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의 가을은 진정한 중국 국적 작가로서 노벨문학상을 받은 모옌의 계절이었다. 해마다 고은 시인의 수상을 점쳐보며 가슴이 두근 반 서근 반 하던 행복한 흥분도 어쩐 일인지 시들해져 버렸다. 국민을 부추기던 언론의 호들갑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른다.

온라인 서점에서 몇 년 동안 한국작가가 노벨문학상을 받는다면? 하는 설문조사에 <만인보>의 시인 고은을 열나게 추천했는데, 2012년에는 그런 설문도 사라지고 없었다. 세계 어느 누구도 만 사람의 이야기를 시로 쓴 시인은 없었다. 얼마나 독창적이고 해학적이며 탁월한 시이던가. 2013년을 기대해볼 수밖에 없다. 혹자는 국력을 탓하고 번역을 가지고 시시비비한다.

붉은 수수밭은 중국 민중의 저항성 상징

모옌 정도의 필력이고 역사 인식이라면 조정래의 <태백산맥>은 <홍 까오량 가족>을 능가하고도 남는다.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로 세계인에게 인식되어 영화 덕을 혹시 보았다면 우리라고 못할 바도 아니다. 우리의 영화 산업이 작가주의로 나가면서 한국 영화의 우수성이 세계인에게 각인되어 있지 않은가.

“홍 까오량 가족(紅高梁)은 내가 처음으로 창작한 장편소설이고, 내게 가장 영향력을 끼친 소설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모옌(莫言)을 언급하는 순간, 왕왕 대표작이 <홍 까오량>인 작가라고들 하는데, 그 많은 사람들은 모옌을 누군지 알지 못하지만, ‘붉은 수수밭’이라는 영화를 모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고 모옌은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모옌은 산둥성 까오미 따란향 핑안춘에서 태어났다. 모옌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수수밭이 일망무제로 펼쳐진 고향으로 내려가 소설을 썼다고 했다. 고향의 ‘붉은 수수밭’은 모태의 근원이자 상상력의 곳간이기도 하다.

모옌을 가리켜 중국의 사회적인 문제점에 대해서 발언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작가는 오직 사람에게만 관심이 많다고 발언한다. 인간의 삶이야말로 문학의 본질에 닿아 있는 것이다. 대사회적인 발언을 작품을 통해서 말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것을 찾는 것은 독자의 몫이 아닐까.

이 소설의 무대는 1939년이다. 다섯 편의 단편 소설을 연작 형식으로 써서 장편소설이 되었다. 홍 까오량 가족의 3대의 이야기이며 시공을 초월하여 과거와 현재의 시점이 중첩된 소설이기 때문에, 읽는 동안 혼란스럽기도 하고 산만하다는 느낌을 독자들이 가질 수도 있다.

1920년대 중반부터 1940년대 초반까지의 중국 산둥 성 까오미 현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일본군이 주둔하고 있는 까오미 현은 온갖 착취와 부역 등 일제의 만행에 시달리고 있는데, 서서히 대오를 정비하며 일본군에 맞서는 중국 민초들의 모습이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쟝이모 감독의‘붉은 수수밭’영화로 제작된 이 소설은 중국의 한 마을에서 일어난 항일사를 다루고 있다.

붉은 수수밭은 모옌이 ‘한국어판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모종의 상징적인 의미를 구비하고 있는데, 그 상징이란 바로 민족정신을 말한다.” 중국 민초들의 항일 민족정신과 저항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때로 거친 문장이나 무협지적인 황당함, 분명 우리와는 다른 자연환경, 풍속들이 낯설기도 했으나 대륙이라는 장대함을 느낄 수 있어 이국 풍정을 맛볼 수도 있었다.

나와 나의 아버지가 들려주는 홍 까오량 가족사

중국이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는 서정적인 문장, 묘사들은 참으로 음미해 볼 만했다. 예를 들면 ‘달빛에 잠긴 수수 이삭들은 마치 방금 수은 속에 담겼다 꺼내진 듯 반짝반짝 빛을 발산했는데, 아버지는 잘린 달빛의 그림자 아래에서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하고 비릿한 단내를 맡고 있었습니다.’라든지, ‘아버지는 불현듯 수수들이 영혼을 가진 것처럼 생생하게 살아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흑토에 뿌리를 박은 채, 해와 달의 정기를 받으면서, 비와 이슬이 내려주는 물을 마시면서 자라났으니, 위로는 하늘의 이치를 알고 아래로는 땅의 이치를 알고 있었답니다.’ 또는 ‘짙은 안개를 뚫은 총알이 수수 잎사귀와 수숫대를 지나친 후 수수 이삭 하나가 땅에 떨어지는 소리….” 등등의 구절은 모옌의 고향에 펼쳐진 ‘붉은 수수밭’의 서정을 눈앞에 그리듯이 재현하고도 남는다.

일제강점기는 중국에도 많은 상흔을 남겼다. 삶의 터전인 고향을 지키기 위해 마을 인민들은 무장하고 봉기하며 전쟁의 한가운데 던져진다. 중국의 어느 한 고장에서 펼쳐진 항일 투쟁, 민족 봉기, 전쟁의 양상을 재현한 소설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고량주를 만드는 양조장을 중심으로 ‘나’의 할아버지는 어떻게 결혼하였으며 나의 아버지는 어떻게 가문을 지켰으며 나는 어떻게 그 모든 것을 듣고 보았는지, 일본군과의 싸움에서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처절하게 죽어갔는지를 생동감 넘치게 보여주고 있다. 그래서 독자는 읽는 내내 피비린내를 맡을 수밖에 없다.

이 소설은 전쟁 속의 잔인과 야만의 극치를 접하면서 인간에게 회의하지 않을 수 없게 했다. 맹자의 성악설에 동조하게 하고 정의, 양심, 도덕은 있는 것인지, 왜 역사는 후퇴하는 것인지, 절망하게 만들었다. 소설이 허구라고는 하지만, 사실에 바탕하고 진실에 근접하지 않고서 어찌 소설일 수 있겠는가.

역사의 뒤안길에서 다시 살펴보는 일본 역사 왜곡

일본은 지금도 엄연했던 역사적인 사실들을 부인하고 있다. 남경대학살의 참상도 기록이 남아 있고, 그때의 처참한 사진들은 30만 명을 학살했다고 무언의 증언을 하고 있는 데도 말이다. 대동아 전쟁에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꽃같이 피어나는 소녀들을 위안부로 끌고 갔는데도 그들은 지금도 그 역사적 사실이 진실이 아니라고 억지로 부인하고 있다. 마치 애국심으로 자발적이었던 듯 위증하고 사과나 보상은커녕 인격적으로 모독까지 하고 있다.

당시 총리였던 기시 노부스케의 손자인 아베가 총리가 되어 일본은 최근 급격하게 우경화의 길로 내달리고 있다. 참으로 우려스러운 일이며 일본에 대해 겁(?)이 없는 우리의 인식도 걱정스럽기는 마찬가지이다.

모옌의 이 소설 한 권만 읽는다 해도 희미해진 역사의 뒤안길에서 정면으로 나설 수 있을 것이다.

대동문화 75호 [2013 3.4월호]

문향선 수필가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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