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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천(鹿川) 고광순(高光洵) 의병장내 죽음 역사의 한복판에 나부끼리라
백승현 기자 | 승인 2016.03.09 11:08

구례군 토지면 내동리 지리산 연곡사. 절 바깥으로는 ‘핏빛’ 역사의 시린 숨결이 겨울 피아골을 메마르게 울리며 흘러내려와 섬진강을 하냥 울먹이게 하고 있다. 국보 북부도와 동부도로 유명한 이곳 연곡사 서쪽, 일곱 그루의 동백나무들이 마치 무대장치처럼 비석 하나를 품고 있다.

‘의병장 고광순 순절비(義兵將高光洵殉節碑)’가 그 동백나무들이 만들어놓은 어둠 속에 외롭게 서 있다.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에 이 순절비가 서있는 곳에서 육십 노구의 한 의병장이 피를 흘리며 동백나무 밑동에 기대어 이승에서의 마지막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그가 마지막 쳐다보던 지리산의 시린 하늘을 동백나무숲도 같이 보았을 것이다. 의병장의 마지막 부르짖음도 틀림없이 같이 들었을 것이다.

“선비가 의로써 죽는데 무엇이 외로울 것인가. 구국은 멀지 않았다. 괜찮다.”

나 죽어도 독립은 멀지 않다

녹천 고광순(1848~1907)은 헌종 14년 전남 담양 창평 유천리(柳川里)에서 났다. 장흥 고씨(창평 고씨) 집안은 임란에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준봉(準峰) 고종후(高從厚), 학봉(鶴峰) 고인후(高因厚), 삼부자(三父子) 모두가 목숨을 바쳤다.

그래서 고씨 집안은 ‘삼부자 불천위’(三父子 不遷位; 위패를 옮기지 않음) 집안으로 유명하다. 국가에 큰 공로를 이룬 인물은 4대가 지나도 위패를 옮기지 않고 영원히 제사를 지내도록 국가에서 지정한다. ‘불천위’가 3명이 나온 조선조 초유의 집안이니 후손들의 명조(名祖)에 대한 자긍심을 알 수 있다.

고광순은 자를 서백(瑞伯), 호를 녹천(鹿川)이라 하였다. 광순은 고인후의 봉사손(奉祀孫)이었으니 피로 전해오는 절의정신이 남달랐다. 학문에 전념해 과거에도 응시했으나 비리와 부정이 난무하던 과거장을 목도하고 크게 실망해 귀향하고 말았다.

구국의 민족 성전(聖戰)이었던 한말의 의병전쟁은 두 시기에 걸쳐 크게 일어났다. 1895년 일제에 의해 민비 시해와 단발령이 시행되면서 일어났던 ‘을미의병’과 1905년 을사조약과 1907년 군대 해산을 당하면서 일어나 합방 이전까지 전개되었던 ‘정미의병’이 그것이다. 특히 8년간 항전한 정미의병의 중심은 '호남의병'이었다.

을미의병에 참여했던 고광순의 나이 58세 때인 1905년에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제는 을사조약을 강제로 체결하였다. 전국은 다시 의병진의 깃발이 펄럭이기 시작했다.

호남의 중기의병은 1906년 태인에서 최익현, 임병찬이, 1907년에는 장성에서 기우만, 남원의 양한규, 광양의 백낙구, 장흥의 백홍인 등이 도모했다. 그러나 의병장들은 힘 한번 써보지 못하고 일제의 의해 체포되거나 패퇴되었다.

오직 고광순 창평의병만이 남게 되었다. 60세의 유림의병은 이제 풍찬노숙 앞날이 험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1907년 7월 이후로 기삼연, 김용구, 김태원, 심남일, 이대극, 양회일, 임창모, 전수용, 이석용, 황순모 등 수많은 후기 유생의병장의 선구가 되었으니 역사에서 외롭지 않았다.

마지막 남은 창평의진의 활약

고광순은 광양의 백낙구 등과 함께 각지의 군사들을 모아 1906년 11월 6일 순천읍을 공략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 날 모인 군세가 미약했기 때문에 오히려 백낙구 등 주모자들이 체포되고 말았다. 이로써 의진의 순천 공략전은 실패했다.

고광순은 그러나 꺾이지 않고 1907년 1월 24일 고제량 등의 지사들과 함께 담양군 창평면 저산(猪山)의 전주 이씨 제각에서 의진을 결성하였다. 때마침 남원 양한규 의병으로부터 연합작전 제의를 받아 남원으로 이동했으나 이미 본진이 와해된 뒤였다.

그후 고광순은 능주의 양회일, 장성의 기삼연 등과 힘을 합해 창평, 능주, 동복 등지를 활동무대로 삼았다. 창평의진의 활약이 컸기 때문에 일제조차도 고광순을 ‘호남의병의 선구자’ 혹은 ‘고충신’(高忠臣)이라 불렀을 정도였다. 왜병은 그대로 있지 않았다. 1907년 8월 군대 해산을 전후하여 의병의 근거를 박멸하기 위해 의병장과 의병 관련자의 집은 불태우고 가족을 참살했다. 참혹한 보복이 의병장의 고향 유천리를 피로 물들였다.

녹천은 집이 불바다가 됐다는 소식을 듣고 전투대열을 새로 정비하고 결사항전을 구상했다. 마지막 국권을 상징하던 독립기이던 태극기에 ‘불원복(不遠復)’이라고 적어 이른바 ‘불원복기’를 진용의 선두에 세워두고 의병들의 용기를 복돋웠다. 불원복은 주역 복괘에서 ‘소멸했던 양기가 머지 않아 회복된다’는 뜻으로 ‘멀지 않아 나라를 되찾을 수 있다’는 신념을 표상한 것이다.

그는 또 1907년 9월부터 게릴라식 전술방식을 탈피하여 새로운 근거지를 구상하고 장기지속적인 항전태세를 갖춘다는 ‘축예지계’(蓄銳之計)를 선택했다. 그 축예지계의 적지(適地)는 지리산이었다. 고광순 의병이 지리산에 들어갈 즈음 일제 군경은 의병을 쫓아 혈안이 되어 있었다. 10월 9일 일제의 연곡사 토벌작전이 시작됐다.

광주에서 주둔하던 1개 중대, 경남 진해 중포대대(重砲大隊)에서 파견된 소대 병력, 진주 경찰서 소속 순경 등은 의병 측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갖추고 있었다. 반면 이때까지 연곡사에 남은 의병은 고광순 의병장과 언제나 의진에 함께했던 고제량 부장과 10여 명의 의병뿐이었다.

왜병은 연곡사를 향해 집중 사격을 가했다. 적의 집중포화는 절의 창문과 벽을 벌집처럼 뚫어버렸고 지붕의 기왓장이 모조리 박살났다. 의병도 항전했으나 중과부적이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왔다. 고광순은 의병들을 하나하나 살피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 번 죽어 나라에 보답하는 것은 내가 평소 마음을 정한 바이오.

여러분은 나를 위해 염려하지 말고 각자 살길을 찾길 바라오.”

글만 아는 선비를 무엇에 쓸 것인가

부장 고제량은 눈물을 흘리며 대답했다.

“당초 義로써 함께 일으섰으니, 마침내 의로써 함께 죽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죽음에 임해 어찌 혼자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모두 울음을 삼켰다. 고광순은 좌익장 광훈과 광문에게 의병의 명부와 불원복기를 가지고 빠져나가 후환을 막고 항쟁을 지속하라는 당부를 내리고는 총 한 자루를 들고 단신으로 절 바깥으로 뛰쳐나갔다.

왜병은 연곡사를 남김없이 불태워버렸다. 고광순, 고제량의 시신마저 불타기 직전, 절 인근에 사는 임준홍 이라는 농부가 두 사람의 시신을 승려들이 채소를 가꾸던 채마밭으로 옮겨 솔가지로 덮어놓았다. 광훈과 광문은 절 뒷산으로 빠져나가 간신히 탈출했고 나머지 몇 의병들도 흩어졌다.

고광훈은 상포를 준비해 나흘이 지난 다음 연곡사 터를 찾았다. 오열을 삼키며 시신을 거두어 절 부근 땅에 임시 봉분을 만들었다. 다음날은 우국시인이던 매천 황현이 연곡사를 찾아와 성분(成墳)하고 곡한 다음 무덤 곁에서 추모시 한편을 남겼다.

연곡의 수많은 봉우리마다 숲은 울창하기 그지없네

나라 위해 한평생 숨어 싸우다 목숨을 바쳤구나

전마(戰馬)는 흩어져 논두렁에 누워 있고

까마귀떼만 나무 그늘에 날아와 앉는구나

나같이 글만 아는 선비들 무엇에 쓸 것인가

이름난 가문의 명성 따를 길 없네

홀로 서풍을 향해 뜨거운 눈물 흘리니

새 무덤이 국화 옆에 우뚝 솟았음이라

1962년 정부에서는 고광순의 이러한 공적을 기리어 그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1958년에는 구례군민이 힘을 모아 연곡사에 순절비를 세워 오늘에 전하고 있다. 또한 불탄 그의 생가터에는 1969년에 포의사(褒義祠)가 세워졌다.

고광순 기념관 창평에 들어선다

한편 창평의진은 의병장의 죽음 이후에도 고광수, 고광문 등이 창평의진의 잔여세력을 이끌고 정읍, 담양, 무등산 등에서 항쟁을 지속했다. 다른 지역의 의병진은 의병장이 순절하거나 체포되면 진이 해산되는 과정을 거치지만 창평의진은 일경의 ‘남한대토벌’ 이후까지도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된다.

의병장 외에 고광수, 광채, 광훈, 제량은 건국훈포장을 추서받았으며, 2002년 실명(失名)으로 활동하던 광문의 의병운동 기록이 국립문서보관소의 ‘폭도에 관한 편책’에서 발견되어 창평의진의 항일 의지가 지속되었음이 증명되었다.

현재 담양군 창평의 월봉산 기슭에는 고인후와 더불어 녹천의 묘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담양군은 유천리 일대 5,000여 평의 부지에 지난 10월부터 ‘녹천 고광순 의병 기념관’을 건립 공사를 시작했다. 오는 2006년까지 총사업비 30억 원을 들여 포의사를 옮겨 복원하고 창평의진의 유물전시관, 산문, 관리사무소, 동상 등이 들어서게 된다.

녹천의 종손인 영준씨는 “창평의진은 1907년 이후 호남 유생의병의 선구로 역사적 의의가 있으며, 의병장 사후에도 의병정신이 계승된 유일한 의진이었음이 확인됐다”라고 말하고 “기념관 건립으로 임진왜란, 한말 의병을 거쳐 창흥의숙으로 이어지는 호남 의병정신의 성지가 후세들을 위한 역사 교육장으로 거듭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월봉산 국수봉(國守峯)은 창평 들녘을 말없이 굽어보고 있다. 국수봉에서 소리 없는 외침이 들린다. “죽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의롭다는 것은 무엇이며, 의를 위해 죽는다는 것은 도대체 무엇인가?” 그 울림은 차갑게 얼어붙은 창평 들녘 위로 한없이 퍼져 나간다.

대동문화 [2005년 신년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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