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련사 전경

뉘 눈살에 시들리어 그 맵시 쓸쓸히/외로운 넋 몰고 오는 검정 비둘기/해 늙은 느릅나무 가지에 앉아/구구꾸 목놓아 슬피 우노나/깨우면 꺼져 버릴 꿈 같은 세상/사랑도 미움도 물 위의 거품/그 설움 향화(香火)처럼 피워지련만/날마다 못잊어 우는 비둘기

김현구 -「검정 비둘기」 중에서-

영랑만 남고 현구는 사라졌다

현구 시인의 생가를 찾아 고향 강진에 갔다. 사실 나는 현구 시인을 서른이 한참 넘어서 알았다. 「임이여 강물이 퍼렇습니다」와 「검정 비둘기」를 읽고 그 뒤론 영랑보다 더 즐겨 마음에 담게 되었다.

대학원 다닐 때 현구 생가를 들렀던 기억으론 영랑 생가에서 1㎞ 남짓 거리에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데 결국은 찾지 못했다. 안내하는 사람도 없었고 도로는 너무 바뀌었다. 주소지가 ‘현구길’에 사는 강진 사람들도 아예 현구 시인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아직 모란이 피지 않은 영랑생가를 둘러보고 최근에 문을 연 시문학파 기념관을 찾았다. 시문학파는 1930년 3월 5일에 창간된 《시문학》을 중심으로 순수시 운동을 펼쳤던 김영랑, 김현구, 박용철, 정지용, 이하윤, 정인보, 변영로, 신석정, 허보 등 9인의 시인을 말한다. 개인 문학관은 많지만 특정 문파의 기념관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이다.

시인은 영랑에 비겨 시의 조탁에 결코 뒤짐이 없었으나 안타깝게도 후세 사람들에게 그리 알려지지 않았다. 그래서 혹자들은 ‘역사는 기록되는 자의 것’이라고 하나보다. 올 봄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을 잠시 덮고 <현구 시집>을 펴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뿌리의 길에서 뿌리를 밟다

‘반은 레닌 반은 간디’로 알려진 베트남의 국부 호치민은 늘 <목민심서>를 머리맡에 두고 읽었다고 한다. 안채와 별채, 모정까지 갖춘 다산초당을 오르면서 청렴과 근검을 강조하던 다산이 참 호화롭게 유배 생활을 했다고 오해 한 적이 있었다.

다산초당은 다산이 지은 집이 아니라 귤동 마을에 살던 윤단이라는 사람의 산정이었다. 다산은 강진의 동문밖에 있는 주막과 고성암이라는 작은 암자, 이청이라는 제자의 집을 떠돌며 귀양살이를 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윤단은 손자들을 교육한다는 명분으로 다산을 그곳으로 초빙해 후학들을 가르치고 집필을 할 수 있도록 도왔다고 한다. 초당 아래서 전통찻집을 열고 다산의 사상을 전파하고 있는 윤동환 전 군수가 윤단의 6세손이다.

오랜만에 초당을 오르면서 깜짝 놀랐다. ‘뿌리의 길’이라는 팻말이 달린 길 때문이었다. 소나무를 비롯해 그곳의 고목들의 뿌리가 해골처럼 드러나 있었고 수많은 사람들이 그곳을 계단 삼아 밟고 지나가고 있었다. 한 아이가 ‘아빠! 이 나무들의 뿌리는 왜 땅속에 있지 않고 왜 밖으로 나와 있어?’ 하고 묻는다. 어른들의 족적이 남긴 이기심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노벨 평화상까지 받은 폴란드 전 대통령 바웬사는 퇴임 후 부임 전 근무하던 옛 직장 그다니스크 조선소 전기 기사로 복직했다.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퇴임을 앞두면 앞으로 살 집터를 다지고 높은 담장부터 쌓는다. 조선의 왕들처럼 <목민심서>로 매주 경연을 열어 암송케 해야할 것 같다. 그렇게 하면 뿌리를 파내고 그 위에 때 묻은 족적을 남기는 일을 멈출 수 있을까?

정치와 종교가 먼저 결사해야 한다

무인들의 정변이 난무하던 1216년(고종 3) 있었던 요세(了世, 1163~1245)국사의 백련결사(白蓮結社)를 생각했다. 이는 왕이 허수아비가 되고 문치(文治)가 사라진 고려조 강진 만덕산 백련사에 모인 승려들이 불교의 자각과 반성을 촉구한 신앙결사다.

물결 어지러우니 달 드러나기 어렵고 / 방이 깊으니 등불 더욱 빛나네 / 권하노니 그대 마음그릇 바로 놓아 / 감로장 쏟아지지 않게 하라.

-요세 스님에게 보낸 지눌 스님의 서찰 중에서-

요세 스님은 신종 1년(1198) 개경의 고봉사(高峯寺)에서 열린 승려 대회에 참석해 지눌 스님을 만나 정혜결사에 참여하게 되나 곧 뜻을 달리하게 된다. 북송의 고승 영명(永明, 904~976)의 “천태의 묘해(妙解)에 의지하지 않으면 수행의 120병(病)을 어찌할 수 없다”는 깨달음을 들으면서다. 스님은 ‘행함이 없는 참선 수행만으로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고 생각했다.

북송 천태종의 영향을 받은 요세 스님은 지눌의 선사상과 탈피해 참회 정진과 미타 정토 신앙을 통한 실천을 강조했다. 거기다 원나라 침략 당시 대몽 항전 운동을 펼쳐 최씨 무신 정권과 농민과 천민 등 피지배 기층 민중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요즘 세태는 스스로를 반성하고 책임지지 않고 늘 남의 탓만 한다. 안타깝게도 세상을 정화하고 사람들을 치유해야 할 정치와 종교가 늘 그 선두에 선다. 결사해야 한다.

이 맑은 봄날, 참회가 끝나면 삶을 결사하자

젊은 날의 객기와 치기 어린 아둔함으로 토해낸 많은 말들이 다른 이를 아프게 했다. 그 말들은 파편이 되어 허공을 떠돌다 수백 수천 개의 부메랑이 되어 내 가슴에 꽂혔다. 그로 인해 3년을 앓았다. 그 기간 수없이 많은 다짐을 했으나 결국은 나를 위로하기 위한 것이었다. 봄을 다 보내고서야 세상에 사과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늘 그 다음이 문제다.

살아가면서 우리는 얼마나 지나 온 발자국을 뒤돌아볼까. 혹시 돌아보면서 ‘내가 왕년에’를 연발하지는 않은지. 탁한 발자국이 지나온 길은 늘 발때가 남고 뒤따라오는 사람들의 방향까지 흐려놓는다. 맑은 발자국은 흐린 길을 선명하게 하고 뒤따르는 사람들이 스스로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한다. 이 봄이 다 가기 전에 결사하고 결사하자. 아직 모란꽃이 피지 않았다.

[대동문화 70호, 2012년 5. 6월호]

김대호 소설가  taboocut@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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