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소군(王昭君)!

하늘은 흐렸다 개었다, 햇님은 숨바꼭질을 거듭하고, 춘풍이 꽤 강하게 불어대니 이것이 삭풍인가 싶을 정도로 혼란스러운 봄날입니다. 얼마 전 봄을 재촉하던 비가 온 뒤 바람이 꽤 쌀쌀해졌습니다. 꽃샘추위 속에서도 매화에 이어 살구꽃이 살짝 고개를 내밀고 있습니다.

올봄에는 유독 그대의 처지가 짠하게 와 닿소. 그대는 양귀비, 초선, 서시와 함께 중국 4대 미인으로 꼽히지요. 그대가 살았던 한나라는 서북방 흉노족에게 볼모로 후궁을 한 명 간택하여 보내야 하는 처지에 놓였었지요.

봄은 왔지만 내 마음에는 아직…

그대의 왕 원제는 후궁 중에서 제일 못생긴 사람을 보내기로 하고 궁중화가인 모연수에게 후궁들의 초상화를 그리도록 하였는 바, 뭇 후궁들은 서로 오랑캐 왕의 첩으로 간택될까 두려워 궁중화가인 모연수에게 예쁘게 그려 달라고 청하며 금은보화를 뇌물로 바쳤지요.

그런데 왕소군, 당신은 자신의 미모에 대한 자신감 때문인지, 청렴 때문인지, 황제에 대한 신뢰 때문인지, 가난 때문인지는 모르겠으나 손을 쓰지 않아 모연수에 의해 후궁 중에서 제일 추녀로 그려지고 결국에는 간택되어 볼모로 가게 되었지요. 당신이 떠나던 날 원제가 절세미인인 그대를 보고 궁중화가 모연수를 참형에 처했다고 하지요.

후세 당나라의 시인 동백규가 그대의 처지를 읊은 시 한 구절이 오늘날 한국 땅에서도 자주 회자된다오.

‘胡地無花草(호지무화초) 오랑캐 땅에는 꽃과 풀이 없으니 春來不似春(춘래불사춘) 봄이 왔어도 봄이 온 것이 아닐레라 自然衣帶緩(자연의대완) 자연스레 허리띠가 느슨해지는 것은 非是爲腰身(비시위요신) 일부러 날씬해지려 살 뺀 것이 아닌데···.’

밖에 봄꽃은 완연한데 마음은 한겨울처럼 추웠을 그대의 아픔을 정말 간절히 잘 표현한 말이 춘래불사춘(봄이 왔지만 봄 같지 않다) 아닌가 싶소. 우리는 ‘춘래불사춘’이란 말을 고달픈 인생살이, 암담한 정치 현실, 비관적인 사회에 비유해 자주 쓰지요.

그러면 당신은 묻겠지요. 적장에게 볼모로 잡혀가 불행한 시간을 보낸 당신보다 힘든 일이 뭐냐고···? 지금 여기 한반도의 남쪽 땅에는 정말 힘든 일이 많아요. 대한민국은 자살률이 제일 높은 나라랍니다. 그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끊어야 할 만큼 고통스런 사람들이 많답니다.

살림살이 녹이는 봄빛 한 줌 바라는 서민들

세상 살아가는 이치 가운데 ‘춥고 배고픈’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일이 있겠소? 장기적인 불황 속에 서민 살림살이는 말이 아니라오. 치솟는 물가 때문에 어머니는 자식 입에 넣어주면 기뻐할 것들을 사지 못하고 가게에서 돌아선다오.

그러나 정부도, 어떤 정치인도 시원한 대책이 없는 그 현실이 더 답답한 살얼음이라오. 봄이 왔다는데, 아직 오지 않은 삶의 봄을 학수고대하며 기다리고 있는 서민들은 크고 작은 한숨소리를 귀 열어 들어주기를 진정으로 바라지만, 어느 누구도 진정 뜨거운 가슴으로 그 소리를 들어주지 않는답니다.

왕소군!

그대는 참 대단하오. 흉노에게 볼모로 갔던 그대는 자신의 비극적 운명에 굴하지 않고 흉노족에게 길쌈을 익히게 하고 예의범절을 가르쳐 평화의 시대를 열어갔지요. 그대가 늙어 죽을 때까지 60년 동안 흉노는 만리장성을 넘지 않을 정도로 그대의 힘은 대단했소.

국민이 꿈꾸는 소박한 봄의 소망

이제 곧 꽃이 피면 벌·나비 앞 다투어 달려들어 꿀을 빨고, 그들 덕분에 열매를 맺어 자손 번창을 꿈꾸겠다는 봄꽃들의 당찬 희망이 넘실대겠지요. 튼실한 과일을 목표로 나무들은 산으로, 강으로, 바다로, 도시의 골목으로 달려가 연분홍 봄꽃 몸단장을 할 것입니다.

물론 마음이 꽁꽁 언 우리도 꽃들의 향연을 볼 테지요. 봄은 왔는데…. 이미 봄은 우리 삶 깊숙이 묻어왔는데…. 정녕 계절의 봄은 왔어도 삶의 봄은 아직 멀었는가, 한탄하면서요.

꽃샘바람, 소소리바람 분주히 드나드는, 봄인 듯 아직은 은밀한…. 겨울의 잔영(殘影)이 질펀한 계절, 봄입니다. 국민이 꿈꾸는 봄은 거창하지 않습니다. 빚 없이 가족과 따뜻한 밥을 먹고 싶고,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이 보이고, 누구에게나 기회가 균등하게 보장되며, 존경할 수 있는 지도자가 있는 나라···. 정말 소박한 꿈이지요.

우리 삶에도 분명 봄이 올 것입니다. 매번 희망을 품다 피지 못하고 저문 우리의 바램을 봄바람에 다시 실어봅니다. 여기저기서 소음처럼 터져 나왔던 지난해의 꿈같은 약속들이 다 지켜지지 않는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마음의 겨울’이 풀려 진정 봄을 가슴으로 한껏 느껴볼 수 있는 그날을 기다려봅니다.

대동문화 76호 [2013 5,6월호]

남성숙 광주매일신문 주필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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