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9 선언이 있었던 다음 해인 1988년에 연세대 사회학과에 입학했던 봉준호 감독은, 젊은 시절 자신을 둘러싸고 있었던 시대의 공기를 예민하게 받아들였을 것이다.

아직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기 전의 남한 사회는 마르크스의 지적 엄밀함을 신뢰했고, 사람들 모두가 행복한 유토피아의 가능성을 저버리지 않았던 시절이기도 했었다. 하지만 장벽이 무너진 이후 전 세계는, 신자유주의라는 쾌속열차에 탑승하여 그 시스템에서 이탈하지 못한 채 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을 <설국열차>는 봉준호 감독이 자신의 거대 담론에 대한 인식을 현학 취미로 풀어낸 영악한 영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은 원작 만화에서 빙하기의 생존자들이 열차에 탑승하고 있고, 그들의 계급이 나뉘어져 있다는 설정 정도만을 가져와서, 완전히 새로운 자신의 이야기로 탈바꿈 시킨 영화를 만들어냈다.

이 과정에서 감독은 자신의 영화적 감수성을 곳곳에 아로새기며 관객들에게 지적인 만족을 선사하겠다는 전략을 수립한다. 우선 봉준호 감독은 체제의 전복에 대해서 냉소적인 시각을 견지하는 것으로 자신의 지식 상품을 공개한다.

모두가 평등한 세상은 없다

커티스(크리스 에반스)는 불평등에 맞서 싸워 일등칸을 차지하면 모든 것이 잘될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최종 목적지인 일등칸에 다다른다. 그는 그곳에서 윌 포드(애드 해리스)와 대화하며 체제 전복의 허망함을 깨닫게 된다. 커티스는 희생을 치르는 투쟁을 통해 윗자리를 선점했지만, 부의 균등한 분배가 아닌 다시 한 번 계급의 재배열이 필요함을 알게 되는 것이다. 이는 모두가 평등한 사회는 가능하지 않다는 감독의 목소리가 반영된 것이다.

인류 역사에서 수많은 혁명은 있었을지언정 함께 잘사는 유토피아는 없었다는 것을 반추해 보면, 봉준호 감독의 의견이 어불성설은 아니다. 이 거대담론을 봉준호 감독은 영화적인 상상력으로 제시하며, ‘사회 변혁’은 개에게 던져줘 버리고 ‘먹고사니즘’에 혈안이 되어있는 관객들에게, ‘다들 그렇게 살고 있으니 부담 가질 필요 없어’하고 나지막하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설국열차>는 한때 세상에 대한 불만을 품고 체제의 전복을 꿈꾸었지만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사람들에게, ‘당신 잘못이 아니야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아!’라고 읊조리는 것이다. 아마도 봉준호 감독에게 이상적인 체제는, 다시 말해 ‘인간과 세상을 담는 완벽한 그릇’은 요원하다는 인식일 것이다.

이 숙고가 있었기에 그 다음의 이미지를 준비할 수 있었을 것이다. 봉준호 감독이 인식하는 현재는 혹은 근 미래의 동력은 어린아이들이 엔진을 움직여야만 하는 가혹한 세상으로 상징화된다. 이 상징적인 이미지는 충격적이다. 바로 그 순간에 관객들에게 현 체제를 부정하도록 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비밀을 감춘 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전진해야 하는 세계는 폭파되어야 하는 것이다.

다양한 인류가 함께 탑승했던 설국열차

바로 여기까지가 구제 불가능한 지구를 날려 버렸던 <지구를 지켜라>의 장준환 감독과 같은 생각의 공유일 것이다. 하지만 봉준호는 장준환이 아니다.

장준환의 무(無) 대신에 봉준호는 희망을 선택하기 때문이다. 대폭발 이후에, 감독은 황인종 소녀와 흑인 소년 그리고 백곰을 설원 위에 배치하는 것이다.

이 대목은 봉준호 감독의 영리함이 빛을 발하는 순간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다양한 인류가 함께 탑승했던 설국열차에서 유색인종의 남녀가 살아남았고, 생명이 살 수 있다는 가능성으로서의 백곰의 활보는 관객들의 지적 수준을 고려한 속 보이는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간의 백인 남성이 지배해 왔던 현대사에 대한 반성을 이렇게 노골적으로 시각화하고 있는 점은 정치적 올바름을 소비한 것이며, 유색인종과 환경이라는 시각적 모티브를 활용하고 있는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다.

이렇게 은유와 상징 등이 직접적이고 명시적으로 드러나고 있는 대목이 많다는 점에서 <설국열차>는 그 격이 떨어지는 영화라고 할 수 있다.

꼬리칸의 최하위 계층에게 배급되는 유일한 식량인 단백질 블록이 바퀴벌레로 만들어진다는 상상력은 재치 있지만 장난스럽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터널 안에서 횃불을 들고 적들에게 대항하는 장면에서의 불의 이미지는 관객들의 학습된 무의식을 자극한다는 점에서 직접적이라는 것이다.

교육칸을 다루고 있는 부분역시 빤한 상징성으로 인해 그 의도가 반감된다. 이곳에서 아이들은 윌 포드를 신격화하는 영상을 보고 있는데, 미디어가 행하는 세뇌교육 현장의 친절한 묘사가 부담스럽다는 것이다.

또한 <설국열차>는 봉준호 감독의 전매특허였던 입체적인 캐릭터 묘사가 실종된 것도 불만스럽다. 전반적으로 인물들은 평면적이며, 보안 설계자인 남궁민수(송강호)와 요나(고아성)의 역할이 무엇인지가 모호한 것도 문제다. 감독은 이들에게 중요한 임무를 부여했겠지만, 정작 받아들이는 관객들이 눈치 채지 못한다면 그것은 서툰 연출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봉준호 감독의 연출력이 방금 지적한 핸디캡들을 극복해내고 있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외국 배우들과 해외에서 작업하는 악전고투 속에서, 무게감이 느껴지는 영화로 완성시켜 냈다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재능은 아니기 때문이다.

대동문화 78호 [2013 9,10월호]

조대영 광주독립영화협회 대표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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