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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는 품고 밤엔 베고 자면서 지켜낸 보물[한국의 유물유적]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임영열 | 승인 2023.09.29 20:20

광화문 광장의 세종대왕 동상 ⓒ김정오

서기 1418년 태종 18년 음력 8월 8일. 조선 3대 국왕 태종 이방원이 셋째 아들 충녕대군 이도(李祹)에게 양위를 선언했다. 조정의 모든 신하들이 억수같이 쏟아지는 빗속에 엎드려 울면서 “전하! 양위의 명을 거두어 주시옵소서”라며 만류한다. 태종은 양위를 반대하는 신하들에게 “저놈들이 바로 간신들이다” 하면서 분노를 쏟아낸다.

아버지 태종은 양위를 사양하는 아들 충녕대군과 대전에서 독대한다. 태종은 머리를 다 풀어헤친 채로 충녕에게 다가가 “네 눈엔 내가 괴물이 아니냐. 말해봐라. 어찌하여 내가 괴물이 아닌 것이냐? 내가 괴물이더냐 사람이냐? 어서 말해보거라”라며 다그친다.

태종 이방원은 과거에 자신이 행했던 모든 과오를 인정하며 스스로를 ‘괴물’이라 칭하며 충녕대군을 강하게 압박한다. 세자 충녕은 잔뜩 겁에 질린 표정으로 “아바마마 고정하여 주시옵소서. 소자가 잘못했사옵니다. 믿사옵니다. 아바마마의 진심을 믿사옵니다...” 울부짖듯 절규하며 아버지 태종에게 양위의 철회를 호소한다.

“세자! 성군이 되거라. 네가 성군이 되면 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한 장면 ⓒKBS

이에 이방원은 “세자, 성군이 되거라. 네가 성군이 되면 나는 사람이 될 것이다. 네가 그렇지 못하면 나는 괴물로 남을 것이다. 이제 너의 차례다. 나는 여기까지다”라고 말하며 아들 충녕대군에게 깊은 애정과 신뢰를 드러낸다.

이 장면은 태종이 조선 제4대 왕 세종에게 양위하는 과정을 묘사한 것으로 몇 년 전에 방영했던 대하드라마 <태종 이방원>의 첫회에 나왔던 부분이다. 주연 배우의 소름 끼치는 연기로 시청자들을 압도했던 명장면으로 기억된다.

드라마의 각색이지만 실제로 조선의 ‘창업 군주’로 불리는 태종은 어린 아들 세종이 성군이 될 수 있도록 외척들을 척결하고 미래의 정적들을 사전에 제거하여 세종의 탄탄한 정치적 기반을 마련해 주었다.

과거의 모든 악업들을 떠안고 간 아버지 덕분에 세종은 누구에게도 휘둘리지 않고 큰 뜻을 펼치며 성군이 될 수 있었다. 조선을 다스렸던 27명의 왕 중에서 최고의 성군을 낳은 태종 이방원의 업적 또한 어느 군왕 못지않다. 일각에서는 ‘세종의 아버지 태종’이 아니라 ‘태종의 아들 세종’이라는 평가를 내리기도 한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창제한 문자

태종의 탁월한 선택으로 탄생한 세종대왕 이도(世宗大王 李祹 1397~1450). 21살 때 조선 제4대 국왕으로 즉위하여 32년 동안 재임하면서 말이나 글로는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업적을 남겼다. 세종대왕은 이순신 장군과 함께 우리 국민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성군(聖君)’과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혜촌 김학수 화백이 그린 세종대왕 어진 ⓒ세종대왕 기념사업회

아버지 태종의 바람대로 성군이 된 세종대왕은 정치, 경제, 문화, 국방, 과학기술 등 여러 분야에서 수많은 업적들을 남겼다. 그중에서도 가장 큰 업적은 누구나 다 알듯이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다.

농사에 관한 책을 펴냈으나 글을 모르는 백성들에게는 무용지물이었고 억울한 일을 당하여도 제 뜻을 펼치지 못하는 백성들을 바라보며 가슴 아파한 세종은 누구라도 쉽게 배울 수 있는 새로운 글자를 만들었다. 이로 인하여 모두 백성들이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들었으니 이보다 더한 업적은 없을 것이다. 오늘날 우리가 이렇게 글을 쓰고 읽을 수 있는 것도 다 세종대왕의 덕분이다.

세종은 등극한 지 25년이 되던 1443년 12월 하순에 한글을 완성하는 대업을 이룬다.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시력을 잃어가며 10여 년을 연구한 결과였다. 사람들이 말할 때 내는 발성 기관의 모형을 본떠 만든 자음 17자. 하늘, 땅, 사람 등 자연의 조화를 본뜬 모음 11자. 총 28개의 글자로 세상의 모든 소리를 담을 수 있는 위대한 문자 ‘훈민정음(訓民正音)’을 탄생시켰다.

비단과 종이에 싸여있는 국보 제70호 훈민정음 ⓒ문화재청

세종실록은 그때의 순간을 “이달에 임금이 친히 언문 28자를 지었다. 옛글자를 본떴으며 초성·중성·종성으로 나누어 합한 연후에 글자를 이루었다. 한자와 항간에 쓰이는 우리말을 모두 쓸 수 있고 글자는 간단하지만 전환이 무궁하다. 이를 훈민정음이라 이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로부터 3년 뒤 1446년 9월 상순에 정식으로 반포 됐다. 실록에 훈민정음창제와 관련된 기록이 그리 많지 않음은 그만큼 한글 창제에 대하여 신하들의 반대가 많아 세종 혼자 힘으로 첩보작전 하듯이 비밀리에 완성했기 때문이다.

문자가 곧 권력이었던 시절, 훈민정음의 청제와 반포 과정은 결코 순탄치 않았다. 당시 조선은 명나라 사대주의를 기초로 세워진 나라였기에 집권층의 반대는 예상되는 일이었다. 기득권을 가진 자들이 그것을 지키려고 거세게 저항하는 행태는 예나 지금이나 별반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로 시작되는 세종대왕의 ‘훈민정음 서문’ ⓒ문화재청

저항세력의 중심에 집현전 부제학 최만리(崔萬理 ? ~1445)가 있었다. 최만리를 필두로 6명의 집현전 학사들은 세종에게 한글을 반대하는 상소문을 올린다. 이를 1444년 갑자년의 일이라 ‘갑자상소(甲子上疏)’라고 한다.

“언문을 제작하신 것은 지극히 신묘해 만물을 창조하고 지혜를 운행함이 천고에 뛰어나시오나, 신 등의 구구한 좁은 소견으로는 의심되는 측면이 있어 뒤에 열거하오니 부디 살펴 주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나이다...”

상소문은 이렇게 공손하게 시작한다. 하지만 뒷부분에서는 한글을 “야비하고 상스러운 무익한 글자(鄙諺無益之字)”라고 폄훼하면서 강하게 비판했다. 최만리 등이 열거한 의심되는 것들은 대략 여섯 가지였다.

요점은 ‘한글의 사용은 명나라 사대에 어긋 난다’는 것이고 현실적으로도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또한 “문자 생활은 이두로도 불편하지 않다. 언문을 사용해 그것으로 출세할 수 있게 되면 고생해서 성리학을 공부하지 않으려고 할 것이다.”라는 다소 황당한 주장을 했다.

이에 대하여 세종은 “지금의 언문은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려는 것이다. 너희들이 설총은 옳다고 하면서 임금이 하는 일은 그르다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고 하면서 한글의 창제는 백성들이 글을 모른다는 이유로 불편함과 억울함을 겪지 않도록 하겠다는 ‘애민정신’에서 출발했음을 밝힌다.

훈민정음 ‘예의’ 편 ⓒ문화재청

494년 만에 세상에 나온 ‘한글 사용설명서’

세종은 1443년 12월 완성된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이 문자를 만들게 된 동기와 사용 원리, 실제 사용례 등을 상세히 설명한 책 ‘훈민정음’을 만들도록 했다. 이때 8명의 인물이 등장한다. 이른바 ‘집현전 8학사’라고 불리는 정인지·신숙주·성삼문·최항·박팽년·강희안·이개·이선로 등이 그들이다.

조선 초기 최고의 학문연구기관이었던 ‘집현전(集賢殿)’에서 최만리를 비롯한 한글에 반대했던 고위직들과는 달리 한글 보급에 찬성했던 개혁적 성향의 젊은 석학 8명은 3년이라는 각고의 연구 끝에 ‘훈민정음’을 완성하고 이를 반포한다. 1446년 9월 상순의 일이다. 양력으로 환산하면 10월 9일이다. 우리가 매년 기념하고 있는 ‘한글날’의 기원이 되는 날이다. 올해로 제577돌이 된다.

훈민정음은 두 가지 의미를 갖고 있다. 하나는 1443년 세종이 창제한 자음과 모음 ‘28자의 문자’를 말하는 것이고 또 하나는 1446년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집현전 8학사들이 완성한 ‘책이름’을 말한다. ‘훈민정음해례본’이라고 부르는 이 책은 한문으로 쓰인 목판본으로 훈민정음에 대한 자세한 해설을 담은 ‘사용설명서’라 할 수 있다.

글자를 합쳐 쓰는 방법을 설명한 ‘합자해’ ⓒ문화재청

해례본은 총 33장 1책으로 크게 ‘예의(例義)’와 ‘해례(解例)’로 구성되어 있다. 예의는 세종대왕이 직접 지은 것으로 한글을 만든 이유를 밝힌 ‘서문’과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다. ‘해례’는 집현전 ‘8학사’들이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해 놓았다.

글자를 만든 원리에 대해 설명한 ‘제자해’와 초성·중성·종성해 순으로 해설하고 세 글자를 합쳐 쓰는 방법을 설명한 ‘합자해’와 합자법에 의해 구성된 단어에 대한 실례를 보인 ‘용자례’로 되어 있다. 마지막 ‘정인지 서문’은 훈민정음을 새로 만들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있다.

인류 역사상 문자를 만들고 누가, 언제, 어떠한 목적으로 만들었으며 그 원리와 사용법까지 자세하게 기록으로 남아있는 언어는 훈민정음이 유일하다. 1446년 한글 반포 당시 약 500여 권 정도가 인쇄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훈민정음해례본은 수백 년 동안 기록으로만 존재할 뿐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그렇게 494년이 지난 1940년 7월. 문화재 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1906~1962)은 국문학자 김태준을 통해 경상북도 안동에 훈민정음의 진본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일제 강점기, 한글 사용은 금지 됐고 민족문화 말살정책이 극에 달했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문자의 사용 실례를 설명한 ‘용자례’ ⓒ문화재청

두 사람은 일제의 눈을 피해 비밀리에 훈민정음 소유자와 접촉을 시도했다. 이 책은 김태준의 제자 이용준이 보관하고 있었다. 도중에 김태준이 일제에 검거되어 옥살이를 하면서 잠시 멈춰진다. 2년 후 석방된 김태준은 마침내 훈민정음 소유자 이용준을 만나 진본임을 확인한다.

이용준은 훈민정음 값으로 천 원을 요구했다. 간송은 이용준에게 부르는 값의 10배인 만 원을 주고 김태준에게도 사례비로 천 원을 줬다. 당시 시세로 서울의 큰 집 한 채 값을 훨씬 넘는 가격이었다.

간송은 훈민정음을 자신이 소장하고 있는 수집품 중 최고의 보물로 여겼다.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두고 일제의 탄압과 한국전쟁으로부터 지켜냈다. 전쟁 중 피난 갈 때도 품속에 품었고 밤에는 베갯속에 넣고 자면서 지켰다.

문화재 독립운동가 간송 전형필 선생(澗松 全鎣弼 1906~1962)의 젊은 시절 ⓒ간송미술관

이렇게 지켜낸 훈민정음해례본은 가격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보배 ‘무가지보(無價之寶)’로 인정되어 1962년 국보로 지정되었고 1997년 세계가 인정하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애석하게도 간송은 훈민정음이 국보로 지정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62년 1월 세상을 떠났다.

역사에 가정이란 없다지만, 만일 간송 전형필 선생의 헌신적 문화재 사랑이 없었다면 우리의 아름다운 한글은 일제 강점기 어용학자들의 농간에 휘말려 세종대왕이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다가 ‘창살 모양’을 보고 우연히 만든 문자로 전락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제577돌 한글날을 맞아 집현전 8학사들과 세종대왕의 애민정신, 간송 전형필 선생의 문화재 사랑에 깊은 존경과 애정을 표하며 다시 한번 옷깃을 여민다.

이 기사는 격월간 문화잡지<대동문화> 138호(2023년 09,10월)에도 실렸습니다.

임영열  youngim1473@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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