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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향만리-화순 운주사와 중장터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지 않는 스님들의 차시장
백승현 기자 | 승인 2016.03.04 11:17

신비의 천불천탑, 운주사 장터의 차향을 꿈꾸며

운주사 대웅전

천불천탑의 전설이 서려있는 화순 운주사에서 3km 정도 떨어진 곳에 중장터(화순군 도암면 용강리 3구)라는 마을이 있다. ‘스님들이 모여 형성된 시장’이라는 지명이다. 이곳이 승시(僧市) 또는 승장(僧場) 개념의 중장이 된 것은 화순 향토사학자 강동원의 <화순의 전설>(광일문화사, 1982)이라는 책에서 비롯됐다.

화순과 나주의 경계에 접한 도암 중장터는 예전에는 나주 땅이었으나 이조 중엽 이후 능주 고을에 속하여 오늘에 이르기까지 ‘중장터’라는 지명으로 전해지고 있다. 고려조와 이조를 통하여 스님들이 모여 매월 15일에 경상도는 상주에서, 전라도는 나주에서 물물교환의 시장을 이뤄 불가의 모든 물품을 필요에 따라 서로 바꾸어갔다.

전라도 나주고을에 매월 보름날이면 남자 스님, 비구니, 반짝이는 머리들이 수백 명씩 모였다. 허리 굽은 늙은 중, 젖 냄새 풍기는 어린 사미승, 머리가 메주 같은 중, 공산명월의 둥근머리중, 뒷머리가 죽은 콩쭉머리중, 각양각색의 얼굴이나 쪽물을 들인 회색장삼에 윤기 나는 민둥머리들은 모두 같아 일색이었으리라.

성속이 어울린 문화 난장, 중장터

각자 자기 고장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가져왔는데 쌍계사에서 온 스님들은 차를 봉지에 담아들고 서있고 화엄사에서 온 스님들은 목탁과 발우, 그리고 목기를 가지고 왔으며 내장사에서 온 중들은 백지 창호지, 딱지를 짊어지고 왔고, 대흥사에서 온 중들은 유기를, 무위사에서 온 중은 자기를, 송광사에서 온 중은 염주, 불상 등을 가지고 모두 모여 중들끼리 필요한 물건을 서로 교환했다.

나주는 지리적으로 전남 선문 대찰들의 중간에 위치해 중장터가 있었으며 매월 15일로 장날을 정한 것은 스님들이 달빛을 이용해 먼 거리에서도 도보로 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나주의 중장에는 나주 영암 의 건달들이 모여들어 스님들을 괴롭히고 물건을 약탈하는 행패가 끊이지 않았고 숭유배불 정책 때문에 관으로부터의 서러움도 당했다. 할 수 없이 장터를 옮겼으니 이곳이 도암 용강리의 중장터이다. 더구나 이곳은 나주, 화순, 장흥, 영암이 만나는 교통의 요지였다. 세월이 흐르면서 보름날이면 일반 사람들도 함께 모여 궁벽한 시골에서도 많은 곡식과 돈꾸러미가 왕래했다. 시장이 번성하면서 5일마다 열리는 오일장으로 바뀌었다.

그리고 이 책에는 또 화순 중장터에 깃든 운담 선사의 전설을 기록했다. 조선 중엽 선승으로 유명한 대흥사 운담 선사가 송광사에서 쉬다가 돌아가는 길에 이 중장터를 찾았다. 시장 구경을 마치고 돌아서는데 길 가에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었다. 거기에는 쌀장수가 머리에 쌀을 되는 말(斗)을 쓰고 엎드려 죽어있었다. 죽은 쌀장수의 등에 ‘방구월팔삼(方口月八三)’이라는 글씨가 쓰여 있었다. 사람들이 무슨 뜻인지 몰라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었다. 이때 운담 스님이 옆에 있던 노인의 장죽을 빌려 글씨 위에 반듯이 올려놓고 읽어보라고 했다.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는 일 없는 시장

‘시중용소두(市中用小斗)-시장 가운데서 적은 말을 썼다’는 뜻이다. 운담 스님은 “죽은 쌀장수가 마음이 정직하지 못하여 남의 쌀을 사들일 때는 큰 말을 사용하고 팔 때는 적은 말을 써서 천벌을 받아 죽었다”고 설명하고 합장배례하고 사라졌다. 스님들과 시골 사람들이 만나 필요한 물건을 교환하는 중장터에는 이후 이익을 위해서 남을 속이는 일이 없었다. 20년 전까지만 해도 이곳에는 오일장(5일,10일)이 섰지만, 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중장터는 자취가 사라지게 됐다.

2009년 전남대학교 박물관에서 간행한 <운주사 자료 집성>(황호균)에서는 중장터의 유래에 의문을 제기한다. 1872년 간행된 <조선후기지방지도>에는 중촌(中村)이라는 지명이 있어 ‘중장터’가 아니라 ‘중촌에 있던 시장’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중장’은 운주사와 관련 없는 ‘중촌 시장’이라는 것이다.

중장터의 유래와는 상관없이 다시 차인들의 관심을 끄는 것은 화순 운주사(雲住寺)이다. 운주사는 한 마디로 물음표를 가지고 갔다가 더 많은 물음표를 가지고 나오는 사찰이다.

운주사는 도선국사가 하룻밤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전설로만 존재할 뿐 창건에서 폐사에 이르기까지 그 역사를 말해주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고 있다. 가장 앞선 16세기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천불산은 능성현 서쪽 25리 지경에 있다. 운주사는 천불산 속에 있는데 절의 좌우쪽 산허리에 석불석탑이 각기 1천개씩 있으며 또 석실이 있어 두 석불이 서로 등을 마주 대하고 앉아 있다.”고 해서 조선시대까지만 해도 천불천탑이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외에도 1632년에 간행된 <능주목지>와 1923년에 간행된 <능주읍지>에 이와 비슷한 기록이 실려 있다.

1984년부터 1991년까지 전남대 박물관이 발굴 조사를 벌였는데 운주사가 조선시대 전반기까지만 해도 번창했었다는 사실만을 밝힐 수 있을 뿐이었다. 천불천탑이 있었다는 운주사에는 지금 21기의 석탑과 석불 100여 개만이 남아 있을 뿐이다.

운주사 창건 유래도 각인각색이다. 도선국사가 보기에 우리나라 지형이 행주(行舟) 형국(形局)인데 동서가 평평하지 못하고 태백산맥이 있어 동쪽으로 기울어져 국토의 정기가 일본으로 새어나가기 때문에 나라가 망할 위험이 있다고 보고 국운이 빠져 나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서 이곳에 천불천탑을 세웠다는 것이다. 도선이 천불천탑을 하룻밤 사이에 세울 적에 맨 마지막으로 와불을 세우려고 했는데 일하기가 싫었던 행자승이 거짓으로 닭이 울었다고 하여 모든 일이 수포로 돌아갔다는 것이다.

물음표 가지고 가서 더 많은 물음표 가지고 나오는 절

운주사의 창건 주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미륵신앙의 성지라는 해석을 내리고, 독일인 학자 힐트만은 <미륵-코레아의 성스로운 돌>, <미륵>이라는 책에서 천불천탑은 미륵 혁명 사상을 믿는 천민들과 노비들이 들어와 만든 것이며 불교 사원이라기 보다는 천민과 노비들의 코뮨(해방구)이었다고 소개하기도 하였다.

고려 초기에 운주사가 조성되었다고 보는 학자들은 고려의 중앙 세력에 대응해 지방 호족 세력이 자치적인 새로운 문화를 형성하게 되는데 이때 지방 민중들의 시대의식을 반영하여 운주사가 조영되었으며, 통일 신라의 지배자들이 추구하던 완벽한 이상미적 예술 세계와는 다른 파격적이고 도전적인 형식의 문화를 지니게 됐다고 풀이한다.

밀교적 영향이 운주사에 담겨 있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통일 신라 이후 크게 성행한 천불 신앙이 밀교에서 널리 숭상된 점으로 보아 운주사도 밀교적 편린을 간직했다고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또 운주사의 와불이 있는 곳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칠성 바위를 칠성 신앙과 연결시켜, 칠성 신앙도 밀교처럼 불교가 전파되는 과정에서 그 지역의 재래 토착 신앙과 결합하여 다양하게 나타나는 토착화된 민중신앙적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이곳의 불상들과 석탑이 고려를 정복한 원나라가 90여년 간 일본을 침공하기 위해 이 지역에 주둔시켰던 몽골연합군이 조성한 것이라는 주장과 함께, 몽골의 영향을 받아 이곳을 중심으로 돈차[청태전, 전차]가 해방 이후까지 전라도 장터에서 유통되었다고 주장하는 차인도 있다. 그 증거가 전남 강진군 성전면 수양리에서 돈차를 만들어 팔던 이한영 씨의 이야기 기록된 이에이리 가즈오의 <조선의 차와 선>(1939)이다. 유목민인 몽골연합군이 차 생산지인 이곳에 주둔하면서 휴대하기 편하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동전 모양의 차를 만들었다는 추론이다. 이 추론은 장흥과 강진, 화순 등 이곳에서 가까운 지역에서 청태전의 문화를 재발굴하려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차문화사적으로 다시 규명되어야할 필요가 있기도 하다.

중장터 문화제의 차시장을 열자

운주사의 불상의 양식을 보면 정형의 틀이 거의 무시되고 평면적이고 토속적인 얼굴 모습, 돌기둥 모양의 신체가 어색한 점, 균형이 잡히지 않는 팔과 손, 어색하면서도 규칙적인 옷주름, 둔중한 조각 기법 등이 특징이다. 석탑의 양식도 이전의 탑과는 전혀 다른 파격적인 형식들이 등장하고 층수도 3층, 5층, 7층, 9층 등 다양하다. 또 자연암반 위에 높직한 초층 탑신을 올려 기단으로 대체한 점이나 탑신석면에 ×, ∨, ◇형의 기하학적 무늬를 새겨놓은 점도 특이하다.

‘못난이부처’ ‘동냥치탑’이라고 불릴 정도의 파격적인 실험 정신이 빛난다. 조각돌을 떼기 위해 파놓은 구멍 3개를 이용해 눈, 코, 입을 한 줄로 조각하고 그것을 둥글게 깎아 부처님 얼굴이라고 조각해 세워놓은 조각가의 상상력에는 혀가 내밀어진다.

얼마 전 어떤 스님 한 분이 매년 운주 축제를 할 때 중장터에서 ‘전국 스님 문화 장터’를 열어 이웃들과 함께하는 난장을 트는 것이 어떠냐고 제안해주셨다. 각기 고장의 좋은 차와, 목탁과 발우와 한지와 염주와 불상들을 가져와 솜씨를 자랑하고 ‘무차선회’도 열고 ‘불교 포럼’도 개최하면 되지 않겠는가 하는 제안이었다. ‘이익을 위해 남을 속이지 않는 장터’일 될 것이니 그야말로 뜻으로도 형식으로도 좋은 ‘사찰 문화 난장’이 될 것이다.

대동문화 68호 [2012년 1.2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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