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은 북미 주요 도시에서 공개되어 흥행 열기를 이어나갔다.

한국영화를 지금과 같은 파이로 키운 영화의 시작은 <쉬리>다. 이후로 덩치 큰 한국영화들의 시도가 수십 차례 있었고, 지금도 성공과 실패를 오가며 규모의 경제학으로서의 영화 산업은 계속되고 있다.

<쉬리>로 블록버스터로서의 한국 영화의 포문을 열었던 강제규 감독은, 이후 <태극기 휘날리며>로 천만 관객 시대를 재차 열며, 한국의 대표적인 흥행 감독이 되었다. 사단은, 시간과 공을 들여 준비했던 <마이웨이>가 투자된 자본에 비해 턱없이 부족한 수입을 벌어들여 강제규 감독을 몰락케 했다는 것이다.

첩보 액션 블록버스터, 누가 반면교사인가?

이렇게 오늘의 이야기를 강제규 감독으로 시작한 것은 이유가 있다. <베를린>의 류승완 감독이 강제규 감독을 반면교사 삼아 <베를린>을 연출한 것은 아닐까하고 미루어 짐작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강제규 감독의 전매특허였던 남과 북의 소재를 끌어온 것도 그렇고, 대자본의 <마이웨이>가 무너지는 것을 보며, 100억이 넘는 영화를 한다는 데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을 느꼈을 법도 하기 때문이다. <베를린>은 류승완 감독이 처음으로 손대는 블록버스터인 것이다.

그렇다. <베를린>은 <마이웨이>가 실패했던 교훈을 충분히 검토했을 만하다. <베를린>이 크랭크인을 준비하고 있을 무렵에 개봉했던, <마이웨이>의 가장 큰 문제는 낡은 영화였다는 점이다. 관객들은 동시대적이지 않은 영화에 싫증을 내며, 막판에 애국심까지를 홍보 수단으로 삼았던 영화에 냉정했던 것이다. 그런 점에서 <베를린>은 관객들의 변화하는 영화 취향을 반영하고자 노력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영화가 시작하고 1시간 동안 관객들은 정신없이 영화의 내용을 꿰어 맞추어야 하는 수고스러움을 감내해야 한다. 남과 북의 요원들, 미국의 CIA와 이스라엘의 첩보 기관, 여기에다 아랍의 테러리스트와 러시아 무기 브로커까지 가세해서 전개되는 이야기는 단순하지가 않다. 이는 관객들을 영화에 능동적으로 참여시키고자 하는 의지의 반영이다. 물론 영화 좀 본다는 관객들은 이런 식의 내러티브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 현 시대의 흐름이다.

영화의 내용 역시 과거의 유산을 버리고자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스릴과 흥미 넘치는 화제작 베를린은 액션 영화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해나가려는 감독의 의도가 흐르고 있다.

성공하려면 과거 유산은 버려라

남한의 국정원 요원 정진수(한석규)와 북한의 비밀 감찰요원인 표종성(하정우)이 대립하는 구도로 출발하긴 하지만, <쉬리>처럼 남과 북이 각각의 이데올로기에 묶여 서로에게 총을 겨누지 않으며, 분단 현실의 비극을 일깨워주고 우리는 한민족이니까 뭉쳐야 한다는 민족애를 고취시키려는 영화도 아닌 것이다. 그러니까 <베를린>은 강제규 감독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분단국가라는 특수성을 취하기는 하되, 국제 정세와 신자유주의의 축소판이라 할 만한 이야기를 상상력을 동원해 펼쳐 보이고 있는 것이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이후, 1991년 7월 통일 독일의 수도로 결정된 베를린은, 이제 한 시대를 광풍에 몰아넣었던 좌우 이데올로기는 자취를 감췄고, 대신 전 지구적인 인종들이 한데 섞여 서로가 속고 속이는 비정한 인간의 도시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이렇게 말해놓고 보니, <베를린>이 거대한 국제적 암투가 숨겨진 이야기처럼 생각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정작 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북한의 비밀 감찰 요원인 표종성이 반역자로 몰린 아내 련정희(전지현)를 지키기 위해 악전고투하는 내용이라고 말하는 것이 솔직할 것이다. 그러니까 <베를린>은 한 남자가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온몸을 바치는 멜로드라마인 것이다.

온몸을 바친다고? 그렇다. <베를린>은 영화의 처음부터 끝까지 몸이 부서지도록 구르거나 추락하고, 매달리거나 부딪히며, 그리하여 깨지고 피가 터지는 육체를 전시하며 관객들에게 고통이 전달되도록 하는 아날로그 액션을 표방하는 것이다.

따지고 보면, <베를린>은 무대를 해외로 옮겼을 뿐이지, 류승완 감독의 트레이드마크인 몸과 몸이 부딪히는 온몸 액션의 퍼레이드인 셈이다.

액션을 위한, 액션에 의한 영화

이 영화에서 단연 돋보이는 액션신은, 표종성과 련정희가 그들의 집을 포위한 북한 감찰요원들과 일전을 벌이다, 마침내는 고층에서 떨어져 내리며 유리로 된 지붕을 산산조각 내는 추락 액션 장면일 것이다. 이 액션 안무는 감독이 마음먹고 도전한 액션신의 정수라 할 만하다. 이 액션신에서 눈여겨 볼 것은 유리지붕이라는 지형지물인데, 돌이켜 보면 주변의 사물들을 활용한 액션 안무는, 류승완 감독이 성룡 영화를 보고 자라며, 성룡 영화로부터 배운 액션 아이디어다.

표정성이 납치된 아내 련정희가 타고 있는 엘리베이터를 따라잡기 위해 원형 계단의 난간을 한 손으로 짚고 한 층 한 층 점프하다시피 추격하는 액션도 그런 경우이며, 표종성과 동명수(류승범)가 아파트 내부에서 거실과 욕실을 넘나들며 싸우는 신에서, 주변에서 무기가 될 수 있는 것들인 냉장고 안의 캔, 거실의 전화선, 책상 위의 호치키스 등을 활용한 것도 성룡 영화의 유산일 것이다. 또한 표종성이 납치된 아내를 구하기 위해 달리는 차량에 들러붙어 매달려가는 액션의 컨셉 역시 그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성룡 영화의 액션 아이디어를 영화 속에 녹여 내는 것은 물론이고, <베를린>은 영화 전편의 이야기가 액션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다.

이 영화가 관객들에게 각광을 받은 이유가 여럿 있겠지만, 고통을 찬미하는 액션을 선보이며 관객들에게 통증이 느껴지도록 했던 것이 큰 호응을 받은 직접적인 요인일 것이다.

정리하자면, <베를린>은 분단국가의 특수성을 활용하여 베를린이라는 도시에서 펼쳐내는 류승완 식 아날로그 액션의 종합 선물 세트다.

대동문화 75호 [2013 3.4월호]

조대영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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