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적 개인들의 삶은 언제가 물음표 아니면, 말줄임표로 끝난다. 김시습(金時習, 1435~1493)이 생을 마감하기 위해 마지막으로 찾아간 곳이 충청도 홍산(지금의 부여) 무량사(無量寺)였다. 병마와 싸우고 있었다.

김시습은 이곳 무량사에서 59세 되던 해 3월에 생애를 마치는데, 율곡 이이의 <김시습전>에 따르면 그는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지 말고 절 옆에 안치해두라고 했다. 유언에 따라 3년이 지난 뒤 그 관을 열어보니 안색이 생시와 같았다. 그 뒤 화장을 하니 사리가 나와 부도를 세우고 안치했다. 지금 남아 있는 김시습의 부도이다.

지극히 어리석으니 너를 굴헝 속에 두리라

또 이 책에 따르면 김시습은 이미 자신의 노소(老小)의 자화상을 두 점 남기며 자찬(自撰)을 지었다고 한다. ‘너의 형상은 지극히 작고 너의 말버릇은 지극히 어리석으니, 너를 굴헝 속에 두는 것이 마땅하도다.’ 그의 생애가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실제로 무량사 김시습 영정이 자신이 남긴 ‘노소의 자화상’ 중 하나인지는 확실치 않다.

이 ‘문제적 개인’은 컴컴한 시대 속에서 쓸쓸한 굴헝 속에 스스로를 유폐시키고 지낸 ‘개별자’였지만, 우리 국문학사와 차의 세계에서도 많은 족적을 남긴 인물이다.

매월당(梅月堂) 김시습은 <금오신화>라는 고전소설을 탄생시켰다. 매월당은 한 마디로 생육신의 하나로 조선 왕조의 체제가 정비되면서 드러나는 시대적 모순에 저항했던 ‘방외자’였다. 그리고 기존 문학과는 다른 방외인의 삶을 살면서 방외인의 문학을 산출해냈다.

유교 사유 체계에서 불교 사상을 적용해 현실을 이해하려던 신흥 지식인의 사상을 보여주었다. 김시습은 <잡저제일범십장>, <묘법연화경병찬>, <십현담요해> 등과 같은 불교 사상을 담은 글, <고금제왕국가흥망론>, <고금충신의사총론> 등의 유교 사상이 드러나는 글을 동시에 남겼다.

또 <매월당집>의 23권 가운데 15권은 시문집으로 지은 시가 2,200여 수라고 하는데 유실되고 남은 것이라 실제로는 훨씬 많았다고 한다. 시는 자신이 살아온 삶의 자취이자 정신적 가치를 실험하는 도구였다. 시는 자신의 핍진한 삶을 담았지만, 농민들의 심정을 대변하는 사회비평적 주제도 담았다. 최초의 단편소설집인 <금오신화>는 김시습이 31세에서 37세까지 경주 금오산에 머물면서 지은 것이다.

남은 2,200여 수의 시 중에서 차와 관련해 지은 시가 60여 수 남아 있어서 불우했던 삶을 위안하는 다도에 심취하고, 차 생활의 격식을 타파한 실용적 차인의 모습을 보여준 면모를 살펴볼 수 있다.

집 북쪽의 차 심으며 세월 보내고/산 남쪽에서 약을 캐며 봄을 지내네 -「천자여구(千字儷句)」 중에서-

직접 차나무를 심고 약을 캐면서 살아가는 차인이었다. 다법도 호활하고 차 생활도 격식이 없었다.

차 생활의 격식 타파한 자유로움 보여줘

김시습은 여러 대에 걸쳐 무관직에 종사하던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다. 유년 시절 대부분을 서울 반궁, 곧 지금의 성균관 북쪽에서 태어나 지냈다. 태어난 지 8개월 만에 능히 글을 깨우치자 집현전 학사 최치운이 그의 이름을 ‘시습’이라고 하였다. <논어> 「학이편」의 ‘학이시습지 불역열호아’에서 따온 것이다.

‘생이지지’가 알려져 세종이 불러 시를 짓게 하고 감탄하면서 비단 50필을 하사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비단 50필을 각각 이어서 한쪽 끝을 허리에 차고 유유히 끌고 대궐을 나갔다.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김반, 윤상에게 글을 배웠다. 그러나 15세에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외가에 몸을 의탁한 채 시묘살이를 했다. 한때는 김시습도 훈련원 도정 남효례의 딸과 혼인해 안정적인 생활을 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한미한 가문 탓에 정규학교 사부학당에서 공부하지 못했다. 삼각산 중흥사에서 학업에만 열중하던 21세 되던 해에 수양대군이 어린 단종을 내쫓고 왕의 자리에 오르게 된 일이 생겼다. 이 소식을 전해 듣고 그는 대성통곡하며 읽고 있던 책을 불사른 뒤 승려가 되었다. 법명을 설잠(雪岑)으로 하고 산수를 유람하며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삶을 살았다.

내 보현에 들고부터/마음도 한가롭고 지내기 또한 좋아/돌솥에 새 차 달이니/타고난 푸른 안개 피네/나 방외(方外)의 사람으로/세속 밖의 스님 따라 논다네 -「보현사(普賢寺)」 중에서 -

관서 지방을 유람하며 <탕유관서록>을 관동지방을 유람하고 나서는 <탕유관동록>을 지었다. 또 29세에는 삼남을 기행하면서 쓴 <탕유호남록>을 정리하는 글을 썼다.

해마다 차나무에 새 찻잎이 솟네

29세 때 서울에 올라갔다가 효령대군의 간청을 못 이겨 불경언해 사업을 도왔다. 그러나 중앙 관직의 요직에 자신이 경멸하던 인사들이 올라 있는 것을 보고는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31세 때에는 경주 남산 금오산에 올라 금오산실을 지었다. 이곳은 지금의 용장사 옛터로 보인다. 이 시기가 김시습의 문학이 꽃피던 시기이다. 이곳의 작은 집을 ‘매월당’으로 부르고 최초의 소설인 <금오신화>를 써냈다.

해마다 차나무에 자라나는 새 가지를/그늘에 키우려고 울 엮어 보호하네/육우의 <다경>에는 색과 맛을 논했으나/관가의 세다(稅茶)에서는 창기(槍旗)만을 취한다네/봄바람 불기 전에 싹 먼저 돋아나고/곡우가 돌아오면 잎이 반쯤 피어나네/조용하고 따뜻한 작은 도안 좋으니/비 맞고서 옥 같은 싹 많이 피면 좋겠네 -「양다(養茶)」-

김시습은 예종에 이어 성종이 즉위하여 널리 인재를 구하자 37세 되던 해 봄에 서울로 올라왔다. 그러나 그와 친분이 깊은 서거정, 정찬손, 노사신, 김수온 등은 이미 높은 지위에 올라 있었다. 그래서 또 벼슬에의 뜻을 접었다.서울에서는 성동에 폭천정사와 양주에 있는 수락산의 수락정사에서 오래 생활했다. 여기서 도를 단련하고 제자들을 가르쳤다.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고질적 반골 기질

47세 되던 해에는 갑자기 머리를 기르고 고기를 먹기 시작했다. 지난날의 죄과를 뉘우치는 제문을 짓고는 주위 사람들의 권유로 안씨 집안의 딸과 혼인하여 환속했다. 그러나 얼마 안 되어 부인이 죽고 말았다. 더욱이 이듬해에 ‘폐비 윤씨 사건’으로 세상이 시끄럽자 다시 방랑의 길을 떠났다.

십 년을 유랑하여 자연과 놀다보니/자연의 고질병에 춥고 더움 겁이 나고/큰 뜻은 남았으나 근력이 쇠하여서/여윈 학이 공연스레 높이 날려함과 같네/만 권의 책과 함께 이 산에서 늙으려니/그대 돌아오기 원하여서 내 그대 기다리리/훗날 석간변에 차 달이며/옷소매 같이 날려 산 이내 흩어보리 -「민상인(敏上人)」 중에서 -

정치 현실과 가정적인 비극 사이에서 자신의 호구지책에 대해 고민하던 갈등 상황이 계속되었다. 설악산, 춘천, 강릉, 한계, 청평 등을 떠돌아다니며 지방의 젊은이들을 훈도하거나 산수를 완상하며 시를 지었다. 설악산 ‘오세암’에도 김시습의 흔적이 남아 있다.

김시습의 삶은 충청도 홍산의 무량사였다. 병마와 싸우며 그는 자화상을 그리고, 쓸쓸한 김회를 담은 시를 쓰는 것으로 삶을 마치고자 했다.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유교도 불교도 노장도 섭렵하려 했으나, 그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경계적 인간, 시로 삶을 이어간 시인, 방외적 문학 장르를 만들어낸 사람, 이런 김시습의 별명 뒤에 차인으로서의 품격이 느껴지는 시들이 깔려 있다. 그 차시들에서 김스습은 괴팍하지 않았다.

새로운 이념과 질서를 원한 선구자는 평생 가정과 벼슬, 돌아갈 고향을 갖지 못한 감회를 시로 읊었다. 또 차 재배와 차 마시기 습관으로 일관된 삶과 연계되어 60여 수의 다시(茶詩)가 남게 되었다. 차에 있어서만큼은 김시습의 삶은 괴팍하지 않았고, 현실의 모순적 삶을 극복하지 못한 인간적 절망도 드러나지 않는다.

우리 차사에 삶과 일치된 차인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몇 되지 않은 역사 인물이다. 무량사의 김시습의 영정은 어쩐지 시대상에 대해 입을 꿋꿋이 닫은 ‘할말없음표’로 지금도 세상에 묵언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대동문화 77호 [2013 7,8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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