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환정 전경

광주광역시 광산구 등임동 204번지에 불환정이라는 아주 작은 정자(亭子)가 있다. 정자의 이름을 불환(不換)이라 한 것은 아름다운 이 강산을 삼공(三公)과 바꿀 수 없다는 삼공 불환 차 강산(三公不煥此江山)의 고시(古詩)를 인용하여 붙여진 것이다. 이 정자의 주인 임덕원(林德遠)(1713~1787)은 조선 중기의 유명한 처사로 부귀영화를 헌신짝처럼 버리고 어등산 기슭 상류에 두어 칸의 모정을 짓고 오로지 학문 연구와 자연 감상에 몰두하여 은거한 관계로 주위에서 사람들이 용이 엎드려 있다는 뜻으로 그가 거처하는 곳을 복룡 암(伏龍菴)이라 하였다. 그 뒤 1771(영조 47년)년에 다시 도리 석초 도리 기둥 정, 측면 모두 삼 칸 팔작지붕이며 다른 정자에서는 볼 수 없는 중앙에 방을 꾸며 이곳으로 옮겨지으니 바로 현재의 정자이다. 그 이후 후손들이 수차 보수를 거쳐 1903년에 지붕을 기와로 개량하여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다

정자를 세운 이는 조선 숙종 때의 처사였던 임덕원이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을사사화로 화를 입은 금호 임형수(林亨秀)와 역시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광주 목사를 지내던 중 이괄의 군사에게 살해당한 관해 임회(林檜)의 후손이다. 선비 집안의 가풍을 이어받아 대쪽처럼 올곧은 성품을 소유했던 임덕원은 벼슬을 하찮게 여겨 초야에 묻혀 살았다. 여기에 공(公)의 인품을 엿볼 수 있는 시(詩) 한 수를 소개한다. “세 칸짜리 정자를 이곳에 세워서 예전과 다름없이 속 된 거처 멀리했네. 성근 울타리 사이에 버드나무와 국화를 심었고 책상이 깨끗하여 개금고와 책이 갖추어졌네. 입을 오므리고 남새밭 풀을 메고 눈살을 찌푸리고 야초 캐었도다. 한가롭게 노닐면서 속세 생각 끊어지니"

정자의 측면

고려 후기에 중국에서 유교가 전래되면서부터 신분의 귀천(貴賤)은 사(士), 농(農), 공(工), 상(商)의 순서로 되었다. 이러한 신분 차별은 수백 년간 계속되다가 1894(고종 31년)년 갑오개혁 이후 그 질서가 무너졌다. 경국대전을 완성하는 등 조선의 기틀을 다진 성종 때의 기록을 보면 “선비(士)는 여러 가지 일을 다스리고, 농부(農)는 농사에 힘쓰며, 공장(工匠)은 공예(工藝)를 맡고, 상인(商人)은 물화의 유무를 상통시키는 것이니 뒤섞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라고 나와 있다. 선비는 어질고 지식이 있는 사람을 뜻한다. 귀족층인 양반의 신분이 그대로 선비와 연결되지 않고, 학문과 수련으로 형성되는 것임을 말해준다. 이런 의미에서 선비는 독서인이요 학자로 이해되기도 하였다. 선비의 공부는 이치를 탐구하는 지적(知的)인 일과 행동으로 실천하는 행위적 일의 조화 속에서 이루어졌다. 선비에게 벼슬에 나아가기를 어려워하고, 물러서기를 쉽게 생각하는 태도를 요구하는 것은 부귀의 욕망에 사로 잡히지 않고 불의에 대한 거부적 비판정신을 확보하였기 때문이다.

선비에게 두 가지 길이 있었다. 과거시험을 보고 관직에 나아가 자신의 이상을 펼치는 경우와 세상 밖에 나서지 않고 조용히 살며, 일반사회를 멀리하는 경우이다. 벼슬을 하지 아니하고 초야에 묻혀 살던 선비를 처사(處士)라고 했다. 처사의 대표적인 인물로 남명 조식(曺植)이 있다. 그는 조정의 부름을 여러 차례 받았지만 그의 생애를 다하는 날까지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한평생 재야에 있으면서 오로지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 그가 길러낸 제자들이 부지기수이며, 산림(山林)에 묻혀 살면서도 현실의 비판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낮은 벼슬아치는 아랫자리에서 시시덕거리며 술과 여색에 빠져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물 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가 목숨을 걸고 올린 상소문의 내용이다. 남명 조식은 조선이 배출한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추앙을 받고 있다. 선생(先生)이란 칭호가 가장 잘 어울리는 선비이다.

일 년 내내 흐르는 석간수

불환정에는 정자를 중심으로 좌측에 석간수(石間水)가 일 년 내내 흐르고 있다. 이 흐르는 물을 이용하여 정자 앞에 네모난 연못을 만들고, 그 안에 둥근 섬을 조성하였는데, 이것은 집 후면의 언덕을 깎아 만든 계단형의 화계(花階)와 더불어 전통 조경의 중요한 일부를 차지한다. 우리 조경의 특징 가운데 하나로 네모 반듯한 그릇을 연상시키는 방지(方池)의 형태를 꼽을 수 있다. 중국이나 일본에서는 그 유형을 찾아볼 수가 없다. 우리의 전통 조경은 인간 위주의 것도 아니고 자연 위주의 것도 아닌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하나가 되는 것이었다. 사람 자신이 자연의 일부였고 자연과 인간은 서로의 벗이었다. 자연과의 조화와 일치를 중요시하여 나무에 가지치기를 하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이 “선비는 어찌하여 손발을 움직이지도 않으면서 땅에서 생산되는 것을 삼키며 남의 힘으로 먹는가”라고 조선 사회의 선비들을 통렬히 비판하였다. 그러나 불환정의 주인은 어등산 기슭 상류에 초가삼간을 짓고 학문 연구와 자연 감상에 몰두하였을 뿐 아니라 손수 땀 흘리며 땅을 파고 농사를 지었다. 특히 인상적인 것은 주위에서 사람들이 용(龍)이 엎드려 있다는 뜻으로 그가 거처하던 곳을 복룡 암(伏龍菴)이라 하였다는 사실이다. 제갈량이 유비의 삼고초려를 받고 출사 하기 이전 융중의 초막에 은거하고 있을 때, 그를 복룡(伏龍)이라 불렸던 것은, 그 지역의 사람들이 이미 공명의 발군의 재능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네모난 연못과 둥근 섬

우리에게 ‘세한도’를 남긴 추사 김정희와 ‘목민심서’의 저자 다산 정약용은 관직에서 강제로 추방되어 귀양살이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진보를 이루었다. 추사에게 늙은 소나무와의 만남이 없었다면, 다산에게 다산초당이 없었다면 그와 같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까 의문이 든다. 선비들이 벼슬을 탐하지 않고 산림 속으로 들어가 학문 연구와 자연 감상에 몰두하는 것은 자신의 부족함을 인식하여 껍질을 깨고 한 단계 도약하려는 간절함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자연 속에서의 삶에서 더 깊은 깨달음을 얻었다. “입을 오므리고 남새밭 풀을 매고 눈살 찌푸리고 야초 캐었도다” 불환정의 주인은 손에 흙 한번 묻히지 않고 밥과 채소를 먹었던 당시의 선비들과 다르게 직접 농사를 지었는데, 지금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모습들이 눈으로 가슴으로 들어왔을 것이다. 그리하여 덕망과 학식이 높아 많은 사람들의 의논 상대가 되어주고 부귀공명에 뜻을 두지 않고 은둔하며 학문에 힘쓰는 진정한 처사의 길을 걸어간 것이다.

불환정은 인적이 뜸하고 찾아가기도 어려운 곳에 자리하고 있다. 문화재로 지정되지도 않았고, 특별하게 도드라지는 것도 보이지 않았다. 네모난 연못이 세월의 무게에 짓눌려 곳곳이 허물어져 형태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연못 안의 둥근 섬과 연결하는 철제 다리가 너무도 부자연스러워 하루속히 철거되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정자 좌측에서 샘솟는 물이 연못을 가득 채우듯이, 자연 가운데 살며 학문 연구와 자기 수양의 길을 걸었던 처사 임덕원의 삶이, 황금 만능주의로 만연한 오늘의 사회에 잔잔한 교훈이 되었으면 한다.

김귀백 기자  gasun6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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