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애다원의 봄 풍경. 무등명차 춘설이 생산되는 다원이다.

의재 허백련 선생의 춘설헌(春雪軒)과 춘설차(春雪茶)가 나는 삼애다원(三愛茶園)은 무등산의 대표적인 차 문화유적이다. 녹차의 생산과 보급에 주력한 한국제다(韓國製茶)의 고 서양원(徐洋元) 선생과 작설헌(雀舌軒)도 무등산이 기른 차의 지란(芝蘭)이라고 할 수 있다. 시인 김현승도 <무등차>에서 ‘가을은 술 보다 차 끓이기 좋은 시절’이라고 했다. 그 뒤에도 무등산과 광주의 차인들은 녹차의 현대적 계승이라는 차문화 역사에 수많은 물길을 댔다.

국립공원 무등산 세계의 산이 되다

해발 1,187m의 무등산. 광주의 어머니산 무등산. 서석, 입석, 규봉의 우뚝 세워진 돌기둥인 주상절리대는 세계자연유산 등재가 추진되고 있다. 그 무등산이 2012년 12월 27일 21번째 국립공원이 되면서 이제 세계의 무등산이 되었다.

무궁무진한 이야기의 보고이자 역사의 산실인 무등산에 ‘차 이야기’가 없을쏘냐. 광주를 빛나게 충절의 표상 제봉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선생도 무등산의 ‘차 이야기’에서 빠뜨릴 수 없는 인물이다. 제봉 선생의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峯) 또는 태헌(苔軒)이며 광주에서 출생했으며,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순절했다.

무등산은 제봉 고경명(霽峯 高敬命) 선생의 무등산 기행기인 <유서석록(遊瑞石錄)>은 제봉이 41세 되던 해 1574년(선조 7년) 음력 4월 20일부터 24일까지 5일 간 당시 74세의 광주목사 임훈(林薰) 일행과 함께 무등산에 올라 그 감상을 약 4,800자의 순 한문으로 기술한 기행문이다. 440년 전의 무등산의 풍광이 눈에 그려지듯이 펼쳐진다.

세계의 무등산을 아름답게 가꿔나가고 스토리텔링의 보고로 만들어나가야 한다. 제봉 고경명 선생의 차 이야기도 깃들어있다.

차를 마시고 길을 떠나 무등산에 오른다

이 <유서석록>의 기록에도 제봉 선생이 차를 즐겼음을 알 수 있는 증거가 있다. 산행 첫날 증각사(證覺寺)에서 중령(中嶺)으로 가는 일정에도 차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중령은 지금의 중머리재이다.

차를 마시고 길을 떠나 이정(梨亭)을 거쳐 중령(中嶺)으로 올라간다. 깎아 세운 듯한 가파른 길은 하늘에 닿을 듯하여 사람들은 마치 물고기를 꿰미에 꿰어놓은 듯도 하고, 꿰미가 줄지어 서로 붙들고 개미 기어가는 듯하였는데 한자를 올라가면 한 길쯤 뒤로 물러난다. (…)중머리재에서 산길을 따라 왼쪽으로 돌아서니 밀림이 우거져서 구름과 햇살을 볼 수가 없고 높고 험한 등성이는 허공에 걸쳐 있어 다만 새가 빠르게 날 때 푸른 이끼가 나부낄 뿐이었다. 지팡이에 의지하고 노래를 읊조리며 오르노라니 잠시나마 등산의 힘겨움을 잊게 해준다.

산행을 하면서 차를 마실 정도의 차인이었다. 물론 등산의 즐거움 중에 빼놓을 수 없는 ‘정상주’의 풍미도 만끽했다.

상봉에는 가장 높은 봉우리가 셋이 있는데 동쪽이 천왕봉(天王峯)이며, 가운데 것을 비로봉(毘盧峯, 地王峯)이라 한다. (…) 상봉은 평지로부터 겨우 일유순(一由旬) 정도 떨어져 있으니 기후의 다름이 이와 같다. 반야봉의 서쪽은 지면이 평탄하고 넓지만 봉우리는 뚝 끊어져서 천 척(尺)의 절벽은 아래로 끝이 없고 멀리 바라보이는 큰 나무 끝은 냉이처럼 조그맣게 보이니 참으로 진남산(眞南山)의 시에 있는 이른바 ‘삼황타포소(杉篁咤蒲蘇)󰡑라는 구절이 이것인가 싶다. 낭떠러지 위 언저리에 둘러앉아 술잔을 서로 기울이다 보니 과연 우화등선(羽化登仙)하는 기분이다.

무등산의 아름다움에 대해 제봉 선생은 ‘옛사람이 말하기를 승처상심자애(勝處傷心自哀)라 하여 경치 좋은 곳에 오니 마음이 저절로 슬퍼진다고 하던 말이 수긍이 간다.’고 적었다. 무등산에 올라 산과 산이 그려놓은 풍경과 산에 엎드린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저절로 슬퍼진다.’

산에 밤비가 내려 처마에 떨어지는 소리 나니 꿈자리 어지럽다.

골목 안 이끼 낀 문이 있는 집은 가난하네.

오늘 아침 갑작스레 편지 전하는 사람이 와서

강남의 목마름병자가 놀라 일어났다고 전하네.

찻사발 새로 씻어 끓이니, 찬란한 구름 속의 용이 나는 듯하고

잠 깨어 일어나니 남쪽 창에 비 내리고

그대의 시는 읊을수록 깊은 맛이 잇어

자색의 진귀한 차를 수없이 달인다네.

- <봉차우진사탁기증운(奉次禹進士鐸寄贈韻)> -

술 때문에 생긴 병 의사 말을 듣고

서둘러 술잔 치워버리고 참 많이 후회했네

솔바람에 베개 베고 낮잠 이루니

찻사발에 유화 떠 흰 물결을 이루네

- <병중(病中)> -

술 때문에 생긴 병을 햇차를 달여 마시며 지내며 잊는 경지다. 선의 경지에서 차를 사랑했음을 알 수 있다.

무등산이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선계의 경지에서 차를 사랑한 선비 정신

제봉 선생은 1552년(명종 7년) 19세에 진사가 되고 1558년(명종 13년)에 식년(式年) 문과에 장원급제하고 호조좌랑, 성균관전적, 사간원정언을 거쳐 호당에 들었다. 1563년(명종 18년) 울산군수로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와 한가로이 지냈는데 이때 <유서석록>을 썼다. 1581년 영암군수를 거쳐 서산군수로 있을 때 변무사 김계휘의 서장관으로 연경에 다녀왔으며 그 뒤에도 명나라 사신이 왔을 때 영접사인 율곡 이이의 종사관으로 활약하여 탁월한 공을 세워 광국원종에 훈록되었다.

1590년 송강 정철의 천거로 승문원판교가 되었다가 동래부사로 갔었는데 정사의 처리가 공정하고 분명하여 이름이 높았으나 서인이 제거되자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60세의 노구에도 불구하고 아들 종후(從厚), 인후(因厚)와 더불어 3부자가 담양에서 7천여 명의 의병을 규합하여 선조의 행궁(行宮)이 있던 의주를 향해 북으로 올라갔다.

포충사. 고경명 의병장과 고종후, 고인후 삼부자 그리고 유팽노 안영 등 5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사액 서원이다.

경치 좋은 곳에 오면 마음이 처연하다

진군하던 중 여산에 당도하자 마침 적이 금산에 들어왔다는 전갈이었다. 의병진은 관군과 합세하여 선두에서 금산의 적을 공격하여 처음에는 큰 전과를 올렸으나 중과부적으로 패한다. 차남 인후와 장수 안영, 유팽로, 김덕홍 등과 장렬하게 순국했다. 뒤에 제봉 선생의 큰아들 종후도 ‘복수 의병장’이 되어 진주성을 방어하다 순절했다. 일가족 3부자가 장렬하게 목숨을 던졌다.

광주의 포충사가 있는 제봉산에서 동쪽 끝으로 바라보는 무등산은 새가 날개를 펴고 날아오르는 모습처럼 보인다. 어깨가 넉넉하다. 그 아래 사는 광주 사람들의 마음을 다독이고 살과 뼈를 길렀다. 그래서 광주는 무등(無等)이다. 무등산과 광주 사람들의 그 마음은 아름다워 때로 처연하다.

제봉 선생은 이렇게 말했다. ‘언제나 움직이지 않고 의연한 것은 산이며 모였다가도 흩어지기 쉬운 것은 인간이다. 참으로 산은 우리 인간에게 말없는 교훈을 준다.’ 그 교훈 속에는 향기로운 ‘차 이야기’도 남아 오늘의 우리에게 말없는 교훈을 준다.

대동문화 76호 [2013 5.6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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