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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최고 사령관 권율 장군을 구하라친일파들에게 포위당한 도원수 권율
임영열 시민기자 | 승인 2018.02.26 10:34
행주산성 '충장사'에 모셔져 있는 권율(1537~1599)장군의 영정 ⓒ충장사

광주광역시 남구 구동에는 광주공원이 있다. 광주시 제1호 공원으로 거북이 형상의 성거산을 공원화했다. ‘구동(龜洞)공원’이라고도 부른다.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인들의 신사가 있었다. 성거사라는 절이 있었으며 그 흔적으로 대한민국 보물 제109호 ‘성거사지 5층 석탑’이 있다. 4·19 혁명 희생자 추모탑과 6·25 전몰군경 현충탑, 의병장 심남일(1871~1910) 순절비 등 호국·민주화 영령 추모 시설이 있어 역사적 의의가 깊은 곳이다.

우리 국문학사에 큰 족적을 남긴 <시문학파>의 창립자, 김영랑과 박용철 시인의 쌍시비도 있다. 또한 이곳은 5·18 사적지 제20호로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당시 시민들이 계엄군의 학살에 맞서 시민군을 편성하고 훈련하였던 곳이다. 광주의 명암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광주광역시 구동에 있는 광주공원. 광주광역시 제1호 공원이다. 구동공원이라고도 부른다.광주의 명암이 담겨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광주공원에는 <시문학파>의 창시자 김영랑과 박용철 시인의 쌍시비가 있다. 쌍시비는 전국적으로 희귀한 시비이다

광주공원 ‘선정비군’에 친일파들의 비석이 있다

공원 동쪽 끝에는 각양각색의 비석(碑石)들을 한 곳에 모아 놓은 특별한 곳이 있다. ‘광주공원 선정비군(善政碑群)’이다. 광주향교에서 공원의 좁은 사잇길을 따라가다 왼쪽 계단으로 오르면 27기의 비석들이 횡대로 도열해 있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본래 광주 시내 여러 곳에 흩어져 훼손되어 가고 있던 선조들의 유적비를 모아 둔 곳이다. 1957년 공원 입구에 조성되었다가 1965년에 다시 현재 위치로 옮겨 놓은 것이다.

크기와 모양새도 제각각인 이 비석들은 역대 광주 목사와 1896년 전라남도와 북도가 분리된 이후 관찰사와 도지사들이 고을을 다스리면서 이룩한 업적이나 선정을 기리고자 세운 비석들이다.

광주 선정비군. 광주 시내 여러곳에 흩어져 훼손되어 가고 있던 선조들의 유적비를 모아 둔 곳이다

여러 비석들 중 맨 앞에 높이 솟아 있는 약 2m가량의 세 비석이 유독 눈길을 끈다. 맨 앞줄에 ‘도원수 충장 권공 창의비(都元帥忠壯權公倡義碑)'가 세워져 있다. 한 발짝 물러선 그 양옆으로 두 개의 비석이 권율 장군 창의비를 에워싸고 있는 모양새다. 친일인사 윤웅렬과 이근호의 선정비다. ‘관찰사 윤공웅렬 선정비’와 ‘관찰사 이공근호 선정비’라고 적혀 있다. 윤웅렬이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를 지내고 난 다음 해인 1898년에 세웠고 이근호가 5대 관찰사를 지내던 중인 1903년에 세웠다.

‘도원수 충장 권공 창의비’는 권율 장군의 11 세손 되는 권재윤 공이 1901년 신축년에 광주 군수로 부임하여 그 이듬해에 세운 것이다. 임진왜란 때 광주 목사와 전라감사를 거쳐 조선 최고 사령관, 도원수를 지냈던 권율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웠다. 구 한말 경술국치로 나라가 망하자 스스로 목숨을 끊은 우국지사 은진 송병순이 비문을 짓고 후손 권재윤이 글씨를 썼다.

비문에는 의병을 모아 이치 전투에서 호남을 온전히 지켜낸 장군의 공을 치하하여 '전라도 순찰사'에 승차한다는 내용과 행주 전투 승전을 보고받고 '팔도 도원수(都元帥)'로 제수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측면에는 전투에 참여한 제장 26명의 명단이 적혀 있다. 정충신· 김덕령· 고인후· 선거이···

광주 선정비군에 있는 도원수 권율 장군 창의비. 양옆에 친일인사 윤웅렬과 이근호의 선정비가 있다. 마치 권율 장군을 에워싸고 있는 모양새다 ⓒ문상우

‘금수저’ 권율, 광주 목사(光州牧使)로 부임하다

권율(權慄 1537∼1599)은 영의정을 역임한 권철의 막내아들로 경기도 강화에서 태어났다. 당시 할아버지 권적이 강화 부사(府使)였다. 본관은 안동이다. 유복한 집안의 전형적인 ‘금수저 출신’이다. 권율은 나이가 들어도 관직에 나갈 생각은 않고 전국을 유람하며 산수를 즐기고 지리 공부에 탐닉하기도 했다.

주변에서 관직에 나갈 것을 권유하였으나, 권율은 “옛날 주나라 강태공은 현명하여도 나이 80세에 출사를 하였고 나는 아직 마흔밖에 안되었다. 재덕 또한 그에 비하면 반에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는데 어찌 공명을 바랄 것인가” 하며 벼슬에 나가는 것을 조급해하지 않았다.

뒤늦게 아버지 권철의 죽음을 계기로 그의 나이 46세가 되던 1582년(선조 15)에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응시하여 병과로 급제하였다. 문관 출신이다. 승문원정자(承文院正字)를 거쳐 예조정랑, 호조정랑, 의주목사(義州牧使) 등을 역임하였다. 그의 사위가 되는 오성대감 이항복(1556~1618)보다 2년이나 늦게 관직에 나갔다.

권율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직전까지 의주 목사였지만 행정을 제대로 살피지 못한다는 모함을 받고 파직된 신세였다. 전쟁이 터지자 조정은 권율을 광주 목사에 임명했다. 직책이 없던 권율을 광주 목사 자리에 앉히고, 정읍 현감(종 6품)이었던 이순신을 전라 좌수사(정 3품)로 파격적으로 승진시킨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이들을 천거한 사람은 영의정 서애 유성룡(西厓 柳成龍 1542~1607)이었다. 육지에서는 권율,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왜란으로부터 조선을 구해 냈다.

충남 금산군 진산면에 있는 이치 대첩비. 1866년 금성면 상가리(上佳里)에 이치대첩비와 대첩사 (大捷祠)를 세웠으나 1944년 6월 일제가 항일유적 말살정책으로 폭파하여 그 파편이 진산면 사무소에 보관되었다. 1963년 대첩에 참여한 후손과 지역 유지가 지금의 장소에 비석을 건립하였다. 충남 문화재자료 제25호 ⓒ금산군청

전라도를 온전히 지켜낸 ‘이치(梨峙) 대첩’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한양은 19일 만에 속수무책으로 함락되었고 무능한 왕실은 백성들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난길을 떠났다. 조선의 운명이 바람 앞의 등잔불과 같았다. 56세의 늦은 나이에 광주 목사로 부임한 권율은 전라도 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대패했다.

순찰사 이광은 무계획적이고 성급하게 공격을 했고, 군사들은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었다. 4만여 명의 군사들이 2천도 안 되는 왜군에게 어이없는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임진왜란 전쟁 중에서 최대 패전인 ‘용인 전투’였다. 유성룡은 <징비록>에서 그날 군대가 행군하는 모습을 “마치 봄나들이 나온 양 떼들 같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패전의 책임을 물어 순찰사 이광은 해임되었고 권율이 도체찰사(都體察使)에 임명되었다.

용인 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은 금산성에 주둔하며 전라도로 진군할 계획을 세운다. 전주성을 노리고 있었다. 전라도 곡창지대를 점령하여 안정적으로 군량미를 조달하고 병참기지를 확보하려는 전략이었다.

한편 왜군의 첩보를 입수한 권율은 남원과 광주 등지에서 의병 약 1,500 여 명을 모집하여 동복 현감 황진과 함께 전주성에 입성 후 이치(배재)에서 방어진지를 구축한다. 이치는 지금의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과 충청남도 금산군 진산면 사이에 있는 고갯길로 금산에서 전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넘어야 하는 험준한 길이다. 배나무가 많아서 이치(梨峙)라고 불렀다.

권율은 용인 전투에서의 패배를 교훈 삼아 곳곳에 목책을 세우고 검은 연기를 피워 위장술로 적들을 기만했다. 조총과 칼로 무장한 채 진격해오는 만여 명의 왜군을 맞아 강력하게 저항했다. 징과 꽹과리를 치며 군사들의 사기를 높였다. 마침내 왜군은 퇴각하고 용인 전투의 패배를 설욕했다. 전라도를 온전히 지켜낸 전투였다. 권율은 전라감사로 승진한다. 1592년 7월의 일이었다.

이때 의주로 파천해 있던 선조에게 이치 대첩의 승전보를 전한 이 가 바로 16세의 어린 소년병, 금남군(錦南君) 정충신(1576~1636)이다. 광주광역시에 있는 ‘금남로’는 그를 기리는 도로명이다.

이치 대첩의 승리로 반격의 기회를 잡은 조선군은 그해 9월 수원 독산성 전투에서 유격전을 벌려 왜군들을 격파했다. 그 이듬해인 1593년 2월, 권율 장군은 2,30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양천강을 건너 경기도 고양의 행주산성에서 대승을 거둔다. 이른바 한산대첩·진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이다. 그해 6월에 권율은 조선의 최고 사령관, ‘도원수(都元帥)’가 되었다.

이치대첩비 ⓒ금산군청

훗날 장군의 사위 이항복의 문집 <백사집>에 따르면 권율은 행주대첩보다는 ‘이치 전투’을 자신의 가장 자랑스러운 전공이라고 말하고 있다. 일본군도 이치 전투에서의 패배를 가장 가슴 아파했다고 <선조수정실록>은 기록하고 있다.

권율 장군은 임진왜란이 끝나자 전후 복구에 기력을 소진한 나머지 1599년 그의 나이 63세 때 노환으로 사망하였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져 경기도 고양시에 있는 ‘충장사’에 배향되었다.

권율 장군을 포위하고 있는 윤웅렬과 이근호는 누구?

다시 ‘광주공원 선정비군’으로 가보자. 조선군 최고사령관 권율 장군을 에워싸고 있는 윤웅렬과 이근호는 한일합병에 협조하여 일제로부터 ‘남작’의 작위를 받았고 국권침탈의 대가로 주어지는 포상금인 ‘은사공채(恩賜公債)를 받아 친일 인명사전에 등재된 인물들이다.

윤웅렬(尹雄烈 1840~1911)은 1896년에 지방제도가 전국 8도에서 13개 도로 개편되면서 초대 전라남도 관찰사로 부임한다. 이후 4대 관찰사도 역임하였다. 일본인들이 광주에 정착할 수 있도록 절대적 도움을 준 인물이다. 1911년 그가 사망하자 아들 윤치호가 그의 남작 작위를 이어받았다.

이근호(李根澔 1861~1923)는 ‘을사오적’ 이근택의 형이다. 윤웅열에 이어 제5대 전라남도 관찰사를 지냈다. 본인을 포함해 세 형제가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은 대표적인 친일 집안이다. 은사공채는 물론 1911년 2월 총독 관저에서 열린 '작기본서봉수식(爵記本書奉授式)'에 예복을 입고 참석한 인물이다.

친일파의 비석이라도 '훼손시에는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낡디 낡은 현수막이 걸려 있다

의향(義鄕) 광주의 한 복판, 광주공원에 ‘애국(愛國)과 매국(賣國)’이 한자리에 서있다. 친일파의 비석일지라도 함부로 훼손해서는 안 되며, ‘훼손시 법적 책임을 묻겠다’는 낡디 낡은 현수막이 공허하게 게시되어 있다. 안내판에는 “친일인사의 선정비 존치 여부에 대하여 논란이 있었으나, 철거나 단죄비 설치 등 논의 중에 있으므로 결정 시까지 본 안내문을 존치할 예정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몇 년째 논의만 하고 있다. 그게 그리 어려운 일일까. 3·1절이 며칠 남지 않았다.

우국지사 은진 송병순이 근찬 한 권율 장군의 창의 비문 마지막 부분이 서늘하게 다가온다.

“조그마한 빗돌이 천지와 더불어 보존되어서, 광주 고을 사민의 크신 은혜 보답이 거의 그지없이 이어지면, 광주의 산천초목도 또한 찬연히 빛나지 않겠는가!”

 

임영열 시민기자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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