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 대인동 인삼당 한약방 2층에 동방문화연구소가 있다. 세 평 남짓한 이 허름한 방이 소설 쓰고 시 쓰는 이명한 작가의 거처다. 주인장의 성품 그대로, 낡은 서가에 책들이 두서없이 꽂혀 있고 널빤지 책상 위에는 쓰다만 원고 나부랭이가 낭자하고 손님맞이 탁자에는 싸구려 바둑판이 부려져 있다. 그 을씨년스런 풍경을 촉수 낮은 전구가 희부염히 비추고 있다.

“어이구, 귀한 손님들이 오셨네 그려!”

작가는 예의 헤벌쭘한 황소웃음을 들이대며 반갑게 젊은 벗들을 맞이한다. 젊은 오빠 한송주, 이쁜 누이 한경숙, 씩씩한 청년 김상훈이 일행이다.

“전 번 시집 내신 거 다시 한 번 감축 드립니다, 이.”

“에 이 사람, 새삼스럽게 뭔 감축까지 허허, 어쩌다가 동네 우세 해부렀구만.”

원로 소설가 이명한 선생이 시 100여 편을 묶어 첫시집 <새벽 벽두 정상에서>를 펴냈다.

새벽, 백두산처럼 용자가 녀볏하구먼

작가는 지난해 7월 시집 <새벽, 백두정상에서>를 펴내 정정한 기백을 휘날렸다. 평생 소설만 써온 작가가 팔순을 넘겨 통통한 시집을 생산한 여력도 놀랍지만 그 늦둥이의 용자가 아주 탐드고 너볏해 제방문원에 큰 경책을 울렸다.

시 이야기 도중에, 시집 발문을 쓴 김준태 시인이 절편이라고 추천한 ‘주막집 삽화’에 이르러 기어이 모 술꾼이 입을 다셨다.

가락 없는 주막에서 젓가락 장단

해당화 붉은 마당 봄바람에 젖는다

이별을 노래하면 뻐꾸기 울고

보리이삭 출렁이는 소만의 들녘

막걸리 한 사발에 물드는 여인

껴안고 울다 보니 지는 초승달

좋지 아니한가! 군침 돌지 아니한가!

“말 나온 김에 우리 주막으로 옮겨서 이야기를 하지.” 참 눈치 빠르고 고마우신 우리 선생니~임!!

그래서 우리는 대인시장 안 담양집으로 직행해 본격적인 판을 벌였다.

이명한 선생을 대하면 우선 편안하다. 넉넉한 부사리 웃음으로 젊은 놈들의 객기를 늘상 가려주고 품어준다.

그의 이 포옹은 잔정에 그치지 않고 웅숭깊은 겨레 사랑에까지 넌출하게 뻗어있다. 결국 이웃 잔정이 겨레 사랑이고 중생 인연일진저.

그의 무연자비를 마침가락으로 피워낸 시가 바로 ‘만남’이다.

길을 가다가 문득 만난 아이의 손을 잡고 울었다

간 밤의 꿈 속에서 만난 아이

우리 사이에는 다스한 핏줄이 이렇게 흐르는데

세월에 가린 인연의 강물은 안개가 서려 보이지 않는다

선생의 순정은 자연히 열렬한 사회운동으로 달구어지는데 1980년대 민족작가회의를 이끌면서 절정을 이룬다. 이후 광주민예총회장, 한국문학평화포럼, 6.15공동위원회 등에 참여하면서 시대에 굵은 발자욱을 새긴다.

필자는 시절 틈틈이 선생의 동태를 살필 기회가 있었다. 그 섬섬한 사연들이야 지정무문(至情無文) 극진하여 일일이 실타래 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대신 어느덧 팔순을 넘긴 노안을 지그시 살피며 참 좀스런 타진을 한다.

“아호가 있으시던가요?”

역사에서 훼절의 역사는 장구합니다. 지조를 잃지 않고 청청하게 늙어간다는 게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잉걸불처럼 괄괄한 그의 얼혼이라

그가 10여 차례 중국 대륙을 횡단하며 이백과 두보의 자취를 더듬었던 여정에 실은 질문이다.

“아호? 나 그런 거 안 쓰네. 영감탱이 냄새가 나서.”

“그럼 청년 이명한이라고 불러 달라, 이 말이요?”

“그래그래 그게 좋으이. 허허허”

아, 잉걸처럼 괄괄한 그의 얼혼!

- 요즘 일부 민주인사들의 훼절을 두고 세상에서 말이 많습니다. 노장 입장에서 늙마 훼절에 대해 어떻게 느끼시나요.

“참 가슴 아픈 일이제. 곱게 늙기가 그렇게 힘들까 싶어 나 스스로도 섬찟해져요. 나름대로 사연이 있겠지만 국민들의 실망이 얼마나 클까 생각하면 같이 움직였던 사람 입장에서 부끄럽고 미안한 마음이 들어요.”

-정치하는 이들이야 제쳐두고 독재 정권에 가열차게 항거했던 김지하 시인의 변화를 두고 대중의 질책이 매섭던데요.

“그 이에 대해 잘은 모르지만 개인적으로 상(相)이 센 편이라는 느낌을 받았어요. 용기 있고 지혜롭지만 드러내기를 좋아하고 늘 홀로 앞서가려 한다고 할까. 애써 쌓은 공덕을 스스로 허물고 역사를 오욕되게 한 것은 뭐라고 변명해도 매우 잘못된 일이지. 정신적으로 많이 피폐해졌다고 할 수밖에.”

-당대에 판단할 일이 아니라 후대 역사에 평가를 맡기자는 주장도 있는 걸로 아는데….

“이런 일이 있으면 꼭 평가를 유보하자는 사람들이 나오지요. 그럴 듯해 보이지만 올바른 태도가 아닙니다. 역사는 당대 역사이며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또 별개의 것이지요. 그렇게 호도하고 유보하고 해서야 그 누가 시대 문제에 치열하게 대처하려 하겠어요. 가치관을 흐리게 하려는 불순 세력들이 논리일 뿐입니다.”

시대 문제에 치열하게 대처해야 한다

-그렇지만 실제로 어떤 사람의 지향이 바뀔 수도 있고 또 사람마다 단점이 있을 수도 있어서 객관적인 평가를 내리기에는 저어되는 점도 있을 법한데….

“물론 그렇지. 그러니 있는 그대로 행동으로 보여준 그대로 사회와 국가에 영항을 끼친 그대로, 사실에 입각해 냉정하게 평가를 해야지요. 말하자면 앞에 든 이를 예로 들자면 그 이는 젊었을 때는 민주화에 혁혁한 공을 세웠지만 뒤에 가서 변절된 행동으로 국민의 비판을 샀다 하고 사실대로 기록하면 됩니다. 한 사람의 인생을 뭉뚱그려서 백점 만점에 몇 점이라고 일괄 평가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지요. 과목 따라 개별 점수를 매겨야 정당합니다. <사기(史記)>를 쓴 사마천의 필법이 바로 그거 아닙니까.

과거에서 살피자면 ‘시일야방성대곡(是日夜放聲大哭)’을 써서 조선 백성의 심금을 울린 장지연 선생도 그 붓끝이 마르기 전에 친일파로 변모해 매국을 했던 사례가 있지요. 훼절의 역사는 장구합니다. 지조를 잃지 않고 청청하게 늙어간다는 게 정말 어렵다는 생각을 요즘 많이 합니다.”

-선생님 개인적으로 올곧게 잘 늙으신 분으로 어떤 분을 꼽을 수 있습니까.

“여러 분이 있지만, 제가 겪어본 바로는 함세웅 신부님이 용기 있고 깨끗하게 살다 가신 분 같아요.”

-“청년 이명한은 어떤 평가를 받을 것 같나요?”

“워매, 뜨거워라. 나 같은 촌놈이야 평가 대상도 아니제 잉. 그나저나 후배들 부끄럽지 않게 늙어갈라고 노력은 헌디 그게 잘 될랑가 몰라. 잘 좀 이끌어 줘.”

대동문화 75호 [2013 3.4월호]

한송주 전 전남매일 논설실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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