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로서 방송 제작자로서 24년, 그리고 다시 방송 이용자 지원 기구의 4년여 임기를 마치고 이내 떠났다. 유럽 한 달. 일을 아주 놓고 길게 놀이가는 것이 마냥 설레임일 수만은 없었다. 오랜 습관처럼 내가 이래도 되나 하는 마음 한켠의 불안감도 없지 않았다.

유럽에 지낸 한달 그리고 배낭여행

‘일어나 두루 다녀보라 네게 주마’ 하신 말씀(창 13:17)을 깃발로 세우고 대학생인 두 아들과 배낭을 메고 나섰다. 약속대로 스코틀랜드에서 1년의 봉사활동을 마친 딸과 파리에서 합류해 넷이서 걷고 걸었다.

유럽의 7월은 아직 아침저녁으로는 제법 선선하고 낮 기온도 견딜 만한 날씨였다. 안내 책자와 도시별 지하철 노선도, 지도와 함께 프랑스 파리에서 이탈리아 로마, 피렌체, 피사, 스페인 바르셀로나, 체코 프라하, 스위스 인터라켄과 취리히 그리고 다시 파리로 이어지는 한 달여 여정이었다.

걷고 서고 줄서고 둘러보기, 다시 검색하고 묻고 예약하고 찾아가기, 넷이 함께 더러는 하루씩 각자 놀고 오기.

안팎으로 엄청난 규모의 박물관과 미술관, 고대 유적지와 아름다운 옛 성, 유서 깊은 강과 다리, 유명 대학, 수많은 대성당과 교회, 특히 찬탄과 경의를 보내지 않을 수 없는 가우디의 건축물들, 스위스의 초원과 알프스 만년설…. 그렇게 그들의 자연과 문화, 역사와 사람을 만나고 그들의 도시와 표정을 조금은 가까이, 새롭게 대할 수 있었다.

날마다 새로워지는 광장과 공원 문화

하지만 그들 스스로 의도하든 의도하지 않든 정작 그들이 보여주고 싶은 것은 선대의 찬란한 유물보다 그들이 만들어 비워놓고 채우며 날마다 새롭게 하는 광장과 공원이었다. 그곳 공원이나 광장이 대부분 기념물이라는 점에서 그것은 곧 그들의 열망이자 여유였다.

공원은 푸르고 광장은 붉다. 공원이 도시의 허파라면 광장은 그 심장이다. 도시인들은 쫒기 듯 내달리다 깊게 호흡하며 이웃들마저 정지된 물상처럼 느리게 바라볼 수 있는 것이 공원이다. 더러는 노부부가 의자에 두 다리와 몸을 펴놓고 치솟는 분수 따라 옛 시절을 돌아보기도 하고 더러는 홀로 잔디밭에 팔베개하고 드러눕거나 아니면 연인들끼리 포개어 사랑을 나누는 곳이다.

루부르 박물관과 개선문 사이 파리 튈르리 정원, 에펠탑과 어우러진 상드마르 공원, 파리에서 가장 오래된 뤽상부룩 공원, 바르셀로나 가우디의 구엘공원, 프라하 페트르진 장미공원….

그들의 공원은 작정한 듯 오래 전부터 널찍했고 또한 숲과 잔디밭, 연못 분수 등으로 편안하고 여유롭게 잘 가꾸어져 있었다.

쉼과 내려놓음, 뜀과 올려놓음의 조화

공원이 쉼이고 내려놓음이라면 광장은 뜀이요 올려놓음이다. 쉼 없이 팔딱대는 곳이다. 젊음과 자유와 만남과 어울림이다. 서로 내어놓고 어울려 즐거워하며 함께 누리면 된다. 광장은 역사 속에서 모여 선언하며 프라하의 봄처럼 계절을 바꾸기도 했으며 삶이 그러한 것처럼 때로는 퍼포먼스이기도 하다. 무명화가와 노래 춤꾼들이 저마다 한자리씩 꾸며가는데 그들의 땀과 흥이 고조되면 앞에 놓인 모자엔 동전이 쌓여가고 박수와 갈채도 이어진다.

자유와 평등 박애의 파리 시청사 앞 광장은 일년 내내 공연장이거나 선텐장이거나 스케이트장, 배구 축구장이었다. 몽마르뜨 광장, 바스티유 광장, 혁명 광장인 콩코르드 광장, 문화발전소 퐁피두센터 앞마당, 로마의 무명용사를 기리는 500인 광장, 베드로 대성당 앞 광장, 포플로 광장과 낡은 배 모양 분수로 유명한 스페인 광장, 3개의 바로크 양식의 분수가 늘어선 나보나 광장, 메르세우스상 등 예술작품이 가득한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과 미켈란젤로 광장, 피사의 사탑앞 두오모 광장, 바르셀로나 레이알 광장 등….

우리에게는 광장이 있는가?

그렇게 그들의 공원과 광장은 곳곳에서 도시 공간을 가장 넉넉하게 차지한 채 저마다 그들의 역사와 문화, 오늘의 목소리를 담은 채 현지인과 관광객들이 가장 쉽게 어우러지며 다시 새로운 이야기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것은 또 자연스럽게 우리의 옹색한 광장이나 형식적으로 급조된 공원들을 생각하게 했다. (아, 우리에게도 서울시청 앞 광장이나 옛 전남도청 앞 금남로 평화 인권 광장처럼 뜨겁고 눈부신 광장은 있었다)

나는 아버지로서 함께 한 세 아이들을 바라보며 여행 중 문득문득 나의 연로한 아버지를 생각하고 또 장기 휴가가 곤란하여 함께 떠나오지 못한 아이들의 어머니를 생각했다. 쉼이거나 충전이거나 나눔이거나 비전이거나 우리에겐 확실히 오래된 정원이나 새로운 마당이 필요했다.

대동문화 78호 [2013 9,10월호]

신선호 전 KBC 보도국장. 광주시청자미디어센터장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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