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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도로 공사 중 자갈밭에서 파낸 한국 최고의 불상[한국의 유물유적] 한강 다리 밑에 묻힐뻔한 국보 제119호 '연가7년명금동불입상'
임영열기자 | 승인 2021.01.25 11:08

1963년 7월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 마을 도로공사장 자갈밭에서 발견된 국보 제119호 ‘연가7년명금동불입상’.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국립중앙박물관

기원전 5세기경 인도에서 발생한 불교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들어온 건 서기 372년 고구려 소수림왕 때의 일이다. 고구려·백제·신라가 각각의 국가를 건설했지만 건국 초기에는 공인된 국교가 없었다. 하늘신과 조상신, 자연신을 숭배하는 ‘토착 신앙’이 널리 유행하고 있었다.

삼국의 국가 체제가 점차 중앙 집권 국가 형태로 발전하게 되면서 백성들을 통합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체계화된 종교와 사상이 필요하게 되었다. 고구려와 백제는 일찍이 불교를 받아들여 국가 이념으로 삼았지만, 신라는 기득권을 지키려는 귀족들의 반발에 부딪쳐 이들 국가들보다 150여 년 늦은 527년 법흥왕 때 이차돈의 순교를 계기로 불교가 정식으로 공인되었다.

제작연도가 밝혀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 불상은 전체 높이 16.2cm의 소형 금동불상이다 ⓒ국립중앙박물관

현존하는 역사서 중 가장 오래된 <삼국사기>는 고구려에 불교가 전래되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소수림왕 2년 전진(前秦. 351~394)의 왕 부견(符堅)이 고구려에 사신을 보냈다. 아울러 전도승 순도(順道)와 불상·경문을 함께 파견해 불교를 전했다.”

이후 한반도의 삼국과 중국은 서로 활발한 인적·물적 교류를 통하여 불교문화를 받아들였지만, 불교가 수용의 단계를 넘어 우리 땅에 정착하여 독자적 발전을 이룰 때 까지는 상당한 기간이 소요됐다. 특히, 숭배의 직접적 대상이 되는 ‘불상(佛像)’은 중국에서 직수입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백성들의 정서와는 다소 동떨어졌다.

광배 뒷면에 새겨진 ‘4행 47자의 명문’은 이불상이 연가 7년(539년) 고구려 평양의 동사에서 만들어진 1000개의 불상 중 29번째로 만들어진 ‘인현의불’ 임을 말해주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한국 최고(最古)의 고구려 금동불상이 신라 땅에서?

불교를 널리 전파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정서에 맞는 불상이 필요했다. 고구려에 불교가 들어온 지 167년이 지난 연가 7년, 서기 539년. 고구려의 수도 평양에 있는 절 동사(東寺)에 사도 40여 명이 모였다.

동사에 모인 승연(僧演)을 비롯한 불자들은 나라의 번영과 백성들의 평온함을 발원하고 불교를 널리 알리기 위해 천 개의 불상 ‘현겁천불(賢劫千佛)’을 만들어 전국에 유포하기로 결의한다. 이때 만들어진 1000개의 불상 중 29번 째로 만들어진 ‘인현의불(因現義佛)’은 법영(法穎)이라는 비구 스님이 모시고 공양하고 있었는데 어느 때인지 모르게 소실되고 말았다.

그렇게 인현의불은 까맣게 잊혔다. 그로부터 1,40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1963년 7월 경상남도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는 마을 도로공사가 한창이었다. 일당을 벌기 위해 공사현장에 나온 마을 주민 강갑순 아주머니는 산비탈 돌무더기를 파헤치고 있었다.

얼마쯤 파내려 가자 넓적한 돌덩이 하나가 나왔다. 돌덩이를 제치는 순간 사람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네모 반듯한 공간에 금빛 찬란한 불상이 누워 있었다.

국보 제119호 연가7년명금동불입상이 누워 있는 모습 ⓒ국립중앙박물관

인현의불이 고구려 수도 평양에서 만들어 진지 1,424년 만에 신라 땅에서 빛을 보는 감동적인 순간이었다. 불상을 처음 감정한 전문가들은 신라 땅에서 발견된 터라 당연히 신라시대 불상으로 알았다.

하지만 광배 뒷면에 새겨진 ‘4행 47자의 명문’은 이불상이 연가 7년(539년) 고구려 평양의 동사에서 만들어진 1000개의 불상 중 29번째로 만들어진 것 임을 분명히 말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미스터리로 남아 있는 ‘희대의 국보 도난사건’

제작연도가 밝혀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이 불상은 전체 높이 16.2cm의 소형 금동불상으로 한국적인 정서와 미감이 잘 반영된 불상으로 평가받고 있다.

한국인의 얼굴을 닮은 부처님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둥근 연꽃 형상의 대좌 위에서 중생들의 두려움을 덜어주고 자비를 베푸는 수인을 취하고 있다. 소용돌이치는 불꽃 무늬가 새겨진 배 모양의 광배(光背)가 부처님의 아우라를 더해준다.

한국인의 얼굴을 닮은 부처님이 온화한 미소를 머금고 있다. 오른손을 위로들어 손바닥을 밖으로 펴서 중생들의 두려움을 덜어주는 ‘시무외인’을 취하고 있다. 왼손은 아래로 내려 손바닥을 밖으로 펴서 자비를 베푸는 ‘여원인’을 취하고 있다 ⓒ국립중앙박물관

도로공사 중 돌무더기 자갈밭에서 찾아낸 금동불상은 광배 뒤에 새겨진 명문 덕분에 별다른 이견 없이 곧바로 8개월 뒤 1964년 3월 국보 제119호 ‘연가7년명금동불입상’으로 지정 명명됐으며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 중이다.

1,400여 년 만에 드라마틱하게 세상에 나온 인현의불은 국보로 지정된 지 3년 만에 또다시 사라질 위기에 처한다. 1967년 10월 24일 오전 10시. 덕수궁 미술관 2층 제3 전시실 진열장에 전시 중이던 불상이 감쪽 같이 사라졌다. 사라진 불상의 자리에는 범인이 남긴 메모가 있었다.

둥근 연꽃 형상의 대좌 ⓒ국립중앙박물관

“나는 세계기록을 남기기 위해 불상을 훔쳐 갔으니 경찰에게 알리지 마시오. 알리지 않는다면 오늘 밤 12시까지 돌려주겠소.”

그럼에도 경비원은 경찰에 신고했다. 덕수궁의 모든 문들은 닫히고 관람객들은 검문검색을 받아야 했다. 김포 공항을 비롯한 모든 공항과 항만이 즉각 폐쇄됐다. 범인은 오리 무중이었다.

밤 11시가 막 넘어가는 순간, 범인으로부터 한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불상은 한강철교 제3교각 16과 17번 받침대 사이 모래밭에 있으니 찾아가라...”

전화를 받은 미술관 국장은 급한 나머지 경찰도 대동하지 않은 채 한강으로 달려가 모래밭을 뒤졌다. 천우신조. 부처님의 보살핌이었을까. 다행히 불상은 비닐봉지에 쌓인 채 훼손되지 않고 모래 속에 묻혀 있었다.

금동불입상의 옆모습 ⓒ국립중앙박물관

고구려에서 만들어 진지 1400년 만에 옛 신라 땅에 묻혀있던 국보가 또다시 한강변 모래밭에 묻힐 뻔한 이 사건은 우리나라 문화재 도난 사건중 가장 엽기적인 사건으로 기록되고 있다. 지금 까지도 범인이 누구인지, 왜 그랬는지 알 수 없는 희대의 미스터리로 남게 되었다.

<대동문화> 122호(2021년 1, 2월)

임영열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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