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우리 곁에 왔습니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도 눈이 많았습니다. 저수지가 꽁꽁 얼어붙고 푸른 소나무 위에는 늘 눈이 수북이 쌓여 있었습니다. 보리는 많은 눈 때문에 올 겨울 내내 따뜻했습니다. 보리 위에 내린 눈은 보리의 이불이라고도 합니다.

눈이 많으면 풍년이 든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입니다. 입춘에 내린 눈이 녹고 보리밭에 파릇파릇 새싹이 올라오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보리밭으로 나가 보리를 밟았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보리의 어린잎에 상처를 주어 겨울이 오기 전에 지상으로 싹이 자라는 것을 억제하려는 것이 보리밟기입니다. 또한 상처로 수분이 많아지기 때문에 세포액 농도가 높아져 추위를 견디는 힘을 더 강하게 해주기 위함입니다. 뿌리가 땅속에 더 깊게 파고들 수 있게 해 동상해(凍霜害)에 대한 저항성도 높이고 주변 땅속으로부터 수분을 흡수하는 능력도 커져 봄철 가뭄을 막을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눈 속의 보리도 애처롭고, 새순을 밟아 버리는 것도 애처롭지만 이렇게 밟아주어서 웃자람을 막아주지 않으면 보리가 입춘 추위를 견딜 재간이 없답니다. 그렇게 오히려 고통을 줘서라도 겨울을 지나고 나면 보리는 더욱 강인하게 봄을 맞을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겠지요. 눈 폭탄이 내린 입춘의 눈을 바라보며 어쩌면 어설픈 웃자람을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삶을 반추해 보게 됩니다. 저 보리가 추운 겨울을 나고 풋풋한 청보리의 시간을 보내고 마침표를 찍는 시간, 환경을 탓하거나 억울해 하지 않고 차가운 눈을 이불 삼아 견디노라면, 가슴 벅차도록 찬란한 봄이 드디어 올 것입니다.

설날 즈음에

우리 민족 최대의 명절인 설날을 지냈습니다. 예전만큼은 아니지만 민족 대명절인 대보름도 지냈습니다. 온 가족과 일가친척들이, 그리고 공동체인 동네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여 조상의 은덕을 기리는 제사와 더불어 자기의 태어난 근본을 잊지 않고 은혜에 감사하고, 이웃끼리의 정과 인심을 나누며 즐기는 명절입니다. 그리고 정월대보름은 귀밝이술을 나누고, 오곡밥과 부럼으로 한 해의 재앙과 액을 막는 제일입니다. 이런 민족 대명절에는 경제적 약자들이 더 실의가 큽니다.

도시에 사는 소외계층도 문제지만 농어민의 시름은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합니다. 지난해 태풍으로 과일을 비롯한 채소 등 농작물 작황이 부진한데다, 오랫동안 지속된 한파로 양식어류가 떼죽음을 당하는 경제적 손실에 아연실색에 빠져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설이나 대보름과 같은 민족 대명절이 다가온들 무슨 즐거움이 있겠습니까. 이들은 경제적 어려움과 정신적 고충까지 더해 명절이 달가울 리 만무입니다.

도시민도 마찬가기입니다. 턱없이 오른 물가고에 차례상을 준비하는 고충 또한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먹을거리 폭등으로 서민들은 그저 울상입니다. 돼지고기, 닭고기, 채소, 생선 등 오르지 않은 게 없습니다. 전기요금, 수도요금, 교통 등 공공요금까지 올랐습니다.

특히 소외가정이나 편부모 가정에서 외로움을 겪고 있는 어린이들, 들뜬 명절 분위기 보다 당장 추위 걱정부터 해야 하는 빈곤층과 노숙자들, 미래가 불투명한 독거노인들···. 그들에게 민족의 대명절과 휴식의 계절인 겨울은 어떤 의미일까요.

다시 꾸는 꿈

우리의 행복은 또 제 몸 하나 의지할 곳 없는 독거노인, 소년소녀 가장, 실직자, 가난에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 낯선 한국 땅에서 외롭게 머물고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의 눈물을 밟으며 누리는 것이 아닌지요. 보리를 밟으며 생각해봅니다. 평등한 사회를 이뤄내기 위해서는 이들에게도 ‘지금은 눈을 덮고 있는 보리’같지만 곧 튼실한 열매를 맺을 거라고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2월 25일 취임식을 갖았습니다. 대통령은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도약하려면 무엇보다 ‘신뢰’가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가진 자 못 가진 자가 서로 신뢰하며 ‘희망의 싹’을 틔우려면 국민 대다수가 동의할 수 있는 공정한 룰을 만들고, 그에 따른 공정한 게임이 진행되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공정한 룰이 새 정부의 인사에서부터 정책, 재원 배분에 이르기까지 두루 적용되면 더할 나위 없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지난 대선의 최대 화두였던 경제민주화와 복지 문제도 어떻게 보면 극심해진 우리 사회의 양극화 완화와 대기업-중소기업 상생 등을 통해 ‘승자 독식’에서 ‘공존’으로 패러다임을 전환해야 한다는 절박함의 표출이었습니다. 공정한 룰과 공정한 게임이야말로 신뢰 사회로 가는 지름길이 아닐까 합니다.

새 대통령이 국민에게 줄 수 있는 가장 큰 봄 선물은 가슴에 남아있는 응어리를 없애주고 도전할 수 있는 희망과 용기를 심어주는 일일 것입니다.

대동문화 75호 [2013 3.4월호]

남성숙 광주매일신문 주필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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