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부모들은 자식을 결혼 시키고 나면 부모로서 할 일 다 하고, 이제는 편안히 남은 인생을 즐기게 될 거라 기대한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여기 ‘친정엄마’가 있다. 딸을 시집보내는 순간부터 엄마는 이제 그냥 엄마가 아니라 친정엄마가 되는 거다. 딸을 시집보냈으니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착각이다. 친정엄마에게는 이제 엄마가 아닌 더 힘들고 고단한 친정엄마의 길이 기다리고 있는 거다. 세상의 딸들이라면 그 차이를 다들 잘 안다. 엄마와 친정엄마의 차이를….

우리나라에서 일 년에 무대에 올라가는 뮤지컬은 대략 350편이다. 그중 100개만이 창작뮤지컬이다. 다시 거기서 관객들의 기억 속에 살아남은 뮤지컬은 10%에 불과하다. 그런 판에서 올해로 4년째 ‘시즌 5’를 맞이하는 뮤지컬이 있다. ‘친정엄마’다. 보면 모두가 함께 공감 할 수 있는 공연이다. 관객이 잊지 않고 찾아주는 명품뮤지컬 ‘친정엄마’. 그 판에서 김수미가 울고 웃고 있다.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나는 너한테 더 못해줘서 늘 눈물이 나. 딸은 언젠가는 떠나보낼 자식이라 늘 마음이 짠헌디 제대로 해주지도 못허고…, 내가 니 생각을 허믄 뼈가 저린다. 아가, 너한테는 진짜 미안허지만 나는 니가 내 딸로 태어나줘서 진짜 고맙다.” -엄마 대사 중 -

엄마 김봉란은 어려서는 고삐 풀린 망아지 같은 가수를 꿈꾸던 활달한 처녀였다. 그러나 결혼하고 나서는 세상의 다른 엄마들처럼 남편과 자식을 위해 자신을 헌신하며 사는 엄마다. 먼지만도 못한 인생, 내 새끼들이 없었으면 세상을 살 이유가 없다는 엄마는 자식을 위해 아낌없이 준다.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늘 미안하다고 말한다. 딸과 늘 티격태격하지만 그건 미워서 그러는 것이 아니다. 이 세상에서 젤로 이쁘고 잘난 딸이 고생할까봐 늘 맘이 짠하다. 엄마 땜에 못산다는 딸에게 나는 너땜시 산다며 딸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가엾고 사랑스러운 친정엄마.

그 역을 하면서 배우 김수미는 무대에서 엄마를 애타게 부른다. “내가 이 세상에서 단 한 가지 소원이 있다면, 돌아가신 우리엄니 내 손으로 밥 한 그릇 해드리고 싶어요. 우리 엄니 먹갈치도 좋아하셨고 미끈미끈한 보리밥보다 하얀 쌀밥…, 밥 대신 이 공연을 매일매일 하늘로 보내드려야지요.”

진정한 배우는 논다. 작가의 독특하고 가슴에 콕콕 박히는 맛있는 대사와 정서를 가지고 무대 호령하며 신나게 노는 것이다. 김수미는 무대에서 잘 논다. 그의 몸짓과 손짓과 언어는 관객의 심장을 울리는 힘이다.

무대 위에서 ‘노는 여자’

이곳저곳을 떠다니며 살아가는 배우들은 낯선 곳에서의 정과 감각과 아름다운 것들에 대한 감탄을 가끔씩 꺼내보며 산다. 음식으로 나눈 정만큼 오래 남는 것도 드물다. 음식은 몸과 마음을 동시에 따뜻하게 한다.

“광주에서는 네 번째 공연이에요. 전라북도가 고향이긴 하지만 고향에 온 듯 편안합니다. 그래서 일부러 공연 전날 와서 배우들과 스태프들 모두 회식을 해요. 전국을 다 다니잖아요. 전라도만큼 음식이 제 입맛에 딱 들어맞는 곳도 드물죠. 여기 분들은 정이 많아서 모든 음식이 푸짐해요. 이것저것 챙겨주시는 마음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 역시 이곳은 사람냄새가 나는 곳이에요.”

유독 사람의 정을 귀하게 생각하는 그는 오래 전부터 음식으로 정을 나누어 왔다. 아마 어릴 적 그의 친정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위대한 재산이 아닐까?

그는 친정 엄마는 빨리 세상을 떠났다. 그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았던 시간은 17년뿐이었다. 어릴 적 서울로 유학 와서 혼자 밥해 먹으려고 하면 엄마가 생각나서 많이 울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열일곱 때는 세상의 끝인 것처럼 울었다. 그래서 그가 꺼낸 ‘엄마’라는 말은 포근한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우리 엄마는 밭농사 일에 바쁘셨어요. 내가 기억하는 엄마는 부엌 아니면 밭에서 항상 일하고 만날 음식하는 엄마였어요. 엄마는 요술쟁이 같다고 생각했어요. 왜 이렇게 맛있을까? 어릴 때지만 엄마가 하는 음식에 대해 궁금한 게 많았어요. 그런데 참 신기해요. 사실 엄마한테 음식을 배워 본 적이 없어요. 근데 엄마가 만들어줬던 음식들을 내가 곧잘 해먹어요. 이런 게 내림이지 싶어요.”

‘전원일기’ 식구들 밥, 전부 책임졌던 일용엄니

음식을 잘 하는 배우로 소문난 김수미, 그는 분명 어머니를 닮았다. 살아있을 때 어머니가 그랬다. “옛 말에 딸은 어느 위치에 있든 간에 엄마를 닮아야. 새우젖 장사하는 엄마를 가졌으면 새우젖 장사하는 엄마를 닮어.” 살아보니 엄마 말이 맞았다. 그는 엄마를 닮았고, 그의 딸은 엄마인 그를 꼭 닮았다.

“태아부터 엄마 입맛에 길들여진 게 분명해요. 먹어본 입맛이 있어서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 해보고 그러다 딱 걸릴 때가 있어요. ‘아, 이맛이야’할 때죠. 어릴 적 어머니가 야참 주시던 때처럼 미각이 살아나요. 야참은 간단했어요. 메밀묵 하고 신김치 쫑쫑 썰어놓고 큰 양푼에 5형제 숟가락을 콩콩콩 꽂는 게 다였어요. 거기에 들어간 양념장 맛이 입 안을 즐겁게 했어요. 밤에 메밀 먹으면 소화가 안 된다며 신김치를 넣어서 주신 엄마의 지혜를 많이 닮고 싶어요. 우리 딸이 내가 어렸을 때 엄마한테 했던 말을 똑같이 해요. 차이가 있다면 우리 딸은 음식을 배우려고 해요. ‘엄마 왜 이렇게 맛있어, 이건 어떻게 하는 거야. 그러믄 말로 해주고 또 하는 걸 보여줘요. 그래서인지 우리 딸도 음식은 잘 하더라구요. 친정엄마 같은 지혜도 배웠으면 해요.”

분명 내림이라는 게 무시 할 수 없다. 바쁜 촬영 스케줄에도 집에 가면 일을 한다. 여러 가지 김치도 담그고 맛있는 요리를 해서 지인들과 함께 먹는다. 보통 지겹고 힘겨워하는 집안 일이 그에겐 일상이고 즐기는 취미생활이다.

‘전원일기’ 일용엄니 시절이었다. 그는 늘 도시락을 싸서 다녔다. 처음엔 조금씩 나눠먹다가 제 먹을 밥이 모자라서 3인분, 5인분 조금씩 늘리다보니 결국 ‘전원일기’ 식구들 밥을 전부 싸서 다녔다. 어쩌면 ‘전원일기’를 보며 시청자들이 느꼈던 포근한 정의 근원은 그가 만들었던 음식들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도 이제 진짜 친정엄마가 됐다

배우 김수미의 역할은 늘 수다스러웠다. 실제로는 어떨까? 시끄러울 것 같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천성이 부지런해서 억척처럼 보이게 살았지만 사실 대학 때 문학을 전공하려 했던 그다. 그는 독서와 음악 감상을 즐긴다. 또 꾸준한 운동을 한다. 그것들을 놓치는 날이면 하루가 힘들다. 이렇게 저렇게 배우, 엄마,부인으로 살다보니 시간도 따라 흘렀다.

지난 3월 딸을 결혼시킨 김수미, 그도 이제 진짜 친정엄마가 됐다. 부인과 엄마 자격으로는 부족할 게 없었던 그다. 하지만 배우로서 하는 일이 바쁘다 보니 놓치고 간 시간이 지금 크게 느껴진다.

“딸 키울 때 제 일 때문에 가까이 못 있어 줬어요. 한 것에 비해 정말 딸이 잘 커줬어요. 다른 사람 손에 커서 그것이 늘 맘에 걸려요. 우리 딸도 일을 하지만 아이가 태어나면 유아기 시절만큼은 아이하고 같이 있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그게 한이 되서 더 그래요.”

촬영하다 한두 시간 비면 집으로 달려갔다. 네 살 여린 딸이 그네 타고 혼자 놀고 있는 모습을 몰래 숨어서 훔쳐봐야 했던 그 시절엔 가슴이 늘 먹먹하고 아팠다. 엄마가 그런 것이다. 친정엄마가 되면 더 아프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은 서로 미안해하고, 서로 아파하며 시간의 강을 건너간다.

대동문화 77호 [2013 7,8월호]

한경숙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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