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동문화재단 백승현 사무처장

새해 첫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맑은 바람을 가슴에 안으며 산책한다. 하늘과 들과 길과 산과 나무들을 살핀다. 사람들은 신성한 새벽 위를 분주히 움직인다. 그때 하늘에서 까치소리가 들려온다. 운이 좋거나 상서로운 일이 일어날 조짐이 분명하다. 새해 첫날에 처음 듣는 소리로 그 해의 길하고 흉한 징조를 미리 점쳐보는 풍속. 옛 사람들이 ‘청참(聽讖)’이라고 했다.

청참 중에서도 제일 반가운 것은 사람들의 덕담이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대박 나세요’, ‘건강하세요’, ‘행복하세요’, ‘승진하세요’, ‘결혼하세요’, ‘합격하세요’ 이런 덕담들은 새로움이 덜하다. 어떤 덕담을 해야 상대방이 정말 복된 한해를 맞을 수 있을까. 그렇게 가족과 이웃을 돌아보며 애쓰는 것도 새해를 여는 모든 이들의 마음가짐이다.

설빔을 입고 먼저 조상들께 설날 차례상을 올리고 가족들끼리 떡국을 먹는다. 맑은 장국을 끓이고 어슷 썬 가래떡을 넣고 푹 끊인 떡국을 후후~ 불면서 한 그릇 먹을 때, 아이들의 볼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다. 너무 예뻐서 어른들의 복주머니 세뱃돈의 잔고는 부족해진다. 떡국을 먹으면 나이 한 살은 덤으로 먹는다. 집안 친척 어른들을 찾아 뵙고 세배를 하고 안부를 여쭌다. 손님들을 대접하기 위해 세찬을 나누어 먹고, 세주를 마시며 즐겁게 논다. 윷놀이나 화투를 놀면서 한해 운수를 점쳐 보고 웃고 떠든다.

<동국세시기>에 조상들의 설맞이 풍경이 등장한다. 새해 첫날에 모든 관원은 임금에게 나아가 새해 문안을 드린다. 그 다음 정부 각 부서의 서리들과 각 군영의 장교들은 전현직 관원의 집을 찾아가 대문 앞의 옻칠한 쟁반 위에 명함을 올려놓고 돌아오는 데 이를 세함(歲銜)이라고 한다. 지방 관청에서도 그렇게 했다. 참 재미있는 조상들의 풍속이다. 아부성 새해 인사가 분명하지만 관원들이 이 날은 찾아오는 손님들을 만나지 않는 것이 원칙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금품이 오가는 인사가 아니라는 점에서, 지금에 비하면 청렴한 풍습이라고 할 수 있다.

올해는 국회의원 선거가 있어 모든 국민이 마음속으로 ‘투표용지’를 누구의 ‘세함’에 넣을 것인지를 설 연휴에 결정할지도 모르겠다. 국회의원 입후보자들은 정작 새해 첫날 ‘청참’으로 무슨 소리를 들었는지 궁금하다. 만약 후보자가 까마귀소리를 들었다면 그의 선거사무실엔 인사치레로만 방문하는 것이 여러모로 신상에 이로울 것이다.

새해 풍속 중 백미는 궁궐에서 왕이 문신들에게 새해를 맞는 감회를 시로 짓게 하고 잘된 시를 뽑아 대궐 안에 붙이는 것이다. 입춘방이나 단오첩과 같은 것이었는데, 한해를 맞는 ‘새해맞이 덕담 예술 퍼포먼스’였다. 일반 민가에서도 집 기둥이나 문 상방에 그림이나 글씨를 새겨 붙였다.

‘수여산 부여해-수명은 산같이 재물은 바다같이 되어라.’ 무병장수와 재물은 예나 지금이나 행복의 중요한 척도다. ‘거천제 내백복-온갖 재앙은 가고 모든 복은 오라.’ 안전 사회를 위한 염원은 지금도 유효하다. ‘애군희도태 우국원년풍-임금을 섬겨 큰 정치 희망하고 나라를 염려하며 풍년을 기원한다.’ 큰 정치가 펼쳐지는 그런 시대를 국민들은 떨리는 마음으로 기원하고 있다. 핵 전쟁이 없는 세계 평화, 생계 걱정이 없는 나라 살림을 애달프게 고대하고 있다.

설날부터 정월 대보름까지는 생업을 쉬고 놀면서 한해 생의 원기를 재충전하는 세시로 일년 중 가장 많은 전통놀이가 펼쳐진다. 놀이와 음악과 춤과 노래가 펼쳐지는 축제 주간이다.

설날에 윷놀이 정도로만 만족했다면 대보름에는 줄다리기·동채싸움·고싸움·편싸움·놋다리밟기 등 공동체놀이가 큰 판으로 펼쳐진다. 소원하고 불편했던 마음을 대화로 풀어내고, 내남없이 평등한 몸과 마음을 부딪쳐 인간다운 삶을 향한 희망 위로 함성을 지르며 치솟는다. 광주 칠석고싸움놀이는 그 공동체 놀이의 문화원형이다.

광주 시립민속박물관과 전통문화관의 대보름 한마당 행사, 북구 충효마을 달집 태우기, 지신 밟기 등이 멋지다. 전남 장흥 별신제, 순천 낙안읍성 민속놀이 한마당 장치, 진도 국악 공연 축제 등도 흥겨운 판놀이의 하나다.

시대의 흐름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잊혀져가는 우리의 공동체 문화의 흔적이지만 이것을 현대적으로 계승해 멋진 콘텐츠를 만들어볼 수는 없을까? 전통놀이를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MR(혼합현실) 등의 융합 콘텐츠로 만들어보면 어떨가? 남도 문화 원형들을 다른 아시아 국가의 원형들과 만나게 만드는 ‘아시아 문화 로드’는 또 어떨까? 게임 콘텐츠로, 전통역사 예술교육 콘텐츠로, 가상 해설 콘텐츠로, 영화나 애니매이션으로 만들어보면 어떨까?

전통 민속문화의 원형이 잘 보존된 광주 전남의 문화 소망 중 하나를 대보름 달 위로 띄워본다. 보름달이 그렇듯 희망도 둥그렇게 빛난다. 올 한해도 그런 둥근 문화의 힘이 우리 마음을 환히 비춰줄 것이다.

성슬기 기자  tmf599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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