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의 땅 9

이 세상에 꽃이 없다면 들판은 얼마나 적막할까. 이 세상에 꽃이 없다면 우리들의 창밖은 얼마나 쓸쓸할까. 꽃은 그 자체로 아름다움이며 사랑과 행복의 기호이다. 열망의 무늬이며 환희의 색상이다.

수태의 성소와 안식의 성채가 빛나는 하늘의 신화이며, 노래와 춤과 그림과 시가 자라나는 땅의 꿈이다. 꽃은 여자요 남자며 성희의 춤이다. 들꽃화가 이윤숙은 생의 후원에서 이 꽃부리 속으로 열린 길을 따라 이제 다른 꿈은 꾸지 않아도 되는 숲에서 눈부신 화전畵田을 일구고 있다.

이번에 선보이는 신작 모델은 꽃자리에 빽빽이 박힌 혀꽃들을 파자破字하여 허공으로 날려 보냈다가 이내 불러들이고 모이면 다시 훅 불어 흩어버리는 자성磁性적 이합과 집산의 운동성을 방법론으로 삼았다. 방법론이라기보다 의미론에 가깝다.

농부가 너른 들판에 씨를 뿌리고 거두는 것처럼 때가 되어 자방子房이 하늘로 씨앗을 날리자 사방으로 흩어져 대지에 곤두박질치는 산포散布의 의미가 암시되어 있다. 미술은 기저에서 진실과 사실성을 옹호한다. 어떠한 변형과 추상을 가해도 어떠한 상징과 사의를 강조하여도 그 원형은 자연에서 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생명이 숨 쉬는 공간을 실사로 포착한다는 것은 녹록한 일이 아니다. 응물상형應物象形, 수류부채隨類賦彩, 경영위치經營位置 따위로 설명되는 전통미술의 화론 화법은 여백을 갖되 그 공간의 형과 색, 그 공간의 구성과 배치, 그 공간의 미적 감흥을 민감하게 포착하지 않으면 안 되는 고단한 과정일 수 있다.

현대미술을 살아가는 작가들은 이 옹색하고 퀴퀴한 잠자리에서 끊임없이 탈 경계의 꿈을 꾼다. 설레는 참나리 꽃입술의 주황을 때론 백묘의 윤곽이나 몰골의 터치도 없이 직접 화이트나 코발트 빛 루즈로 덧바를 수 있고, 추상과 데포름과 관념과 아라베스크가 작업실 창틀에서 멋대로 뛰놀게 하고 싶을 때도 있으며, 자기만의 냄새를 피우는 무엇으로 자유롭게 날개를 달고 싶기도 하는 법.

모정 이윤숙이 끌고 가는 『꽃꿈花夢』의 수레바퀴는 의당 태양처럼 둥글고 달처럼 환해야 했으므로 비포장의 거친 질감보다는 시원하게 달리는 비단길의 안정이 필요했을 법. 보다 선명한 색점의 배양과 파종을 위해 그녀는 아교포수를 하여 전에 없던 미끈하고 정갈한 채색바탕의 화포를 깔아두었다.

지우고 그리며 덧바르고 긁어내기가 자유로운 유채와 달리 눈 내리듯 바닥에서부터 차곡차곡 쌓아가는 채색화의 특성상 배경색의 변화는 작품의 패턴을 크게 좌우한다. 그러나 그녀는 배경색을 겹겹이 포개지 않고 오히려 단순화한 감이 있다. 문인화에서 억압된 색감본능을 만족하기 위해서랄까, 전 작품에 프레임을 걸어놓았던 꽃잎과 씨알의 관계성을 잘 들키기 위한 의중이었달까, 어쨌든 그녀의 속도감 있는 작업 스타일에 맞고 망설임 없는 활발한 성품과 잘 어울린다고 보았다.

많은 화가들이 오랜 훈련의 결과로 색감을 얻는다. 색감은 작가가 표현하려고 하는 주제에 ‘작가의 색깔’을 부여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그러나 색에 대한 독자성은 학습의 차원이라기보다 끼에 더 가깝다. 만개한 꽃송이를 너부죽하게 펴서 가운데를 오목하게 이부자리로 깔고 거기에 누워 잠을 청하면 비몽사몽간에 은하수 별무리가 흐르고 불꽃놀이처럼 펑펑 터지는 꽃꿈의 나락으로 떨어질 것이다. 작가는 그 찰나에 그 판타지의 영상을 작은 꽃이나 씨알, 색점으로 치환하여 어둠 속에서 별이 빛나게 하는 타고난 색채감각을 발휘하고 있다.

작품 전반을 지배하는 ‘윤상輪像’의 소용돌이는 환희의 젖꽃판이며 포궁胞宮이고 해님이며 달무리 같다. 대지의 어머니를 향해 날아가는 씨들이 허공을 가르고 열을 짓고 춤을 추며 깃발을 펄럭인다. 정자의 유영이며 배아의 싹으로 적시한 콩나물 기호에서도 분명하다.

어머니의 땅 56

음양의 남녀가 방출하고 수렴하며, 밀고 당기고, 승하고 강하며, 성하고 멸하는 생명 순환의 원형이자 하늘의 정을 받아서 땅의 기운이 솟구치는 하나, 즉 어머니의 방房이요 자신의 궁宮인 것으로서‘큰집宇宙’을 제시하고자 한다.

작가 모정의 문인화 시절 꽃그림의 제목들은 찔레꽃에 ‘화무花舞’, 쑥부쟁이에 ‘숨결’, 꽃무릇에 ‘영혼’이라는 다소 관념적인 제목들을 달았다. 꽃을 그리되 보이는 것에 그치지 않고 그 속에 무언가를 담아 그 의미를 전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는 굳이 토를 달지 않아도 좋을 ‘뜻’이 분명해졌다.

씨가 꽃판에 안겨 융합됨으로써 <어머니의 방> 하나로도 충분하다. 꽃에 이름이 붙는 순간 그 꽃의 생태와 형태, 성상, 약리까지 우리는 다 알아야 했다. 머문 꽃과 핀 꽃, 꽃자리와 열매에 대해서도 떠올리게 된다. 암수한그루와 딴그루를 배워야 하고 씨앗들의 산포전략도 다 보고 싶으며 어슷비슷한 꽃들의 갈래도 알고 꽃말도 찾아보아야 한다. 가까이 다가가 꽃술을 손끝에 세어보고 꽃차례의 산방과 산형들을 매만지기도 하며 화관의 향기와 빛깔도 입맞추면서 그 잎새의 우상과 복엽 따위를 살펴 붓끝을 가다듬어야 한다.

이것이 신사임당이나 보태니컬아트 식 사실화· 세밀화의 맛이다. 그러나 만 가지 이름이란 본시 인간의 필요에 따라 간섭한 흔적에 지나지 않는다. 존재의 영역에서는 화초니 잡초니 하여 사물을 서로 구별하고 차별할 필요조차 없다. 피아彼我가 되어서 서로 대립할 까닭이 없는 원래 ‘한얼’임을 상기한다면 언어 이전의 자리에서 사물을 대하고 그 본질을 꿰뚫는 감각에서 작품을 빚어야 빛도 나고 독자의 제목도 고생을 덜할 것이다.

이윤숙의 도상은 꽃과 씨를 포개어 하나처럼 다정다감하므로 ‘어머니’도 쉽고 ‘방’도 쉽다. 고운 무늬벽처럼 아늑한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어쩌면 당초무늬의 벽면 위로 이 화면이 돌출하면 안성맞춤의 ‘포인트’가 될 성 싶다. 야수파 앙리마티스 작품의 매력은 입체가 아닌 평면성의 환원에 있다.

앞에 앉은 여인과 그 둘레의 과일이며 화분이며 벽지문양들이 상호 등가치의 힘으로 나열되어 장식적이다. 새로 벽지를 바른 어머니의 방에 이들 그림을 한번 걸어보면 어떨까. 포근한 상상의 나래가 과거에서 그 과거로 거침없이 꼬리를 이을 것 같은.

김진수 화가.시인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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