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6시에 일어난다. 가벼운 몸 풀기 운동을 30분간 한다. 얼굴 각 부위와 머리 마사지를 하면서 1시간 이상 세면을 한다. 책상에 단정히 앉아 독서를 한다. 와세다 대학 문학과 재학 시절에 배웠던 <대학>, <논어>와 같은 강의록을 다시 읽으며 생각을 가다듬는다.

간소한 아침을 든다. 중앙지와 지방지를 읽는다. 주로 일본어 중국어 영어 회화란을 공부한다. 점심을 먹고 다시 독서를 한 다음 오후 3시에는 반드시 근처 공원으로 1시간 동안 산책을 나간다. 돌아와 저녁 식사를 하고 일기를 작성한 다음 8시에 잠자리에 든다. 102세 최초·최장수 시인의 평범한 일상이었다. 102세를 헤아리면서도 늘 시조를 쓰고 독서를 하며 기록을 하며 청대처럼 살던 한 시인의 일상이었다.

정소파 문학상 제정되다

시인은 어느 날 귀 치료를 위해 병원을 들렀다. 잠간 서있는 사이 문을 열고 들어오는 환자가 시인을 툭 밀쳤다. 그렇게 넘어졌다가 시인은 일어서지 못했다. 고관절이 다쳐 아픔과 충격이 너무 컸다. 2013년 7월 9일 전남대학교 부속병원에서 귀천했다. 한국문단의 산 증인이었으며, 광주문학상 중에 시인의 이름을 기리는 문학상이 제정되었다는 소식이 있은 후라 더 안타까움이 컸다.

시인의 3남 5녀 가족 중에서 2000년부터 13년째 아버지를 모셨던 정건우(73) 씨는 아직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값비싼 백자를 들고 있다가 갑자기 놓친 심정이다.”고 말한다. 광주시 문단장으로 하자는 권유도 ‘문인들에게 폐 끼치지 말라.’는 아버지의 말을 따라 거절했다.

시인의 방은 아직 시인의 온기를 그대로 담은 채 그때 그 모습 그대로이다. 장남은 수줍은 듯 웃고 있는 아버지의 영정을 평소 독서를 하시던 의자에 그대로 모셔두고 있다. 시인이 마지막 썼던 원고 중에서 부치지 못한 시조도 그대로 책상에 두고 있다. 시인이 떠난 방을 들여다보는 일은 수수롭다.

<시조문예>에 보내려다 시인의 타계로 이제 주인을 잃은 마지막 시 중의 하나다.

 

가야리/나도 인제/여기서 가야 하리!

살만치 살다보니 더 갈 길 없는 듯해

망연히 먼 하늘 보며 허튼 웃음 짓는다

산 길 다시 돌아봐도 거기서 거기런 듯

허망한 세월 속에 허망도 한저이고

발길을/가다듬으며/새로 고쳐/딛는다

고고 감/하염없이/빈 걸음 친 듯하여

허탈한 세월 속에 힘 돋워 걸어봐도

거기서 거기런 듯해 허탕 친 듯 아쉽다

-「가야리」의 노래

시인은 평생 동안 문학의 텃밭 안에서 살고 거닐며, 그렇게 마지막까지 살다 ‘거기서 거기런 듯’했던 인생에서도 다시 발길을 가다듬으며 ‘새로 고쳐 딛으며 살다’ 귀천했다.

청대같은 삶, 조용하고 겸손한 시세계

정소파(본명 정현민) 선생은 1912년 2월 5일, 광주광역시 남구 사동 100번지에서 출생했다. 문학잡지 <시조시학>에서는 2010년 겨울호에 원로시인 특집으로 정소파 선생의 문학 인생 80년을 다루었다. 거기에 정시인은 <백수(白壽), 눈앞에 두고>라는 시조를 발표했다.

사람살이/ 온(百)해래도/ 샘숫자 지나쟎다/ 내 살아 아흔 일곱 늙어옴도 몰랐었다/ 앞세운 지팡이로 해 그걸 일러 말할가?/ 날 새면/ 일찍 일어/ 하루살이 즐거웁게/나들이 시간되면 산기슭 고요 속에/잎푸름 그늘 아래서 하루해도 짧나니/절대로 찾아드는 적적(寂寂)요요(蓼蓼) 그 앞에서/때로 사람 그리울 때 더듬 찾는 마음으로/스스로 다가서 그는 천명 앞에 서 있다.

시인은 나이도 잊은 채 사람을 그리워하며 스스로 ‘시조 시인’이라는 천명 앞에 서서 하루도 빠짐없이 시를 창작한 시인이었다.

정소파 선생은 <샛골>이라는 한문서숙에서 한학을 공부했고, 지금의 서석초등학교 전신인 광주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뒤에, 현재 목포공고의 전신인 송정공립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32년에 일본 ‘와세다 대학’ 문학과에 입학해서 1934년에 졸업했다.

정소파 선생은 1929년에 <매일신문>에 ‘잃어버린 시’를 발표했고, 1930년에 <개벽>지에 <별곤건(別乾坤)>을 발표하면서 문단에 데뷔했다. 그는 일본제국주의자들의 한글 말살 정책에 항거해 투쟁했고, 광주학생독립운동(1931)에도 가담했다.

또한 동인지 <설창(雪窓)>(1942)을 간행했고, 1947년에 <동광신문>의 신춘문예에 시가 당선되면서 문단에 나왔다. 또 1957년에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눈 내리는 밤>이 당선되었다.

 

깜박이는 호롱불 아래/세 오누이 얼굴빛이/박꽃처럼 창백한/오막살이

주린 배 부둥켜 안고/점심 시간에 숨어 지내면/하루가 너무도 서글퍼서

제 여금 더듬는 꿈길은 어지러워

내려 앉은 지붕 위에/사운사운 쌓이는 눈이/이불인 향 고요히 덮어주는 밤

문풍지 우는 창가에서/물끄러미 지켜보는 엄마/돌리는 재봉틀 바퀴는 마냥 바쁘고

밤이 이슥하도록/달 달 달/달 달 다르르…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에/이윽고 새벽은 오는데

이렇게 눈 내리는 밤이면 먼 산에서 부엉이만 운다

-1957년 동아 신춘문예 「눈 내리는 밤」-

 

시인의 시가 더 크게 알려진 것은 대한민국 정부 주최로 열린 대한민국 건국 기념 제1회 전국백일장 대회 본선에서 <독임란사유감>으로 장원함으로써 대통령상을 수상한 뒤부터였다.

 

어느녘 못 다 버린 그리움 있길래/강파른 등걸마다 손짓하며 짓은 웃음

못 듣는 소리 속으로 마음 짐작 하느니라.

바위 돌 틈사구니 뿌린 곧게 못 벋어도/매운 듯 붉은 마음 눈을 이고 피는 꽃잎./향맑은 내음새 풍김 그를 반겨 사느니라.

꽃샘바람 앞에 남 먼저 피는 자랑!/벌 나비 허튼 수작 꺼리는 높은 뜻을…/

우러러 천년을 두고 따름직도 하더니라.

-「설매사(雪梅詞)」-

민족 시조와 그 가락의 심오함

정소파 선생은 전라남도 산업부와 여러 곳의 군청에서 16년간 근무했고, 6․25 이후로는 <호남신문>에 재직하다 여수중학교에 강요한 교장 선생님의 추천으로 교육계에 투신하게 됐다. 광주북성중학교 교원을 끝으로(1970) 퇴임한 후, 경신여고, 광주수피아여고 등의 초빙을 받아 후학을 양성했다. 박종화, 이병기, 김동리, 유치환, 이은상, 이호우, 이영도, 김상옥 등 문단의 시인들과 교유했으며, 김현승, 박흡 등 광주 출신 시인들과 우정을 나눴다.

정소파 선생의 문집으로는 시집 <마을>(1955), <천조(賤照)>(1973), <고독의 창>(1987), <정소파 시선집>(1988), 시조집에 <산창일기(山窓日記)>(1957), <슬픈 조각달>(1974), <죽풍사(竹風辭)>(1983)와 수필집에 <시인의 산하>(1966), <세월 가는 그림자>(1981), 동시집에 <정소파 동요동시선>(1971) 등 주옥같은 작품들을 상재했다. 또한 시조 분야의 문예동인지 <시예술>(1959), <녹오(鹿嗚)>(1999), <영산강>(1972), <시조문예>(1974), <민족시>(1977) 등의 창립에 참여했다.

“누를래야 억누를 수 없는 도도한 시흥의 일렁임에서 붓을 들면 저절로 써지는, 한편의 시조는 내 재간의 한계에 따라 그때그때 우열의 차이가 있지만, 서사이면 서사시로, 자연의 아름다움의 서경 앞에서 그런대로 졸작이나마 씌어지는 것을 어쩔 수 없습니다.” 시인은 평소 그렇게 말했다.

“뒤돌아 먼 백해 인생인데, 생애 속에서 조국의 온갖 수난의 질곡을 거쳐 가까스로 살아온 내 인생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소년시절부터 동요를 쓰기 시작해 동시로, 자유시로, 요즘은 시조를 다루고 있습니다. 우리 고유 민족시 시조는 그 가락의 심오함에서 옵니다. 시조는 쓰면 쓸수록 그 오묘한 깊이가 심원무궁해서 그 한계를 잴 수가 없습니다.”고 말했다.

역경을 이겨나가는 인간 의지와 자연을 시에 담아

정선생은 전라남도 문화공로상(1958), 가람시조문학상(1980), 현산문화상 본상(1987), 육당 시조 문학상(1988), 전남문학 공로상(1989), 한림 문학상(1990), 매창 문학상(1990),대한민국 르네상스 문학상(2002), 매천 황현 문학상(2007) 등을 수상했다.

고인은 호남시조문학회를 창립하여 후진양성에 힘썼으며, 한국지역문학인협회 고문으로 활동했다. 광주시 운암동 광주문화예술회관 앞에 <정소파 시비>가 세워져 있다.

고난 속의 인생 역경을 극복하려는 인간적 의지와 함께 자연과 교감하며 살아가려는 시인의 순수한 미적 감각을 순박하고 조촐한 시상 속에 얹어 표현하는 시조와 동요를 남겼다. 시조의 현대적 계승에 노력했으며 호남시조 문학을 대표하는 활동을 서두르지 않고 그러나 끊임없이 전개해왔다.

시인의 시조들과 시, 그리고 기록들은 ‘광주 문학관’이 설립되면 기증될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발표 시들이 정리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정리자는 자그마치 20세기를 통털어 시인의 시를 정리해야 하는 수고로움이 있을 것이다. 누굴 향해 시인의 타계 소식의 안타까움을 물으리….

대동문화 78호 [2013 9,10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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