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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수를 갚기 전에는 결코”... 용진산 기슭 ‘호남의병 본거지’한말 호남의병의 정신적 지주, 후석 오준선의 혼이 살아있는 ‘광주 용진정사’
임영열 기자 | 승인 2024.06.21 10:32

광주 광산구 본량동과 임곡동의 경계를 이루고 있는 용진산. 좌측이 석봉이고 우측이 토봉이다

어슴푸레한 무등의 여명을 뚫고 힘차게 솟아오른 태양은 온종일 빛고을 광주를 나지막이 비추다가 황혼이 되어서는 서쪽 하늘을 벌겋게 물들이며 사라진다. 서창의 너른 들녘을 붉게 감싸 안으며 장엄하게 떨어지는 낙조는 ‘광주 서구 8경’ 중의 하나로 꼽힐 만큼 장관이다.

태양이 넘어가는 길목 끝자락에 위치한 광주의 서쪽 끝. 광산구 임곡동과 본량동 경계에 우뚝 솟은 두 개의 봉우리가 있다. 서쪽으로 날카롭게 솟아있는 봉우리를 ‘석봉(石峰)'이라 하고 동쪽으로 완만하게 굽어있는 봉우리를 ‘토봉(土峰)'이라 부른다.

하늘을 찌를 듯 뾰족하게 솟아 있는 암릉의 모습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하다. 우뚝 솟아 있는 석봉의 모습을 보고 우리말로 ‘솟돌뫼’라고 불렀는데 이를 한자어로 고쳐서 ‘용진산(聳珍山)’이 되었다.

용진산 석봉에서 내려다보는 광산구 본량동의 모습. 멀리 왕동 저수지가 보이고 석봉아래 남쪽기슭에 용진정사가 있다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있는 ‘석봉’의 기세는 광주 사람들의 기상을 닮아 당차기 그지없다. 마치 붓끝처럼 뾰족한 문필봉이다. 옛날에 비가 오지 않아 가뭄이 들면 동네 사람들이 석봉에 올라 불을 피우며 기우제를 지냈다 하여 ‘우제봉(雨祭峰)’이란 별칭을 갖고 있다.

반면 토봉은 겉으로 보기에 바위 하나 없이 부드럽고 완만한 곡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마치 남도 사람들의 포근하고 후덕한 인심을 보는 듯하다. 두 봉우리 사이에 있는 고개를 배가 넘어간다 해서 ‘배넘이재’라고 부른다.

해발 349m로 그리 높지 않지만 골짜기가 깊고 산새가 옹골차다. 동쪽으로는 장성에서 발원한 황룡강이 흐르고 남쪽으로는 물고기를 닮았다는 어등산(魚登山)과 마주하고 있다. 황룡강에서 피어오르는 물안개와 어루어진 용진산의 풍경은 가히 절경이다.

용진산 북서쪽 산 허리 암벽에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모습을 하고 있는 마애불이 있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용진산마애여래좌상’이다

그래서일까. 예부터 많은 시인묵객들이 용진산을 찾아 유람했다. 조선 개국의 설계자 삼봉 정도전이 나주 회진현에서 3년간의 유배 생활을 끝내고 전국을 유람할 때 이곳 용진산사에서 며칠을 머물며 지냈다고 한다.

“가을 그늘은 막막하고 사방 산은 비었는데/ 지는 잎은 소리 없이 땅에 가득 붉었구나/ 다리 위에 말을 세우고 돌아갈 길 물으며/ 내 몸이 그림 속에 있는 줄을 몰랐구나...”

삼봉 정도전이 돌아갈 길을 잃을 정도로 풍광이 아름다운 용진산에는 몇 곳의 문화유산이 있다. 북서쪽 산 허리 깎아지른 듯 높은 암벽에 마치 이웃집 할아버지처럼 친근한 모습을 하고 있는 마애불이 새겨져 있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된 ‘용진산마애여래좌상’이다.

그곳에서 조금 더 오르면 임진왜란 때 벼슬도 없이 백의종군으로 선조임금을 모시며 공을 세운 죽산박씨 중시조 박경(朴璟)에게 나라에서 지어준 400년 역사를 간직한 정자, ‘가학정(駕鶴亭)’이 있다.

원수를 갚기 전에는 결코 상복을 벗지 않겠다

반대편으로 넘어와 왕동 저수지에서 석봉으로 오르는 들머리에 오늘의 주인공 ‘용진정사(湧珍精舍)’가 있다. 용 자가 서로 다르다. 용진산(聳珍山)의 한자 聳은 ‘솟을 용’인데 용진정사(湧珍精舍)의 湧은 ‘샘솟을 용’이다.

1917년 후석 오준선 선생이 후학들을 양성하기 위해 지은 용진정사. 정면 4칸 측면 3칸의 팔작집이다.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

용진정사 현판. 한말의 명필 석촌 윤용구의 글씨다. 용진산(聳珍山)의 한자 聳은 ‘솟을 용’인데 용진정사(湧珍精舍)의 湧은 ‘샘솟을 용’이다

용진산의 남쪽 골짜기 깊숙한 곳에 자리한 용진정사는 한말의 대학자이며 우국지사인 후석 오준선(後石 吳駿善 1851~1931) 선생이 암울한 일제 치하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서당으로 광주광역시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어 있다.

이 자리는 원래 ‘용진사’ 또는 ‘상원사’라는 절이 있었던 곳으로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과 조선후기 대유학자 우암 송시열 등 많은 시인묵객들이 다녀 가며 시문을 남긴 곳으로 전해진다.

이후 용진사는 폐사되었고 절터를 소유하고 있었던 청안 이씨(淸安李氏)들은 후석 선생이 서당을 지어 ‘후학을 양성하려고 한다’라는 소식을 듣고 이 뜻을 높이 사 땅을 무상으로 희사했다.

용진영당 담밑에 승탑(채련당탑)이 있다. 이곳은 용진사 또는 상원사라 불리는 절이 있었던 곳이다

그렇게 부처님의 절이 있었던 자리는 오준선의 민족정신이 살아 숨 쉬는 ‘정사(精舍)’로 바뀌었다. 1910년 8월 경술국치로 나라를 잃은 지 7년이 지나고 후석의 나이 67세 되던 1917년의 일이다.

2년 후 1919년 1월 21일 새벽. 고종 황제가 승하했다. 하루전 까지 건강했던 고종의 승하는 일제의 독살설로 이어졌다. 백성들이 분노했고 분노는 3‧1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다.

고종의 승하 소식을 들은 후석은 제자들과 함께 정사 앞 바위에서 통곡하며 “원수를 갚기 전까지는 결코 상복을 벗지 않겠다”라고 하며 일생동안 하얀 상복을 입고 백립(白笠)을 쓰고 지냈다고 한다.

용진영당. 후석 선생이 별세하고 8년이 지난 1939년 그를 추앙했던 유림들과 문인들이 뜻을 모아 정사옆에 3칸의 용진영당을 지었다

한말 나주‧광산 의병들의 본거지

조선 선비 중의 선비였던 후석 오준선은 고려 태조 왕건의 제2 왕후인 장화왕후(莊和王后)를 배출한 나주 오씨(羅州吳氏)의 후예로 광주 광산구 도덕동 도림마을에서 태어났다. 지금도 도림마을은 나주 오씨들의 집성촌이다.

어릴 때부터 이웃에 살았던 친척 오태규에게 사서(四書)와 근사록(近思錄)을 배우며 일찍이 학문에 눈을 떴다. 18세 때 호남 도학의 종장 노사 기정진(盧沙 奇正鎭 1798~1879)의 문하에 들어가 도학 사상을 배웠다.

이때 송사 기우만, 식재 기재, 현와 고광선 등과 동문수학 하면서 예학, 경학, 성리학 등으로 학문의 깊이와 폭을 넓혀 광산 지역을 대표하는 선비로 추앙받게 된다. 훗날 ‘바른 것을 지키고 옳지 못한 것을 물리친다’는 ‘위정척사(衛正斥邪)’를 기치로 내건 ‘노사학파’는 한말의병의 정신적 지주가 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일제는 조선의 고관대작과 저명인사들에게 일왕의 은사금(恩賜金)과 작위를 내려주며 수많은 친일파들을 양산했다. 1910년 호남의병의 사표(師表)로 이름이 높았던 후석에게도 일왕의 은사금이 내려왔다.

용진영당

용진영당에 모셔진 후석 선생의 영정. 우국지사들의 초상화를 주로 그린 조선후기 초상화가 채용신이 그린 것이다. 영당의 좌우벽에는 큰아들 북파 오헌수와 둘째 아들 도호 오동수와 함께 모셔져있다

후석은 일제의 끈질긴 회유와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끝내 은사금을 받지 않았다. 이듬해 후석은 ‘은사금 수령거부’ 죄목으로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 투옥되는 고초을 겪었다.

이일을 겪고 난 후석은 도림마을을 떠나 용진산으로 들어와 제자들과 함께 용진정사를 짓고 일제와 맞서 싸울 역량 있는 의병들을 양성한다. 후석의 제자들 중 금재 이기손, 의재 오상열, 죽파 오성술, 해산 전수용 등은 용진산과 어등산 전투에서 이름을 떨진 의병장들이다.

1917년 건립된 용진정사는 1931년 후석 선생이 81세로 생을 마칠 때까지 글을 쓰고, 후학들에게 항일정신을 가르친 곳이다. 그가 남긴 문집 <문인록>에 기록된 그의 제자들이 634명에 달한다.

또한 후석은 이곳에서 나주와 광산지역에 흩어져 투쟁하던 의병장 기삼연, 고광순, 전수용, 기재, 오계수, 심남일 등의 행적을 수집하여 <의병전>을 저술하여 이들의 항일활동을 기록으로 남겼다.

1909년 일제의 ‘남한 대토벌작전’으로 체포된 호남 의병장들. 뒤쪽 좌측부터 황두일, 김원국, 양진여, 심남일, 조규문, 안계홍, 김병길, 강사문, 박사화, 나성화, 앞쪽 좌측부터 송병운, 오성술, 이강산, 모천연, 강무경, 이영준 ⓒ광주역사민속박물관

오준선 선생이 별세하고 8년이 지난 1939년. 그를 추앙했던 유림들과 문인들이 뜻을 모아 정사옆에 3칸의 용진영당을 짓고 그의 올곧은 뜻을 기리고 있다. 영당에는 우국지사들의 초상화를 많이 그린 조선후기 초상화가 채용신이 그린 후석 선생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하얀 상복에 백립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평생을 일제에 저항하며 호남의병의 사표로 살았던 후석 선생이 용진영당에서 하얀 상복에 백립을 쓴 채로 오늘의 후손들에게 묻고 있다.

이제 상복을 벗을 때가 되었는가? 

임영열 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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