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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를 그리다 영원한 청년, 임옥상아트라이프 - 임옥상 화백
은미희 소설가 | 승인 2017.05.09 16:39

전쟁은 영웅을 만든다는 말이 있다. 진정한 자유, 살신성인의 예술은 억압을 뚫고 나온다. 겨울을 이기는 봄처럼. 임옥상 화백의 작품을 보며 부르르 떨림은 억눌렸던 마음의 진저리가 된다. 뼛속까지 자유인, 영원한 자유인 임옥상, 그는 말한다. “낮은 데로 임하소서.”

거침없는 무쏘의 뿔처럼

임옥상 화백

임옥상(67)은 자유인이다. 자유. 자유라는 어감이 달착지근하게 혀에 감긴다. 도발적이고 짜릿한 이 느낌의 자유라는 단어와 이미지는 임옥상 화가에게 무척이나 잘 어울린다.

그는 한평생 그림을 그렸지만 그 그림에 갇히는 것을 경계한다. 그림은 그가 자유를 느끼는 하나의 통로이자, 세상인 것이다. 즉 자유롭기 위해 그리는 것이다. 그래서 어느 것 하나 고집하지 않는다.

“전 그림에 갇히고 싶지 않습니다. 그림을 통해 세상을 이해하고, 저를 표현하며, 함께 공유합니다.”

그의 말처럼.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그에게는 그림의 대상이자 오브제가 된다. 자신이 표현하고자 하는 메시지와 그 물질이 지니는 속성과 맞는다면 그는 거침없이 그것들을 오브제로 삼는다. 그 물질이 가지고 있는 은유와 상징성을 차용해 작품이 드러내고자 하는 메시지를 구현하는 것이다. 그래서 종이와, 흙, 잔디, 꽃, 쇠, 모든 것들이 화가의 의도대로 재편되고 재구성돼 작품으로 재탄생한다.

모든 사물이 그림의 대상이 되고, 질료가 되듯 그의 변화의 과정도 다채롭다.

上善若水 -상선약수-물 2015. 종이위에 목탄. 480x336cm
三界火宅 -삼계화택-불 2015. 종이위에 파스텔. 480x336cm

 

평면회화에서 종이부조로 종이부조에서 다시 흙과 쇠로. 카사노바처럼 다양한 사물들을 섭렵한다. 하지만 그 같은 그림에 대한 목마름이 그의 경계를 더욱 확장시켜 나간다.

“과학이나 사회학이나 인문학적인 연구와는 별개로 물질이 가지고 있는 성질들에 대해 공부를 하지 않을 수가 없지요. 그림이라고 해서 한 가지만 계속 고집할 수는 없는 일입니다. 하나씩 새로운 것들을 실험할 때마다 지평이 넓어지고 세상이 환하게 열리는 것을 경험합니다. 흙을 토대로 작품을 하다보니까 흙에 대한 여러 가지 생각이 나고 쇠를 다루다보니까 세상에 쇠가 아닌 것이 없습니다. 쇠를 만지다보면 그냥 해방감이 느껴집니다. 그전에 쇠를 잘 모를 때는 주눅이 들었고, 쇠로 작품을 할 생각조차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쇠를 가지고 무엇이든 만들 수 있어요.”

그래서 흥이 나고 해방감이 느껴진다는 화가는 수명이 다한 폐고철들로 마술처럼 사람의 형상을 표현해냈다. 그 작품들처럼 그 물질에 대한 연구는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로 직결된다.

“인간의 역사는 석기시대를 거쳐 청동기 시대로 넘어왔어요. 그게 따지고 보면 인간의 발전사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쇠에는 우리의 DNA 다 축적돼 있어요. 쇠가 발명되면서 제국이 생겨나고, 전쟁의 역사가 시작된 거죠. 쇠의 발명은 그런 폭력의 시대를 여는 신호탄이 되었죠. 결국 저는 그런 인자들을 어떻게 발화시켜 낼 것인가, 고민하고 끄집어내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것이 예술가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무릇 모든 예술은 인간을 증명하고 인간을 고발하는 고차원의 행위이다. 더불어 모든 예술은 인간의 이야기이다. 그러니 인간에 대한 이해는 필수이며, 그 바탕에서 쌓아올린 행위야말로 진정한 예술인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의 거침없는 자유는 우리 모두에게 축복이다.

한글의 책 2005. 분당 책테마파크. 485x170cm. 코르텐스틸

경계를 허무는 예술…

모든 재료에 애착과 관심을 갖는 것. 그것은 화가의 영혼이 자유롭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고집스럽게 평면회화만을 고집하지 않고 주변의 모든 것을 오브제로 삼듯 화가는 끊임없이 자신의 지평을 넓히고 지형을 구축해왔다.

그의 손에 들어가면 모든 것들이 수굿해지고 새로운 생명을 얻는다. 쇠도 그렇고 나무도 그렇고, 흙도 그렇다. 고철더미에서 가져온 쇳덩이들은 전혀 다른 의미와 가치를 획득한다.

무정물의 사물에 생명을 불어넣고 근사한 작품으로 탄생시키는 그를 보고 있노라니, 새삼 예술가의 위대한 힘을 느끼게 한다. 평면회화에서 종이부조로, 종이부조에서 흙과 쇠로, 그리고 사진과, 영상, 입체, 퍼포먼스, 공공미술에 이르기 까지 모든 예술장르의 경계를 넘나들고 화가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도 많다. 그만큼 그의 활동영역이 넓고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영원한 청년으로서의 그의 에너지를 느낄 수 있다.

상상, 거인의 나라_2 2006. 서울숲 무장애 놀이터

‘현실과 발언’ 표현의 자유를 얻다

임옥상 화백은 복 받은 화가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리기 시작한 그림은 평생의 일이 되었고, 친구가 되었고, 피난처가 되었고, 그를 화명 높은 화가로 만들었다. 한 집안의 장남인 그는 부모의 반대없이 그림을 그렸고, 서울대 미대에 진학했다. 대부분의 화가들이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그림을 그릴 때, 그는 부모의 믿음을 등에 업고 그림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것은 세상만물의 법칙이다. 그 역시 초등학교 시절부터 그리기 시작한 그림에 대한 태도가 어떻게 바뀌었을까 궁금했다.

“사실 대학 다닐 때까지만 해도 낭만적이었습니다. 뭔지는 모르지만 열심히 그리겠다고 생각한 거죠. 헌데 대학을 졸업할 때 쯤 되니까 무언가 가슴속이 자꾸만 불편해요. 이러자고 그림을 그리려고 한건 아닌데, 라는 생각이 무언가를 요구했어요. 당시 사회는 군부독재시절이라 인간으로서의 자존감이나 자유의지 실현 같은 것은 생각해보지도 못하고 그저 주눅이 들어 살고 있던 때였지요. 그런 와중에 어떻게 예술이 자기 기능을 하고 올바르게 작동할 수 있었겠어요? 자유롭기 위해 예술을 시작했는데 저들의 폭압에 굴복한다면 그것은 비겁한 일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서 나도 모르게 사회에 대해 주먹을 들이대기 시작한 거죠.”

임옥상 화가는 저 엄혹했던 시기에 대학을 다니고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런 탓에 자연스럽게 사회의 억압에 저항하게 되었고, 예술의 자유를 보장받기 위해 투쟁했다.

뜻을 같이한 동인들이 모여 ‘현실과 발언’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그 모임을 통해 꾸준히 예술의 제 기능과 역할을 찾고, 독재정권을 조롱하거나 고발해왔다. 그 모임의 울림은 컸다. 그들은 대중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으며, 미술의 역할에 대해서도 재고하기 시작했다. ‘현실과 발언’은 나중에 민족미술협의회(약칭 민미협)의 모태가 되었다.

“사실 그때 우리가 사회운동을 했다기보다는 산다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 누구든 자유로울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사회운동을 했다기보다는 그저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또 한 인간으로서 마땅히 의견을 내고, 투쟁을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나만이 갖는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 안합니다. 누구나 생각하고 누구나 느끼고 판단하는 그런 수준의 차원이지요. 사회정의에 대해 우리가 보편적으로 추구하는 그런 수준의 것을 요구했고, 그것들이 무시되고 거부돼서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었죠. 그런 우리의 활동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해 주었구요.”

표현의 자유는 그냥저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 앞장서 저항하고, 요구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자유’이다. ‘현실과 발언’이 주는 어감은 ‘저항’과 같다. 당시 사회정의와 자유를 위해 같이 활동을 했던 화가들에게 가해지는 탄압은 한 생을 뒤흔들기 충분했다. 그러나 화가는 그때 전주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 역시 복 받은 일이다.

땅4.1980. 캔버스 위에 유채. 177x104cm

민중 속으로, 공공미술의 태동

2017년, 봄을 살아가는 그의 태도는 지금도 여일하다. 어떤 탄압이나 외압에도 그는 더 꿋꿋하게 일어나고 탄력적으로 복원된다.

사실 화가가 그림에 대해 생각을 달리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다니던 전주대학교를 그만두고 전속작가 활동도 접은 채 전업작가 활동을 하고 있을 때였다. 그는 인사동 차 없는 거리에 나가 사람들과 만났다. 그때 그는 미술이 꼭 미술관에만 가야 만날 수 있는 것인가라는 데 의문을 가졌고, 직접 사람들 사이로 파고 들어가자고 생각했다.

“IMF시절이었죠. 제자들을 가르치던 전주대학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와 전업작가가 되었습니다. 할일이 없다보니까 자연스럽게 길거리로 나갔죠. 나가서 사람들하고 놀았어요. ‘당신도 예술가다.’라는 주제로 일주일에 한번 씩 차 없는 인사동거리에서 그림도 같이 그리고, 자장면 만들어 먹기도 하고, 흙을 주물럭거리기도 하고, 비닐을 갖고 놀기도 하며 4년을 놀았습니다.

그러다보니 한 가지 깨달음이 생기더군요. 이 사람들이 하는 행위 모든 것이 그대로 다 미술이었던 것입니다. 옷 입는 것도, 입술 바르는 것도, 머리 빗는 것도 다 예술이었던 것입니다. 헌데 우리는 그동안 이것을 예술의 행위가 아닌 것처럼 구분하면서 사람들을 주눅 들게 했죠. 그 생각 뒤에 나는 더 사람들하고 신나게 놀았죠.”

화가가 인사동 차 없는 거리에서 선보였던 이벤트는 공공미술을 배태했다. 당시 공공미술의 개념이 없던 시절에 화가의 행동은 다소 파격적인 것이었다. 작업실에서 거리로, 미술관에서 거리로, 높은 데서 낮은 곳으로 내려온 미술은 당시의 우아한 미술가들에게는 무척이나 곤혹스러운 것이기도 했다.

임옥상 화가는 우리 미술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의도했던 의도하지 않았든 본격적으로 민중미술과 공공미술의 틀을 선보인 화가가 바로 그인 것이다.

대한민국 헌법 2014. 코르텐스틸. 9x2.8m

내려가는 길, 봉사하며 공유하는 길

요즘 그가 주로 작업하고 있는 재료는 쇠와 흙이다. 흙과 쇠, 종이와 땅. 이 오브제들은 서로 대척점에 있는 듯 하면서도 상통한다. 가장 부드러우면서도 가장 강한 것. 그것은 바로 이 흙과 쇠와 종이와 땅이다. 어쩌면 강한 것은 쇠가 아니라 땅이고, 종이이며, 가장 약한 것은 쇠일지 모른다. 쇠 역시 산화하거나 부식되면 땅의 일부로 돌아간다. 그리고 쇠 또한 대지를 구성하는 하나의 원소이지 않던가. 땅은 만물에게 생명을 주고, 대지는 그것들을 키운다. 흙은, 땅을 만드는 하나의 원소이며, 그 대지 위에서 세상은 생성과 성장과 사멸의 순서를 겪는다.

화가는 생명을 주고받는 그 흙과 대지에게서 또 다른 영감을 얻는다. 그동안 많은 오브제를 사용해 작업을 해오다 다시 흙으로 돌아온 것이다.

우리는 모두 흙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그런지 흙으로 채워지는 화가의 인물화는 거친 표면의 질감 때문에 억센 힘과 생명력이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흙이 지닌 속성으로 한없이 부드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쇠가 따라올 수 없는 강인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물으니 이렇게 답했다.

“다들 힘들다고 하는데 자신들의 이상이 너무 높은 건 아닌지 한번쯤 점검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모든 사랑이나, 예술이나, 그런 것들은 밑으로 내려 가야한다고 생각합니다. 위로 쳐다보면 길이 없습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는 현재의 재주를 그만큼의 재주도 없는 사람들을 위해 쓰면 행복할 일입니다. 근데 그 재주를 가지고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생각하면 절대 길을 찾을 수 없습니다. 갈증과 욕망이 넘치면 현실은 항상 지옥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먼저 봉사하라고 일러주고 싶습니다.”

갈증과 욕망이 넘치면 현실은 항상 지옥일 수밖에 없다는 화가의 지적이 가슴에 서늘하게 꽂힌다. 경계할 일이다.

<대동문화 100호. 2017년 5-6월>

은미희 소설가  somchanel@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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