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승현(대동문화 사무처장)

이순신 장군의 친필 휘호 ‘필사즉생 필생즉사(必死則生 必生則死)’는 충남 아산 현충사관리소의 큰 빗돌에도 새겨져 있다. <난중일기> 속 정유년 음력 9월 15일자에 나오는 구절로 명량해전 하루 전날 장수들에게 훈시한 내용이다.

다음날인 9월 16일 왜선 133척이 해남 어란포를 떠나 명량으로 공격을 해왔다. 그날 장군은 13척의 전선과 군사를 독려해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지휘하는 왜선 31척을 격퇴했다.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명량해전. 이 싸움의 결과가 어땠는지, 이 해전이 우리 역사와 세계 해전사에서 어떤 의미를 갖는지,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다.

“제가 글씨 이미지를 카톡으로 보내볼 테니 판각할 수 있는지 판단해주세요.”

잠시 후 아마추어 전각 공예가가 카톡으로 답변을 해왔다.

“먹을 듬뿍 묻혀 쓴 글씨가 아니라 획이 가늘고, 급하게 슬쩍 스쳐가며 쓴 글씨라 끊긴 붓줄과 희미한 점이 많아, 서각하기가 너무 힘들겠는데요.”

아마추어 글씨 감상자는 급히 전화를 걸었다. “이순신 장군이 절체절명의 위급한 순간에 전쟁터에서 수하 장군들과 수군들을 독려하기 위해 쓴 글씨라 말씀하신대로에요. 그런데 제 생각에는 이 글씨야말로 이순신 장군의 전투를 앞둔 숨 막히는 긴장감과 두려움, 승리의 대한 자신감과 걱정, 휘하 수군들을 독려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글씨로 표현된 멋진 작품이라고 생각해요. 붓끝의 움직임, 삐친 획 글씨 그대로 원본처럼 판각해 주세요. 집에 걸어놓고 감상해보려고요.”

망설이던 전각공예가는 한번 해보겠다고 대답했다. 한 달 후 완성된 전각작품 전달식을 겸한 술자리를 가졌는데, 마음에 쏙 들었다. 몇 순배 술이 돈 후에 전각 공예가가 이렇게 말했다. “제가 20년 글씨와 그림을 나무에 새겨 색을 칠해왔는데 이번처럼 긴장된 마음으로 판각한 것은 처음이네요. 의뢰하시는 분이 그렇게 간절하게 이순신 장군의 글씨를 존숭하는 마음을 이야기하니, 수십 번 연습을 하고 수십 번 판각해서 겨우 하나를 얻었어요. 저도 명량해전을 앞둔 이순신 장군의 마음이 되어 온몸으로 판각했어요. 전투가 시작되기 전 장군께서 장검을 빼들었을 때처럼, 조각도를 잡은 제 손이 제법 떨렸어요.” 멋진 말이었다.

“그럼, 우리 둘은 울둘목 해전을 승리로 이끈 장군의 마음속으로 몇 번 들어갔다 나왔네요? 하하.” 예술작품을 창작하고, 감상하면서 느낀 두 아마추어들의 공감과 즐거움은, 이제 내 아파트 황량한 거실 전면 벽에 걸려 한동안 긴 여운으로 남을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전달 받고 나서 전각 공예가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다. 코로나19가 엄연한 시절이라 그러면 안 되는데 포옹을 했다.

예술은 창조이면서 오락인데 오락적인 의미의 예술이 중요하다고 <생활의 발견>이라는 책에 글을 쓴 이는 임어당이다. 학교에서 축구 대표선수를 양성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전교생들이 운동을 즐겁게 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더 중요하다. 한 나라에서 한 사람의 로댕을 배출하기 보다는 온 국민이 미술을 즐길 수 있게 만드는 것이 보다 예술의 본질에 가깝게 하는 일이라고 그는 적었다.

사람이 오락을 즐기는 데에는 아무런 이유가 없다. 즐거움은 즐거움 그 자체이다. 논다는 것 자체가 훌륭한 이유다. 훌륭한 예술은 모든 국민이 아름다움을 가지고 노는 것이다. 바로 예술의 아마추어리즘이다. 생활 예술의 보급이다.

아름다움을 가지고 노는 것은 돈과 생존경쟁의 원리로는 설명이 불가능하다. 예술은 생계를 이어가는 육체적 정신적 힘이 남고 시간이 남아 자연스럽게 더해진 인생의 즐거움이다. 밥을 사기 위해 돈을 쓰는 것은, 영화를 보기 위해 돈을 쓰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생계의 의무감과 삶의 즐거움이라는 가치는 천지 차이다.

즐거움이야말로 예술의 본질이다. 조선의 문인화는 선비들이 글을 짓고 글씨를 쓰다가 여가 시간에 그린 그림, 즉 취미로 그린 그림이었다. 그런 그림이 우리 미술사의 한 장르로 자리 잡아 오늘에 이어져 수많은 직업문인화가들이 활동하고 있다.

우리는 아마추어가 만들어준 판각 글씨를 감상하면서 몇 달 동안 행복할 수 있다. 아마추어 시인들의 낭송시 모임에 가서 논다. 아마추어 공예가들이 만든 작품을 그리 부담되지 않는 가격으로 사서 감상한다. 전시회에 가서 멋진 그림을 보면서 받은 감동을 아내에게 멋들어지게 이야기할 수 있다. 친구가 몇 달 동안 배운 기타를 가져와 술자리에서 ‘10월의 어느 멋진 날에’를 연주하면 따라 부르며 흥겹게 논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유어예(游於藝), 육예에서 노닐어라. 여섯 가지, 즉 예법, 음악, 활쏘기, 마차 운전, 서예, 수학을 가지고 놀아라. 그러면 어질게 되고, 덕을 이루며, 마침내 바르고 옳은 나라의 도(道)가 온 나라에 그득 찬다. 공자가 살던 시대보다 지금은 더 많은 생활 예술이 있어 즐겁고 행복하다.

예술을 즐기고 향유할 수 있게 만들어주는 문화 정책이 필요한 것은 이 시점이다. 예술가들이 아마추어들에게 예술을 가르치고, 시민들은 예술을 배워 즐기고 공감한다. 그래서 시민 모두가 예술을 가지고 놀며 행복해한다. 그 예술놀이의 판을 만들어주고 예술가를 격려해주고, 예술을 즐기는 시민들을 포옹해주는 것. 이것이 문화 정책의 땅이고 뿌리다.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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