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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등산 자락 정자에선 '그림자도 쉬어간다'한국 가사문학의 산실, ‘식영정’과 푸르름으로 둘러 싸인 집, ‘환벽당’
임영열 기자 | 승인 2019.08.06 08:17
광주호가 훤히 내려다 보이고 발아래 창계천이 굽어 보이는 성산(星山) 끝자락 언덕에 ‘그림자도 쉬어 간다’는 식영정(息影亭)이 서있다.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이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을 위해 지은 정자다

광주·화순·담양에 걸쳐있는 호남의 명산, 무등산의 북서쪽 골짜기를 흐르는 원효계곡의 끝자락에 광주호가 있다. 빼어난 경관을 자랑하는 광주호 상류에 자리한 담양 지곡 마을에는 <한국가사문학관>이 있다.

광주광역시 충효동과 전남 담양군의 경계를 이루는 성산(星山) 아래에 자리하고 있는 가사문학관은 이곳이 16세기 조선 시가문학을 꽃피웠던 탯자리였음을 대변하고 있다.

식영정에서 바라본 광주호의 모습. 노송들 사이로 성산호(광주호)가 시원하게 펼쳐 있다

가사문학관 일대를 중심으로 송순, 임억령, 양산보, 김윤제, 정철, 김성원 등 기라성 같은 문사들은 그들이 세운 정자에서 '계산 풍류'를 즐기며 가사문학의 걸작을 남겼다. 조선 중기 어지러운 시기에 ‘사화(士禍)와 당쟁’의 피바람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온 호남 선비들은 평소 꿈꿨던 이상과 현실 정치 사이에서 절망하며, 그들의 애환을 차원 높은 문학으로 승화시켰다.

경관이 수려한 광주호 인근에는 조선 중기 사화를 피해 낙향한 풍류처사(風流處士)들이 ‘동병상련의 심정’으로 서로 어우러져 시문을 짓고 학문을 논했던 정자가 여러 곳 있다.

송림 우거진 무등산 자락의 유서 깊은 정자에서 솔바람에 시 한 수 띄워 놓고, 옛 선비들의 풍류와 애환을 느끼며 일상의 쉼표 하나 남겨보는 건 어떨까.

그림자도 쉬어 간다는 식영정 현판

세속적 욕망의 그림자마저 쉬어가는 집, 식영정(息影亭)

가사문학관이 자리한 담양군 지곡마을, 광주호가 훤히 내려다 보이고 발아래 창계천이 굽어 보이는 성산(星山) 끝자락 야트막한 언덕에 날렵한 정자 한 채가 서있다. ‘그림자도 쉬어 간다’는 식영정(息影亭)이다.

서하당 김성원이 장인을 위해 식영정을 지을 때 자신의 호를 딴 서하당과 부용당을 함께 지었다. 서하당은 ‘노을이 머무는 집’이란 뜻이다. 좌측이 부용당, 우측이 서하당이다
식영정에서 내려다본 부용당의 모습. 식영정 일원은 서하당 부용당과 함께 정자 원림을 이루고 있다

식영정은 서하당 김성원(棲霞堂 金成遠 1525~1597)이 자신의 스승이자 장인인 석천 임억령(石川 林億齡 1496~1568)을 위해 1560년(명종 15)에 지었다. 이때 김성원은 식영정 아래에 자신의 호를 딴 서하당(棲霞堂)과 부용당(芙蓉堂)을 함께 지었다.

식영정 일원은 동쪽의 낮은 계곡에 있는 서하당, 부용당과 함께 정자 원림을 이루고 있다. 노을이 깃드는 집, 서하당 옆에는 <송강집> 목판을 보관하기 위한 장서각과 고직사가 있다. 뒤편에는 석천 임억령과 서창 조흡, 정철의 후손 정민하와 정근의 위패를 모신 사당, 성산사(星山祠)가 있다.

서하당 뒤편에 있는 성산사(星山祠). 석천 임억령과 서창 조흡, 정철의 후손 정민하와 정근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석천 임억령은 30세에 과거에 급제해 관직에 나갔다. 홍문관 교리와 왕세자를 가르치는 세자시강원(世子侍講院) 설서를 지냈다. 1545년에 금산군수로 재직 중 을사사화가 터진다. 이때 호조판서였던 동생 임백령이 소윤(小尹) 윤원형 일파에 가담하여 대윤(大尹) 윤임 일파의 선비들을 무참히 숙청한다.

이때, 임억령은 동생 임백령에게 제발 피바람을 일으키지 말라고 간곡히 당부했지만 권력에 눈이 먼 동생이 말을 듣지 않는다. 그러자, 임억령은 “잘 있거라 한강수야 평온하게 흘러 파도 일으키지 마라”라는 시조 한 수를 남기고 벼슬을 버린 채 향리로 돌아와 은거하며 후학을 양성한다.

역사 드라마로 보는 임백령. 동생 임백령이 을사사화를 주도하며 피바람을 일으키자 임억령은 이를 자책하며 낙향한다, 훗날 숭선군으로 봉해진 임백령은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병사한다. 두 형제는 정치적으로 각자 다른 길을 걸었다 ⓒsbs

이때 김성원이 제자로 들어온다. 고수는 고수를 알아보는 법이다. 김성원의 문학적 감수성을 높이 평가한 임억령은 김성원에게 ‘서하’(棲霞)라는 호를 내리고 아끼던 딸과 혼인시켜 사위로 삼는다.

몇 년 후, 석천은 재 등용되어 동부승지와 강원도 관찰사를 거쳐 1557년 담양부사를 끝으로 완전히 정계를 물러난다. 은퇴한 장인을 위해 김성원은 정자를 짓고, 장인은 그 정자의 이름을 ‘식영정’이라 짓는다. 식영정(息影亭)이라는 이름은 <장자>의 ‘잡편’에 등장하는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 이야기에서 유래되었다고 기문에 남겨 놓았다.

“옛날에 그림자를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그림자를 벗어나려고 햇빛 아래서 끝없이 달렸다.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그림자도 빠르게 그를 쫓아왔다. 그러다 나무 그늘에 들어서자 비로소 그림자가 사라 졌다... 임천(林泉)에서 조물주와 노닐면 자연히 그림자도 없어질 것이다. 그러한즉 이정자를 ‘식영’이라 하면 어떠하겠는가...”

식영정 주변의 아름다운 풍경을 노래한 임억령의 <식영정이십영> 현판. 제자인 김성원, 고경명, 정철과 면앙정의 주인 송순이 각각 차운 하여 100여 편의 거대한 연작시가 탄생했다.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은 송강 정철이 지은 가사문학의 백미, ‘성산별곡’의 모티브가 되었다

관직을 떠난 임억령은 이곳 식영정에서 유유자적하며 시문과 자연을 벗 삼아 후학을 양성하며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죽고 죽이는 살얼음판 같은 정치판에서 벗어나 비로소 이곳 무등산 자락에서 머무르며 헛된 욕망의 그림자를 떨쳐버리고 진정한 ‘식영 세계’(息影世界)를 얻었을 것이다.

'호남 시학의 스승'이라 불리는 석천은 이곳 식영정에서 <식영정 이십영>을 지었다. 성산(星山) 근처의 아름다운 풍경을 묘사한 연작시다. 제자인 김성원, 고경명, 정철과 면앙정의 주인 송순이 각각 차운 하여 100여 편의 거대한 연작시가 탄생했다. 그 시절에 노벨상이 없었던 게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 임억령, 정철, 김성원, 고경명을 일컬어 ‘식영정 4선(四仙)’이라 칭하며, 식영정을 사선각(四仙閣)이라고도 부른다.

훗날 식영정이십영(息影亭二十詠)은 송강 정철이 지은 가사문학의 백미, ‘성산별곡’의 모티브가 되었으며 송강은 이곳을 무대로 많은 시가를 지었다. 이런 연유로 식영정 일원은 송강 정철의 ‘가사문학 터’가 되었다. 1972년에 전라남도 기념물 제1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 9월 대한민국 명승 제107호로 승격되었다.

식영정은 송강 정철의 대표작 성산별곡이 탄생한 가사문학의 산실이다. 그런 연유로 송강 정철 가사문학의 터가 되었다
식영정 뒤편에 자리하고 있는 송강 정철의 ‘성산별곡’ 시비. 성산(별뫼) 주변의  아름다운 사계절을 노래하고 있다

송강 ‘정철’과 사촌 ‘김윤제’가 운명적으로 만난 곳, 환벽당(環碧堂)

유유상종(類類相從)이라 했던가. 아수라장 같은 정치판을 벗어나 성산의 식영정 바로 옆에 있는 고향 마을로 돌아와 정자를 짓고 은거한 또 한 사람의 선비가 있었다.

광주 충효리에서 태어난 사촌 김윤제(沙村 金允悌 1501∼1572)는 1532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섰다. 나주 목사와 13개 고을의 지방관을 역임하던 중 을사사화(乙巳士禍)가 터지자 관직을 버리고 낙향하여 식영정과 서하당이 마주 보이는 창계천 변 언덕에 ‘환벽당(環碧堂)’을 짓고 유유자적하며 후학을 양성한다.

식영정과 서하당이 마주 보이는 창계천 변 언덕에 있는 환벽당(環碧堂). 광주와 담양을 가르는 충효교를 사이에 두고 두 정자는 약 300m 정도 떨어져 있다. 면양정 송순은 두 정자를 ‘형제의 정자’라 했다

서하당 김성원과 같은 마을에서 태어나 친척 관계인 김윤제는 환벽당과 식영정을 가르는 창계천에 무지개다리를 놓고 서로 오가며 많은 문사들과 교유했다. 지금은 그 자리에 무지개다리 대신 콘크리트 다리가 광주와 담양을 이어주고 있다.

충효교 다리를 건너 좌측으로 창계천을 따라가다 보면 늙은 소나무와 물에 반쯤 잠겨있는 평평한 바위를 만난다. ‘식영정이십영’에 나와 있는 ‘조대 쌍송(釣臺雙松)’이다. 이곳에서 정철과 김윤제의 운명적 만남이 이루어진다.

환벽당 옆을 흐르는 창계천의 조대와 용소. 어느 무더운 여름날 김윤제와 어린 정철이 운명적으로 만났다는 곳이다. <식영정 이십영>에 나와 있는 곳이다

16살의 정철은 유배에서 풀려난 아버지를 따라 외가인 담양 창평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정철은 순천에 있는 형을 만나러 가다가 이곳 조대 용소에서 멱을 감고 있었다. 이때, 환벽당에서 낮잠을 자고 있던 김윤제는 꿈에서 조대 앞 용소에 용 한 마리가 꿈틀거리고 있는 것을 보았다. 꿈에서 깨어난 김윤제가 용소에 가보니 비범하게 생긴 소년이 물속에 있었다.

김윤제는 정철을 데리고 환벽당으로 올라가 여러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그의 영특함을 알아차리고 제자로 삼았다. 이후, 정철은 이곳에서 김인후, 기대승, 임억령, 송순 등 기라성 같은 스승들을 만나 학문과 시를 익혔다. 16살에 들어와 27살에 과거에 급제해 벼슬길에 나갈 때까지 11년 동안 환벽당에 머무르며 공부했다. 김윤제는 정철을 외손녀 사위로 삼았다.

환벽당 현판, ‘푸르름에 둘러싸인 집’이란 뜻으로 당호는 신잠이 지었고 글씨는 우암 송시열이 썼다
담장 너머에서 훔쳐본 환벽당의 모습. 푸르름에 둘러 싸여 있다

환벽당(環碧堂)은 ‘푸르름으로 둘러 쌓인 집’이라는 뜻으로 당호는 신잠(申潛)이 지었고 현판은 우암 송시열이 썼다. 임억령(林億齡)과 조자이(趙子以)의 시가 현판으로 걸려 있다. 정자 아래는 창계천이 흐르고 뒤편으로는 늙은 소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마루에서 바라보는 성산과 무등산이 유독 푸르다. 명승 제107호로 지정될 만큼 손색없는 경관이다.

정자에서 바라본 환벽당 원림의 모습
환벽당 원림 연못에 홍련이 아름답게 피었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그날 김윤제가 환벽당에서 낮잠만 자지 않았더라면, 낭만적 감수성의 대문호 정철과 정치적 잔혹함을 지닌 두 얼굴의 정철이 탄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찌 됐건, 송강 정철은 ‘성산별곡(星山別曲)’에서 환벽당 앞 용소와 조대의 아름다움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다.

“한쌍의 늙은 소나무 낚시터에 세워두고/ 그 아래 배를 띄워 가는 대로 던져두니/ 강가의 붉은 여귀꽃과 하얀 마름꽃을 어느 사이에 지났는지/ 환벽당 용의 소가 배 앞에 닿았구나...”

임영열 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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