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렁찬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린다.

송순섭 명창은 동편제 소리 전수자로 판소리 창본을 정리하고, 동편제 소리를 올곧게 이어온 소리꾼이며, 우리 창극을 세계에 알려온 명인이다.

백만 대군이 포효하고 광풍이 휘몰아친다. 창극 ‘적벽가’가 올려졌던 지난 9월 국립극장 무대는 관객의 시선을 확 사로잡았다. 어디 시선 뿐이랴, 관객의 호흡까지도 뚝 끊어지게 할 정도로 압도적인 무대였다.

사상유례 없는 무대라고 전 언론의 호평이 이어졌다. 창극 무대의 신세계가 아니고 무엇이냐고 난리법석이었다. 여기에 큰 공헌을 한 사람은 바로 명창 송순섭옹(80)이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이기도 한 송옹에 다름 아니다.

송옹은 국립창극단 김성녀 예술감독으로부터 콜을 받았다.

창극 ‘적벽가’의 작창과 도창을 맡아달라는 청이었다. ‘적벽가’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은 송옹은 국립창극단이 적벽가를 창극으로 만든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그래서 덥썩 수락했다.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순전히 ‘착한’ 욕심이 발동했던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일은 시작됐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겁이 덜컥 났다. 나라를 대표하는 소리꾼들이 모인 국립창극단과 함께 어렵기로 둘째 가라면 서러워 할 ‘적벽가’를 창극 무대로 올릴 생각을 하니 앞이 깜깜해졌다. 마음이 몹시 무거웠다. 더욱이 한달 남짓한 연습기간에 어려운 소리를 전수나 할 수 있을까도 의문이었다. 에라 모르겠다,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보아야지 하고 덤벼들었다.

소리 연습 중인 박봉술과 장단을 맞추고 있는 송순섭

여름 동안 땀을 뻘뻘 흘리며 가르치고 들으며 수정하길 되풀이했다. 몸은 힘들었지만 행복했던 나날들이었다. 자신을 인간문화재로 만들어준 ‘적벽가’를 국립창극단원들과 함께 창극무대로 만들어 간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정말 큰 행복감에 젖어들었다.

그가 아니었으면 그처럼 문화예술계와 언론으로부터 큰 호응을 이끌어냈던 창극 ‘적벽가’는 불가능했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인 그의 실력을 따라잡을 이가 하늘 아래 누가 있을 것인가.

더욱이 여름 끝자락에 그는 장염으로 쓰러졌다.

1994년 전주대사습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했다.

 수일에 걸쳐 미음과 죽으로 연명하며 치료를 받은 끝에 다시 연습실로 돌아와 곧바로 무대에 섰었다. 송옹은 그러한 상태에서도 짱짱한 소리를 내질러 주변을 놀라게 했다.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송옹은 다리가 후들거렸다고 한다. 며칠간 죽만 먹은 깜냥으로는 내지를 수 없는 소리를 선보였다.

관객들은 그러한 사실을 전혀 몰랐으며 무대를 호령하고 장악하는 그의 소리에 고개를 숙일 수 밖에 없었다. 단지 주변 지인들만 혀를 내둘렀다. 공연 5일 간 시간이 지날수록 오히려 에너지가 넘쳐나 농익은 소리로 무대의 깊이가 더욱 깊어졌다.

둘째 날 공연은 스스로도 영혼이 빠져나갈 듯 매혹적인 공연이었다. 매회 박수갈채는 끊이질 않았다. 오기인지 독기인지, 예기인지 모를 기운으로 송옹은 긴 공연의 무대를 짱짱한 소리로 채워냈다.

어떻게 그리도 독하게 버텨냈냐고 묻는 필자의 말에 송옹은 가볍게 미소를 띠운다.

“그러면 어쩌것어? 내가 그리 하지 않으면 국립창극단의 큰 무대를 망칠 판인디”

그래서 죽기 살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런 독한 대처가 송옹에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반복되는 운명 앞에 그는 늘 그리 했던 대로 꿋꿋이 고개를 쳐들고 당당하게 맞섰을 뿐이다.

2000년 11월16일 송옹은 풍을 맞았다.

꺼이꺼이 일어나 치료를 받고 있었으나 아직 치료가 끝나지 않았던 무렵 문화재청으로부터 2001년 초 연락이 왔다. 판소리 적벽가로 인간문화재 후보자 심의를 하겠다는 소식이었다. 열심히 치료한 후 가을께나 심사를 받을 양으로 치료에 전념하고 있던 4월23일 청천벽력같은 소식을 접하기에 이른다.

적벽가 완창 심사를 5월말까지 받지 않으면 이번에 후보 심의 기회를 놓치게 된다는 거였다. 치료가 온전히 끝나지 않은 부실한 몸으로 떨쳐 일어나 5월31일 판소리‘적벽가’ 완창무대에 섰다. 그리고 심사에 통과돼 2002년 중요무형문화재 적벽가 예능보유자로 지정된다. 인간 승리가 아니고 무엇이랴.

송옹의 판소리는 동편제다. 동편제는 섬세한 기교보다는 곧게 내리지르는 통성을 쓰기 때문에 거칠면서도 호방한 맛이 있다. 서편제가 섬세하게 구사되는, 슬픈 계면조인데 반해 동편제는 굵고 우렁차며 남성적인 소리이다.

삼국지의 적벽대전을 형상화한 ‘적벽가’는 당연히 동편제였을 때 소리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다. 송옹은 송홍록-송광록-송우룡-송만갑-박봉술로 이어지는 고제 동편제를 잇고 있으며 인간문화재를 받게 한 적벽가는 박봉술제다.

2013년 판소리 보존회 이사장 취임식

22세 때 뒤늦게 판소리에 입문했다. 비가비(양반출신의 소리꾼)인 송옹은 어린 시절부터 소리를 좋아했으나 본격적으로 시작하게 된 것은 직업을 찾기 위해 광주로 나온 이후의 일이다. 고향인 고흥에서 전답을 팔아 대처인 광주로 나왔다가 사기를 당하고 먹고 살기 힘들어 가리지 않고 이일 저일을 전전하던 당시 소리를 만나게 됐다.

아이스크림 장사 등을 하던 때 광주공원 근처에 있던 호남국악원을 지나쳐가다 소리를 듣고 그 매혹적인 소리에 빠져들었다. 시간만 나면 그 근처를 맴돌며 어깨너머로 소리를 배우다가 좋아하는 걸 알고서 당시 호남국악원 선생님들이 소리를 배울 수 있도록 해주었다. 판소리 공부를 하던 중 호남국악원 선생님들 성원목(성창순 명창 선친), 공대일(공옥진여사 선친) 등이 하시는 이야기를 들었다.

“박봉술소리 좋데, 정말 잘하데”

하면서 방봉술선생을 칭찬하는 소리를 이구동성으로 했다. 그래서 그이가 누구인지 정말 궁금했다. 소리기생인 전행화가 박봉술선생을 독선생으로 모시고 공부하고 있었다. 거기서 듣고 오신 선생님들이 박봉술 선생의 소리를 최고로 쳤다. 그분으로부터 배우고 싶었다.

가슴에 그분을 모셔두었다가 수소문을 했다. 그분이 어디서 사시는지. 부산이었다. 생각할 겨를 없이 부산으로 떠났다. 그리고 선생님 문하에 들어 소리공부를 했다. 그렇게 해서 배움은 오랫동안 지속됐고 동편제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를 뗐다.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예능보유자인 송순섭 명창

10월16일 순천문예회관에서 판소리인간문화재 공연이 있었다. 거기서 ‘수궁가’를 통목으로 불렀다. 얼마나 열창을 했는지 모른다. 그렇게 무대에 서면 늘 행복하다. 그 행복한 마음으로 소리를 내질렀다.

풍에 걸린 후 치료를 제대로 못한 채 죽기 살기로 무대에 서면서도, 그리고 지난 9월 국립창극단의 창극 ‘적벽가’ 작창과 도창을 맡았을 때도 몸이 힘든 가운데도 행복감을 안았다.

죽는 날까지 소리를 하다 무대에 있고 싶은 열망, 소리에 대한 그 열망으로 소리에 묻혀 지낸다. 그의 짱짱한 동편제 소리는 제자들로 이어져 후손 만대에 계속 이어질 것이라는 믿음 아래 제자 가르치기에도 열성이었던 송옹, 그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뿜어내며 금쪽 같은 하루하루를 소중히 보낸다. 그 와중에 통성의 동편제는 점점 더 영글어져 간다.

[대동문화 91호. 2015년 11월 12월호]

김영순 광주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팀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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