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문화란 말은 너무 거창하다, 무겁고 물컹하다. 뭔가 대담한 일을 하는 것 같다. 어떤 때는 문화란 말이 너무도 흔히 쓰인다.

난 중국 작가 루쉰의 <고향>이라는 소설의 문구를 인용해보고자 한다. ‘희망이라는 것은 원래 있는 것이라 할 수도 없거니와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실상 땅 위에 본래부터 길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니는 사람이 많아지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는 또 기획하는 문화가 이런 게 아닌지 싶다.

많이 다니면 길이 만들어진다

‘에포케’에서는 이러한 활동이 벌어지고 또 만들어지고 있다. 에포케라는 이름은 사실 철학 용어로서 ‘판단 중지’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올해 3월 지인으로부터 전남대 후문 부근의 공간을 소개 받게 되었고, 처음 들어설 때만 해도 특이한 공간이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마침 현재 지금 내가 일하고 있는 ‘아모틱 협동조합’에서 공간의 필요성에 대해서 적극적으로 검토했다.

활동의 거점지로 삼고자 임대하기로 결정을 내렸을 때 기대감보다는 솔직히 이 많은 곰팡이와 쓰레기들을 언제 다 정리해야할지 막막하기만 했다.

두 달에 거친 대대적인 정비가 끝나고 난 뒤, 에포케에 대하여 많은 고민과 실험을 투자한 결과, 현재 에포케에서는 실내 음악 공연, 나만의 컵 만들기 행사, 아침 영어 스터디, 꽃꽂이 연습, 영화 감상, 악기 교육 등 다양한 행사와 청춘들의 모임을 위한 임대 활동들이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그 중 현재 대표적인 행사는 실내 음악 공연과 아침 영어 스터디를 들 수 있다. 실내 음악 공연은 전남대학교 주변에서 지역 음악가들의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거점 공간 하나 만들어보자는 생각으로 시도하게 되었다. 올 8월 31일 첫 S.A.L(Saturday Acoustic Live)을 개최하여 별로 크지 않은 공간 안에 50여명의 관객들과 스텝들이 북적북적하는 분위기를 만들었다. 새로운 시도가 성공한 것이다.

그리고 지난 10월 3일 ‘Welcome To My Garden’이라는 제목의 공연에는 우리 지역에서 활동하고 있는 다양한 음악인 10여 팀이 한데 모여 연주 릴레이를 펼치고 즐기는 진풍경을 만들어 보기도 했다.

에포케는 전남대 후문 부근이라는 탁월한 위치에 비해 현재 그다지 많은 ‘단골’들을 확보하고 있지는 못하다. 실내 정비를 마치고 정식으로 공간을 개방한 지 이제 4개월째 되는 시점이다. 단지 현재 여러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홍보할 때 사람들을 초대하고 지인들에게 소개받아서 에포케를 방문하는 형태로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다.

문화를 창조하고 향유하는 거점 공간

하지만 이 공간에 대한 의미는 크다. 광주 청춘들, 일단은 가까운 전남대생들의 문화 거점, 하지만 단순히 이곳에서 열리는 문화를 향유하고 즐기고 가는 것이 아닌 직접 이 공간에서 문화 활동을 만들고 창조하는 거점으로 만들고 싶은 바람이다.

에포케의 총반장이자 관리자로서 앞으로 나는 이곳을 흥미로운 사람들의 창조 공간으로 만들고 싶다. 어떠한 문화 프로그램이 열리든, 나 혼자 기획하고 내놔서 사람들을 고객으로 끌어 모으는 것보다 함께 모집하고 기획하여 같이 만들어가는 ‘무언가’를 내놓기를 바라고 있다.

학생 신분으로 혹은 취업 준비생의 위치에서 우리는 얼마나 많은 기회들을 놓치는가. 내가 땀 흘리고 뚝딱하며 만드는 기회가 얼마나 많이 있을까. 이미 검증된 내용들을 배우고 학습하는 데 온갖 정력을 소비하는 우리네 청춘들, 그들이 그렇게 노력해서 들어간 직업 터에서는 역시 검증된 프로그램을 유지, 운영하는 데 또 남은 정력을 소비해야만 한다. 우리는 그들에게 작지만 즐거운 기회를 제공하고 싶다.

시대정신을 투영하는 문화 창조 작업의 거점

내 손으로 만들고 직접 섭외하고 스케줄 잡고 홍보하며 만드는 여러 가지 기획들을 뜻이 맞는 이들끼리 모아서 배치하고 뭔가를 퐁! 퐁! 퐁!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렇게 만들어낸 여러 기획들은 반드시 청춘들에게 의미를 담고 메시지를 던져주어야 한다. 더 나아가서 지속적이고 시대정신을 투영하는 의미 있는 움직임들을 양산해 내었으면 하는 욕심도 있다. 지금은 여기 에포케에 되도록 많은 사람들이 방문하는 곳으로 만들어나갈 계획이다.

기획을 꿈꾸는 청춘들에게는 이곳에서 어떤 재미있는 걸 해볼지 하는 기대와, 즐거움을 찾는 청춘들에게는 오늘은 이곳에서 뭔 재미있는 게 펼쳐질지 하는 기대들이 모여 쌓이는 곳이었으면 좋겠다.

실제로 아까 언급했던 실내 음악 공연 같은 경우도 여러 커뮤니티를 통하여 인원을 모집하고 있다. 현재 네다섯 명의 지원자와 함께 다음 공연을 어떻게 만들어볼지 고민하는 기획단을 하나 꾸렸다. 이것을 시작으로 여러 사람들이 각자 감독이 되어, PD가 되어, 작곡가가 되어 연출하고 만들어내는 다양한 집단이 모이기를 꿈꾼다.

이는 단순히 이곳을 찾는 사람들에게만 이익이 되는 것이 아니고 지역 대학생들에게도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전남대학교에 재학했던 사람으로서 대학주변에 다양한 문화 시설보다는 소비적인 놀이 공간과 유흥 시설이 가득하다고 항상 느꼈었다.

물론 필자도 그걸 즐기면서 대학 생활을 만끽하기도 했지만, 일회성인 즐거움이라는 허무함 속에서 항상 다음날까지 숙취로 고생하는 날의 연속이기도 했다. 지역 대학생들에게 좀 더 가까운, 좀 더 싼, 좀 더 편리한 공연을 만들어 보여주면 어떨까? 지역 음악가들에게 대중들과 더 가깝게, 더 진하게 자신의 노래를 들려줄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해 주면 어떨까? 이 둘을 파악하여 뭔가 독창적인 것을 만들어내며 기획하는 즐거움을 함께 나누면 어떨까? 이런 생각들 속에서 에포케 실내 공연이 계속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따뜻한 겨울 음식을 여기서 맛보자

그리고 나는 이 실내 공연이 지역 대학생들에게 ‘매주 금요일 저녁에 데이트하거나 술 마시러 가기 이전에 잠시 들러서 좋은 음악들을 편히 즐길 수 있는 곳’ 이라는 인상을 심어주고 싶다. 혹은 언제든지 이곳에 들러서 자신의 취미 생활을 만끽하고 특기를 벼르는 공간, 생각이 같은 사람들끼리 토론과 토의를 하면서 은밀한 비밀 모의 작당 같은 것을 할 수 있는 아지트 공간으로 이용했으면 좋겠다.

에포케는 그렇게 지금도 흘러가고 있다. 올 기분 좋은 가을에는 또 어떤 역동적인 것을 만들어볼까, 겨울에는 그곳에 둘러 모여 따뜻한 겨울 음식들을 맛보는 것은 어떨까, 하면서 다양한 상상들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곳에 머물러 있으면 판단은 중지! 상상은 시작! 하는 마음가짐을 갖게 되었으면 좋겠다. 그 상상으로 공간과 부족함들이 채워지는 곳, 그곳이 바로 이곳이었으면 싶다.

대동문화 79호 [2013 11,12월호]

김한열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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