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현 대동문화 사무처장

말기 암에 걸렸다는 한 미술작가를 만나고 돌아오는 길에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의 <월든>의 한 구절이 생각났다. ‘우리가 소박하게 생활한다면 이 세상에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은 힘든 일이 아니라 오히려 즐거운 일이다.’ 작가는 생계를 유지하기도 힘들게 겨우겨우 삶을 이어오다가, 이제 생명의 불빛마저 희미해지고 있다. 작가에게 남은 것은 몇 백 점의 작품과 작가로 살아온 행복 몇 점, 살아남을 가족들일 것이다. 작가는 생계가 즐거웠을까?

쉽게 글을 쓴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글이 쉬운데 유익하기까지 한 경지를 이루기는 더더욱 힘들다. 단순한 아름다움을 가진 글인데 독자의 마음과 삶을 한 차원 높게 고양시키는 면목을 만나기는 평생에 몇 번뿐이다.

단순한 아름다움이야말로 최고의 경지다. 추상화인데도 이해하기 쉬운 작품이 명작이고, 부르기 쉬운데도 수십 년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가요가 명작이다. 명화는 하나도 어렵지 않다. 보면 볼수록 화가의 마음이 정겹고 새롭게 전해진다. 그런 작품들은 자꾸 우리에게 말을 걸고 우리는 그 작품들에게 무슨 이야기든지 들려주고 싶은 마음이 된다.

한국 건축의 아름다움을 검소하지만 누추해 보이지 않았고(검이불루 儉而不陋), 화려하지만 사치스럽지 않은(화이불치 華而不侈) 경지로 이야기한다. 검소하고 화려하지 않은 소박함이 한국 건축의 철학이라는 것이다.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된 한국의 전통사찰과 서원들의 경이로운 공간은 바로 건물 앞의 텅 빈 마당이다. 건물의 수십 배는 될 정도의 크기로 텅 비어 있는 단순 공간을 배경으로 한옥은 늘씬한 처마의 도약미로 날아갈 듯하다. 한국 불교와 유교의 철학이 반영된 이 텅 빈 마당의 입체감과 파란 하늘의 드넓은 공간미가 사찰이나 서원 건축을 몇 배 더 도드라지게 만든다. 명작은 그래서 군더더기를 없앤 단순한 아름다움이고 자연을 끌어들인 검소한 아름다움이다.

명작을 낳는 명인들의 삶도 검소하고 단순하다. 많은 무형문화재, 명장, 명인들의 삶은 너무 단순하여 군더더기를 더할 수 없다. 일찍 일어나 전통의 방식으로 부채를 만들고, 전통우산을 만들고, 나무 속살 냄새를 맡으며 가구를 짜고, 판소리로 한 생을 이어가고, 의례음식을 만들어 사람들을 먹이고, 짧아진 붓으로 그림을 그리고, 대나무에 글씨를 판다.

아침과 점심과 저녁을 먹고 잠자고 다시 일어나는 일상의 삶이 똑같이 반복된다. 그 일상의 삶 전부가 작품을 낳는 시간의 전부다. 돌부처처럼 항아리처럼 작업대 앞에 앉아 수만 번의 손의 놀림을 반복해 작품 하나가 탄생된다. 그리고 이내 또 다른 작품으로 손을 옮아간다. 질리거나 힘들다는 기색은 조금도 없다. 집중과 열정으로 이어가는 단순한 일상의 무한반복이다. 그래도 장인들은 그 단순한 창작의 기쁨을 창작의 에너지로 소진한다.

MIT대학의 존 마에다 교수는 저서 <단순함의 법칙>에서 ‘디자인 시대의 성공을 만드는 키워드는 단순함’이라고 말했다. 조금 모자란 듯이 비워둔 여백, 군더더기를 없앤 간소함의 디자인이 성공하는 제품을 만든다는 것이다. 복잡한 상품의 기능을 가장 잘 소비자에게 전달하는 방법은 단순화라고 강조한다.

단순함은 꼭 문화 기획자나 예술가들에게 적용되는 지침은 아닐 것이다. 마오쩌뚱은 대장정을 통해 승리에 대한 확실한 전략과 전술을 수립하게 된다. 마오가 수립한 전략은 단 한 줄이었는데 ‘농촌의 인심을 얻어 도시를 포위해 승리한다.’였다. 국민당과의 본격적인 내전이 시작되었을 때 마오는 16자의 전술을 글자로 다듬어 혁명군들에게 외우게 했다. ‘적이 전진하면 우리는 후퇴한다/적이 주둔하면 우리는 교란한다/적이 피로하면 우리는 공격한다/적이 달아나면 우리는 추격한다.’

1948년 10월 홍군은 봉천과 서주를 손에 넣었고, 위기를 느낀 장제스는 대만으로 철수했다. 마오쩌둥과 홍군은 9,600km의 대장정을 마치고 중국통일의 위업을 완수하게 된다. 단순한 전술이 만든 위대한 승리였다.

사진예술을 ‘빼기의 예술’이라고 말하는데, 시각예술도 공연예술도 다른 어떤 문화 예술도 마찬가지다. 군더더기와 화려함을 빼내는 수련과 훈련, 쉽지만 작가정신이 담긴 작품을 만들려는 일평생의 도전, 검소하고 화려하지 않은 소박함이 깃든 아름다움을 만들어나가려는 오롯한 삶이 필요하다.

곁눈질하지 않고, 재산을 구하지도 않고, 예술가의 자존심을 지켜나가는 단순한 삶이 필요하다. 예술가는 이 단순한 삶으로서 생애의 행복을 만들어나가는 사람이다. 그의 예술에 공감해주는 시민들과 고귀한 연대감을 이어 유익한 즐거움을 주는 사람들이 바로 예술가들이다. 그래서 그 작품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누군가가 있는 한 그들은 영원히 외롭지 않다. 세상을 아름답게 물들인 단풍이 낙엽이 되어 뿌리로 돌아간다. 예술혼을 지피며 살아온 작가들의 삶은 결코 화려하지도 누추하지도 않다.

성슬기 기자  tmf59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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