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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 노란 기생초로 피어난 조선 명기들의 ‘문학적 삶과 사랑’광주 극락강변, 신창동 유적지에서 노랗게 치장한 ‘매창’과 ‘홍랑’을 만나다
임영열 기자 | 승인 2019.07.22 11:05
여름이 절정을 향해 치닫고 있는 요즘, 드넓은 신창동 유적지가 온통 샛노랗게 변했다

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신창동 유적’은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발견된 2000여 년 전, 초기 철기 시대의 복합 농경 유적지다. 광주의 북서쪽을 가로지르는 극락강변의 나지막한 구릉에 자리하고 있다. 각종 목기와 토기 농기구, 현악기 등이 발견되어 고대 한국문화의 원류를 잘 보여주고 있다. 국가 사적 제375호로 지정되었다.

먼 옛날, 광주 극락강변에서 현악기를 타던 여인은 누구였을까. 역사적 사실의 부재가 때로는 많은 호기심을 불러오기도 한다. 여기에 문학적 상상력이 더해진다면, 또 하나의 아름다운 문화 콘텐츠가 탄생할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건 작가들의 몫이고 유적지에서 출토된 현악기와 유물들은 국립광주박물관에 특별 전시되어 있다.

광주광역시 신창동 유적지에 노란 기생초가 활짝 피었다. 신창동 유적지는 국가사적 제375호다

여름이 절정을 향해 가고 있는 요즘, 드넓은 신창동 유적지가 온통 샛노랗게 변했다. 불과 며칠 전 까지만 해도 푸르디푸르렀던 풀숲이 순식간에 편집된 화면처럼 황금색으로 확 바뀌었다. 마치 노란색 유화 물감을 흩뿌려 놓은 듯 몽환적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언뜻 보면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밀밭’이 연상되기도 한다.

때마침 불어온 바람에 온 들판은 황금물결을 일렁이며 장관을 연출한다. 7월의 뜨거운 태양 아래서 집단 군무(群舞)를 추고 있는 노란색의 주인공은 이름도 생소한 ‘기생초(妓生草)’다.

언뜻 보면 빈센트 반 고흐의 그림, ‘밀밭’이 연상된다
꽃의 생김새가 마치 조선시대 기생들이 바깥나들이할 때 머리에 쓰던 전모(氈帽)를 닮았다 하여 ‘기생초’라는 이름을 얻었다

노란 코스모스와 흡사한 기생초, 북아메리카에서 왔지만 우리 땅에서 정착한 귀화식물이다. 한두 해살이 풀로 초롱꽃목 국화과에 속한다. 춘차국, 황금빈대꽃, 각시꽃이라 부르기도 한다.

본디 관상용이었지만, 바깥으로 퍼져 나와 야생화가 되었다. 번식력이 강해 길거리나 공원에서 무리를 지어 자라며 7월~9월까지 노란 꽃을 피운다. 꽃말은 ‘다정다감한 그대의 마음’, ‘추억’, ‘간절한 기쁨’이란다.

신창동 유적지에 핀 노란 기생초와 하얀 개망초가 조화롭다. 개망초 또한 북아메리카에서 온 귀화 식물이다

꽃의 생김새가 마치 조선시대 기생들이 바깥나들이할 때 머리에 쓰던 전모(氈帽)를 닮았다 하여 ‘기생초’라는 이름을 얻었다. 짙은 밤색으로 치장한 꽃술을 둘러싸고 있는 노란 꽃잎의 모습은 잘 단장한 기생의 자태처럼 화려하고 아름답다.

한줄기 바람에 흩날리는 기생초 꽃잎에 ‘사랑과 이별의 한’을 간직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이자 기생인 ‘매창’과 ‘홍랑’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신분의 벽이 높았던 조선시대, 비록 미천한 신분의 기생이었지만 일편단심 한 남자만을 연모하며 음악과 시문을 벗 삼아 ‘문학적 삶’을 살다 간 여인들이 있었다.

바람에 흩날리는 기생초 꽃잎에 ‘사랑과 이별의 한’을 간직한 채 짧은 생을 마감한 조선시대 대표적인 여류 시인이자 기생인 ‘매창’과 ‘홍랑’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화우 흩날릴 제... ‘매창’과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의 아픈 사랑

전북 부안현에서 아전(衙前)이었던 이탕종의 서녀로 태어난 이매창(李梅窓 1573~1610)은 어려서부터 한시(漢詩)와 거문고에 능했다. 이향금이라는 본명을 버리고 부안 현청의 관기가 되어 ‘매화가 핀 창’ 매창(梅窓)이라는 이름으로 살았다.

뛰어난 시문과 음악에 능한 매창을 만나려고 전국에서 시인 묵객들이 줄을 서서 찾아왔다. 그중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소설 <홍길동전>을 쓴 허균도 있었다. 하지만 그들은 그저 시(詩)를 매개로 한 ‘문학동인’이었을 뿐이다.

그런 매창에게 어느 날 사랑이 찾아온다. 열아홉의 꽃다운 매창에게 스물여덟 살이나 많은 47살의 천민 출신 시인 유희경(1545~1636)이었다. 유희경은 서울 사람으로 천민 출신이지만 시를 잘 짓는다고 부안까지 소문이 자자했다.

전북 부안 매창공원에 세워진 시비. 매창의 시 <이화우>외 여러 시비가 있다 ⓒ 부안군청

둘은 처음 본 순간부터 연정에 빠져 시를 주고받으며 풍류를 한껏 즐긴다. 천민 출신 시인과 기생 시인의 만남, ‘동병상련’이라는 정서적 연대감은 ‘문우(文友)의 정’을 훌쩍 뛰어넘어 ‘몸과 마음의 정’으로 이어지기에 충분했으리라.

그러나 그들의 사랑은 오래가지 못했다. 동서고금을 보더라도 전쟁은 많은 연인들에게 쓰라린 이별의 상처를 남겼다. 1592년에 발생한 임진왜란은 매창과 유희경을 갈라놓았다. 유희경은 의병이 되어 매창을 떠난다.

배꽃이 꽃비가 되어 흩날리던 어느 봄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낸 매창이 유희경을 그리워하며 남긴 한글 시조 한 편이 조선 후기 박효관과 안민영이 편찬한 가집(歌集), <가곡원류>에 실려 있다. 학창 시절에 밑줄을 그어가며 암송했던 기억이 새롭다.

이화우(梨花雨) 흩날릴 제 울며 잡고 이별한 님/ 추풍낙엽(秋風落葉)에 저도 날 생각는가/ 천리에 외로운 꿈만 오락가락 하노라

유희경도 헤어진 매창을 그리워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매창에 대한 그리움을 ‘오동우(梧桐雨)’란 시로 남긴다 ⓒ 부안군청

유희경도 헤어진 매창을 그리워 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서로 만나지 못한 채, 매창에 대한 그리움을 ‘오동우(梧桐雨)’란 시로 남긴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제 애가 끊겨라

유희경과의 슬픈 사랑을 남긴 채, 매창은 37세를 일기로 전북 부안읍 봉덕리에 동고동락하던 거문고와 함께 잠들어있다. 사람들은 이곳을 ‘매창이 뜸’이라고 부른다.

전북 부안의 매창공원에 있는 이매창의 묘.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다 ⓒ 부안군청

매창의 묘는 전라북도 기념물 제65호로 지정되었고 유희경과 매창의 연심(戀心)은 시비가 되어 부안읍 ‘매창공원’에 서있다. 고을 사람들에 의해 구전되던 시, 58편을 모은 시집 <매창집>이 전한다.

묏버들 갈해 것거... ‘홍랑’과 고죽(孤竹) ‘최경창’의 지독한 사랑

유교적 사회 질서와 신분제도가 유독 엄격했던 조선 중기 시절, 또 한 편의 기생과 사대부의 러브 스토리가 있다. 조선 선조 때 함경도 기생 홍랑(洪娘 ? ~ ?)과 함경도 경성에 북해평사로 부임한 고죽 최경창(孤竹 崔慶昌 1539~1583)과의 ‘지독한 사랑’ 이야기다.

홍랑은 어릴 때부터 미모와 문재(文才)가 뛰어났고, 시·서·화를 겸비한 함경도 경성의 시인이자 기생이었다. 그저 여느 기방의 누구나 꺾을 수 있는 ‘노류장화’가 아니었다. ‘고독한 대나무’ 고죽 최경창은 전라도 영암에서 태어난 시인으로, 당대 최고의 문인이었던 송강 정철과 교유하며 ‘조선 8 문장’ 중의 한 사람으로 통했다.

최경창의 출생지 전남 영암군 구림면에는 고죽관이 있다 ⓒ 영암군청

과거에 합격한 최경창은 1573년에 함경북도 경성 지방의 북도평사(北道評事)로 부임한다. 부임 축하 연회에서 당시 최고의 문장가 최경창과 홍랑의 첯 대면이 이루어진다. 이때 홍랑은 16세, 최경창은 34세였다.

이 자리에서 홍랑은 앞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시 한 편을 낭송하며 “소인은 고죽의 시를 좋아하옵니다”라고 한다. 이 말을 들은 최경창이 어찌 홍랑을 좋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렇게 시작된 둘의 사랑은 점차 농밀해져 갔고 최경창과 함께 근무지를 동행하며 부부처럼 한 몸으로 지냈다.

이들의 사랑 또한 오래가지 못한다. 이듬해 봄, 임기를 다한 최경창이 서울로 발령을 받게 된다. 홍랑은 서울로 돌아가는 최경창과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어 멀리 떨어진 쌍성 까지 몇 날 며칠을 따라가며 배웅했다.

고죽관에 있는 시비에는 홍랑의 시 <묏버들>과 이를 한시로 번역한 최경창의 번방곡(飜方曲)이 새겨져 있다 ⓒ 영암군청

두 사람의 발걸음이 함관령 고개에 이르렀다. 당시 관기들은 해당 지역의 관청을 벗어날 수 없었기에 홍랑은 더 이상 따라갈 수 없었다. 사모의 정을 뒤로하고 돌아서야 했던 홍랑의 흉리는 어떠했을까. 그때의 심정을 읊은 시 한 수가 남아 있다. 이 시 또한 교과서에 실려 있어 낯설지 않을 것이다.

묏버들 가려 꺾어 보내노라 임의 손에/ 주무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잎이 나거든 날인가 여기소서

한양으로 돌아간 최경창은 이듬해 큰 병이 들어 자리에 누웠다. 이 소식을 들은 홍랑은 국법을 어겨 가며 7일 밤낮을 걸어 한양으로 와 고죽의 병 수발을 들었다. 국법을 어긴 홍랑의 병시중이 문제가 되어 최경창은 관직이 삭탈되고 홍랑은 다시 함경도 경성으로 돌아가야 했다. 최경창은 돌아서는 홍랑에게 송별시 한 편을 지어 보낸다.

물끄러미 바라보다 고운 난초 건네노니/ 이제 하늘 끝으로 가면 언제 돌아오려나/ 함관령에 올라 옛 노래 부르지 마오/ 지금도 청산은 구름과 비에 어둑하니

파직을 당한 최경창은 변방을 떠돌다 45세의 나이로 숨을 거둔다. 이게 끝이 아니다. 홍랑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얼굴에 상처를 내고 삼 년간 경기도 파주에서 움막을 치고 시묘 살이를 하며 최경창을 지켰다. 죽음도 그들을 갈라놓지 못했다. 참 지독한 사랑이다.

경기도 파주에 있는 최경창과(위) 홍랑의 묘(아래). 홍랑은 절개를 지키기 위해 일부러 얼굴에 상처를 내고 삼 년간 움막을 치고 시묘 살이를 하며 최경창을 지켰다 ⓒ 박철

9년 후,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홍랑은 전쟁 중에도 최경창의 시와 문집과 서화들을 피난시키며 온전히 지켰다. 전쟁이 끝나자 홍랑은 해주 최씨 문중에 최경창의 유품을 전하고 생을 마감한다. 문중에서는 최경창의 무덤 아래 홍랑의 묘소와 함께 시비를 세워 주었다. 최경창이 태어난 전남 영암에도 고죽과 홍랑의 시비가 있다.

조선 중기 유교적 사회질서가 엄혹했던 시절, 신분을 초월한 사랑과 ‘문학적 삶’을 살았던 매창과 홍랑, ‘기생’ 보다는 ‘시인’으로 기억되길 바란다. 두 ‘여류 시인’이 우리 문학사에 남긴 족적이 작지 않기 때문에.

임영열 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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