집이 가난 검소하고, 입고 먹는 것은 거칠고 성기며, 먼지가 내려앉아 방석에 가득하여도 신경 쓰지 않았다. 임금이 그의 기풍과 절의를 중히 여겨 시종일관 돌보아 줌이 변치 않았다’고 <선조수정실록 백인걸의 졸기>에 기록되어 있다. 저서로는 『휴암집』이 전한다.

'영호정' 편액

휴암 선생이 도래마을에 세운 학당 ‘영호정’

한편 전남 나주시 다도면 풍산리 도래마을은 풍산홍씨 집성촌이다. 마을 입구에 ‘영호정’이라는 정자가 있다. 정자에는 수백년은 됨직한 커다란 왕버드나무 한그루가 우뚝 서 있다.

휴암 백인걸 선생이 남평현감으로 재직할 때 고을에 학문을 장려하고 백성을 가르치기 위해 세운 네 곳의 학당 중 하나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도래마을에는 ‘내셔널트러스트 시민문화유산 2호’인 ‘도래마을 옛집’도 있다.

조선시대 선비 문화와 서원 (書院)은 인문 정신, 철학, 윤리 등의 덕목을 품고 있는 우리 문화의 보물이다. 남평 봉산서원과 다도 도래마을 영호정, 월봉서원, 장흥 필암서원 등을 연계해서 조선시대 선비 정신과 서원 문화의 재조명을 시도해야한다. 서원이 품고 있는 콘텐츠들을 적극 발굴하고 현실에서 교육하고 함께 나눌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면 좋겠다.

봉산서원에 역사와 자연 상상력의 온기를 불어넣어, 21세기에 필요한 교육과 문화 나눔의축제를 펼쳐가야 한다. 봉산서원의 문을 활짝 열어 젖히고 휴암 선생에 관해 논의하는 차(茶)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휴암 백인걸 선생의 사상을 재조명하는 학술 세미나 개최, 『휴암집 』번역 등을 전개해 나가면서, 교육 나눔, 숲 체험, 생태 프로그램 발굴 등을 발굴해서 봉산서원이 교육과 문화의 놀이터가 되기를 바란다.

봉산서원 전경

나주시와 학계, 문화 기획자들이 지혜를 모아 봉산서원 관리 및 활용 프로그램을 보다 전문적으로 한 번 짜보는 것이다. 그리고 봉산서원이 나주시의 문화재로 등록되어 보다 전문적이고 효율적인 보존 대책을 세워야 한다. 문화융성의 인프라는 물론 우리 사회가 걱정하고 있는 청소년 인성교육에도 도움이 되고 스토리가 있는 나주의 관광자원으로도 충분한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나주 봉산서원의 르네상스를 위해 마음을 모아야 할 시점이다.

백은하 기자  haklim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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