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공간부터 1953년 한국전쟁 휴전까지 한국군과 미군에 의해서 저질러진 양민 학살은 거창, 산청, 노근리, 함평 등 이 나라 곳곳에서 발생했다. 이때 양민 학살의 명분은 반역자의 처벌 혹은 빨치산의 토벌이었다. 이 과정에서 죽어간 사람들은 이념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이 땅의 민초들이 대부분이었다. 국가 권력에 의한 무고한 민중들의 죽음은 1980년의 ‘오월 광주’ 또한 예외가 아니라는 점에서, 한국 현대사는 자국민 학살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65년 동안 봉인되었던 역사가 열리다

해방 이후 최대의 양민 학살은 1948년에 있었던 4.3항쟁이다. 당시 제주도 인구 약 3만 명 중 약 3천 명이 죽임을 당한 집단 학살의 시작은, 1947년 3·1절 기념식으로부터 시작한다. 해방 이후 일본군에 부역했던 친일파들이 다시 군정 경찰이 되었고, 이것에 분개한 제주도민들의 거센 항의가 있었는데, 이 과정에서 민간인 6명을 죽인 것이 4·3항쟁의 도화선이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남로당 제주지부가 개입하면서 노골적인 좌, 우의 대립으로 사태는 격화되었고, 미군을 등에 업은 서북 청년단 등의 잔인무도한 색출 작업으로 2500여 명의 제주도민이 고문을 당하거나 투옥 되었다.

이에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의 무장대 350여 명도 무장 투쟁으로 방향을 바꾸어 ‘경찰 탄압에 대한 항쟁’, ‘단독 선거·단독 정부 반대’, ‘조국의 통일 독립과 민족 해방’을 기치로 한 봉기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일제 소총 10자루만을 가지고 주도한 결의는 철없는 행동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몰락은 물론 제주도민들의 희생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이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제주도 문제를 자신의 정권 정통성의 도전으로 여겨 계엄령을 선포하고 그해 11월까지 제주도 전역을 쑥대밭으로 만든다. 물론 미군의 지원을 업고 한 일이었으며 친일 부역자들의 협심이 더해졌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요약하자면, 4.3항쟁은 제주도민들의 새로운 세상에 대한 갈망이 미군정을 등에 업은 이승만과 친일 잔재 세력이 야합한 의도적인 민간인 학살이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크나큰 양민 학살인 4.3항쟁이 한 세대가 흐르도록 누구의 입에서도 함부로 말해지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이승만 정부에서는 말해질 리 만무였을 것이고, 반공이 국시였던 박정희 정부 역시 입막음을 철저하게 했던 것이다.

춘자의 웃음 상표의 달리기 만철이의 사랑이 멈추던 날, 운명은 역사가 되었다. 제주도는, 그리고 한국에는 이런 영화가 필요했다.

살인귀와 제사 도구 어우러진 첫 장면 인상적

4.3항쟁 이야기의 금기를 깨뜨린 것은 소설가 현기영이었다. 1978년 <순이 삼촌>을 통해서였다. 1987년 민주화 이후에는 <잠들지 않는 남도>와 같은 4.3항쟁을 기록한 저서가 출판되기도 했고, 1992년 화가 강요배는 <동백꽃 지다> 전시회를 통해 당시의 참혹함을 그림으로 표현하기도 했다. 영상 매체를 통해 4.3항쟁을 알려내려는 시도 역시 계속되었다.

<다랑쉬굴의 슬픈 노래>(1992), <잠들 수 없는 함성 4·3항쟁>(1995), <레드 헌트>(1997) 등의 다큐멘터리가 그 작업들이다. 아쉬운 것은 이 결과물들이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 <지슬>이 도착했다.

제주도에서 나고 자란 오멸 감독은 4.3항쟁이 공기와도 같았을 것이다. 한 마을에서 한 날 한 시에 제사가 지내지는 것을 오랜 동안 지켜보았을 것이고, 제주 사람들에게서 은연중에 전해지는 트라우마를 경험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지슬>은 이미 제주도의 중, 산간 마을이 거의 초토화된 1948년 11월로 돌아가, 당시 제주섬 안덕면 동광리 근처에 있던 주민들이, 미군정의 소개령을 피해 속칭 ‘큰넓궤’ 동굴에 숨어든 이야기를 중심에 놓고 극화한 것이다.

<지슬>은 상부의 지시를 받고 폭도들을 잡아야 하는 군인들의 일상과 군인들을 피해 동굴로 숨어든 마을 사람들을 교차로 오가며 전개되는 이야기 형식을 취한다. 이들을 연결시키는 것은 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지슬’인데, ‘지슬’은 감자의 제주도말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제시되는 롱 테이크(커트 없이 길게 보여주는 화면)는 의미심장하다. 연기 자욱한 집안으로 이동해 들어간 카메라는 방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제기를 비추고 이어서 군인들이 사과를 칼질해 먹는 장면까지를 보여준다. 이는 제사를 지내는 도구와 살인귀가 되어있는 군인들을 함께 담아내면서 전체 영화를 함축해 내는 것이다.

제주 4.3 항쟁과 양민의 한 그린 역작

<지슬>은 포로로 잡히는 순덕과 만철이라는 두 인물을 두어 극적인 긴장을 강화시킨다. 군인들에게 겁탈을 당하는 순덕과 살려고 발버둠치다 비밀을 발설하게 되는 만철을 통해서 비극을 극대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오멸 감독은 영화 속에 등장하는 군인들이나 민간인들 모두가 피해자라는 인식을 분명히 한다. 자신들이 죄 없는 민간인을 죽이고 있음을 깨닫고 있는 군인을 등장시키고 있고, 상관의 명령에 복종해야 하는 체제에서 살인귀가 된 군인 역시 피해자이긴 마찬가지다.

여기에다 마을 주민들의 면면은 이데올로기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들로서, 오순도순 모여 살며 자신의 가족과 친지들의 안위를 걱정하는 평범한 촌부들이었다는 점에서, 제주도민의 수많은 죽음은 억울하기 그지없는 것이 된다.

하여 <지슬>은 영화 전체가 제사의 형식을 빌려 총 네 개의 소제목을 영화 중간 중간에 아로 새긴다. 신위(神位: 영혼을 모셔 앉힌다), 신묘(神廟: 영혼이 머무는 곳), 음복(飮福: 귀신이 남긴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 소지(燒紙: 지방을 태우며 염원을 드린다)가 그것이다.

영화의 내용과는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제사 용어를 써서라도 4·3항쟁의 무고한 희생자들의 넋을 위로하고자 했던 것이다. 영화의 말미에 지방을 태우는 의식까지를 보탬으로써 <지슬>은 4·3 항쟁에 대한 ‘영화 씻김굿’임을 자처한다.

대동문화 76호 [2013 5.6월호]

조대영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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