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쓰면서 늘 경계하는 것이 있다. 편견이다. 기업이나 사람이 명세를 얻게 되고나면 자연히 예기치 않는 편견도 동반되기 마련이다. 에덴병원의 명성 또한 남다른 데가 있다 보니 은근슬쩍 기대감이 높았던 모양이다. 요즘 어지간한 병원이나 기관, 혹은 기업 입구에 맞춤한 그림 한 점 없는 곳은 없다.

하물며 1993년 개원 이래 만 20년이나 된 병원에 ‘그림이 없다?’ 이런 것은 굳이 상상할 필요가 없는 문제다. 더구나 광주광역시는 속살이야 어쨌든 예향의 면모와 함께 아시아문화중심도시를 일구고 있다. 대한민국 최고의 자연분만율을 자랑하는 에덴병원이 광주에 있다는 것이 자랑거리고 보면, 병원 곳곳에서 풍성한 문화예술의 향취를 만나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산부인과의 특성이 여성들이 주로 찾는 곳이니 만큼 더욱 정서적인 면을 고려해 그에 걸맞은 그림, 사진, 조각 등이 다양한 환자들을 안정감 있게 해 줄 중요한 요소라는 생각쯤은 의례히 할 수 있다. 그런데 에덴병원 허정 원장(64세)은 이런 모든 생각을 일격에 물리친다.

의사 가운 한 벌이면 족해

“병원은 병원다워야 하는데 병원들이 모두 변했어요. 기준과 가치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시대를 휩쓸고 있어서 병원도 그런 영향권 안에 있는 거죠.”

병원 1층 대기실 로비에 30분을 기다리며 곳곳을 기웃거려 봐도 소품 한 점도 걸려 있는 것을 보지 못했다고 했더니, 대수롭지 않게 답변한다. 솔직히 말문이 막혔다. 더 이상 에덴병원에 머무른다는 것이 무의미할 정도로 암담했다. 그래도 그렇지 20년 된 병원이 흔한 미술품 하나 없을 리가 없지 싶어 재차 여쭤도 소용이 없다.

“나는 예술 분야에 조예가 없어요.”

아무 거리낌이 없다. 이렇게 답을 하는 허 원장의 태도에는 한 점의 망설임이나 겸양의 태도란 것이 느껴지지 않을 만큼 간결하고 담백한 대답이 이어졌다. 단순한 인사가 아니라는 것인데, 주변의 시선 따위는 개의치 않는 눈치다.

“의사가 가운 한 벌이면 족하지 뭘 더 바라고 내세울 게 있겠어요.”

산부인과가 병원의 특성상 사회생활을 편하게 할 만한 형편이 아니라는 말과 함께 넌지시 털어놓는 말이다. 음악회나 전시회가 있다 해도 일일이 찾아다니기 쉬운 것은 아니란다. 갑자기 찾아오기 마련인 분만 직전의 임산부들 때문에 실상 마음을 내기 힘들다는 고백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새로운 생명의 탄생을 관장하고 지켜보고 생명의 환희로 가득한 병원에 그림 한 점 없다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우리 병원은 바름과(正) 믿음(信)을 바탕으로 지금까지 해왔어요. 분만이라는 것이 가장 극적이고 신비스러운 일이죠. 그만큼 위험 부담이 큰 것도 사실이고요. 대형 의료사고의 절반 정도가 산부인과에서 발생해요. 그런데 여기에 삿된 것이 개입된다면 어떻게 되겠어요. 생명이 소중하고 아름다운 만큼 인간으로서 인간에게 바르고, 인간이 인간에게 믿음을 주는 것이 최우선이라고 봅니다.”

최근 우리 사회에 일고 있는 산부인과 의사 기피 현상이나 산부인과 병원이 사라지는 세태가 이곳 에덴 병원에도 영향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산부인과가 사회적 변화와 정부의 현실을 모르는 탁상 정책으로 초토화됐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는다.

그림이나 예술 전반에 대해 무감한 것이 아니라, 허 원장이 그리고 있는 그림은 현실의 상황이 훨씬 극적이고 사실적이라는 생각에 머물고 있다고 느껴졌다. 다만 필자만이 편견에 사로잡혀 그림을 보고 그림을 찾아 헤매고, 음악을 들으면서도 음악을 찾는 꼴이다.

여성의 눈물과 환희를 창조하는 행위예술가!

허 원장을 만나기 위해 진료실 밖에서 30분이 넘도록 기다리는 동안, 침울한 표정을 한 중년의 여성이 대기실 의자에 앉아 자신의 이름이 불리기를 기다리다 결국 훌쩍이며 눈물을 몰래 훔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동행한 친구의 손을 잡고 조바심치며 종종걸음으로 진료실로 들어가는 것을 내내 지켜봤다.

10분 정도가 흘렀다. 통상 생각해 보면 꽤나 긴 진료 시간이 걸린 셈이다. 문이 열리고 밖으로 나온 그 여성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곳에는 허 원장을 만나기 전의 한 여성과 허 원장을 만나고 난 다음에 한 여성이 완전히 다른 여자처럼 서 있는 것 같았다. 이토록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는 작품을 어디에서 만날 수 있을까? 허 원장은 그림을 구경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아니라, 여성의 눈물과 환희의 순간을 직접 창조하는 행위예술가구나라고 순간 깨달았다.

아이 한 명을 낳는 과정에 필요한 의료 인력이 25명 정도가 된다고 한다. 언뜻 이해하기 어려운 숫자다. 그러나 허 원장의 설명은 시종일관 명쾌하다. 생각해 보라는 식이다. 의사와 간호원, 조무사, 조리원 인력 등 아이가 한 명 태어난다고 하면 아이와 아이 엄마를 위한 인력은 무조건 100%가 가동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 경제 논리로 어느 것 하나를 생략하고 긴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같이 한 생명의 탄생을 위해 협업하고 조화를 이루는 일의 정점에 허정 원장이 늘 필요하다. 그러니 의사로서 경영자로서 한가로이 자리를 비우는 일이 외부에서 보는 것만큼 쉽지 않다는 것이다.

자연분만이 아주 어렵게 된 경우라고 하더라도 에덴병원은 담당 의사 혼자서 수술을 결정하지 않는다고 한다. 자연분만이 아이에게나 아이 엄마에게 얼마나 더 이로운가를 아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마지막까지 신중에 신중을 기한다는 설명이다. 포기하지 말아야 할 가치와 철학, 원칙의 문제를 쉽게 포기하는 것이 우리 사회를 혼탁하게 한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특히나 생명 경시 풍조나 인간성 상실, 안정된 정서, 안정된 정서를 담은 인간성 등은 산부인과의 자연분만과 제왕절개 수술이라는 선택 과정에서부터 비롯된다는 믿음의 반영이라고 풀이된다. 과학자로서의 생명에 대한 가치와 존엄을 수호하는 윤리적 실천을 에덴병원은 타협하지 않겠다는 것이다. 이같은 책임과 소명 의식을 지키기 위해 자연분만을 포기해야 하는 최종 순간에 ‘최선을 다했는가.’를 함께 묻고 함께 숙고한다는 것이다.

에덴병원은 이런 점에서 개인 예술을 하는 공간이 아니라 집단 예술, 공공 예술의 현장이라고 할 수 있다. 허정 원장은 바로 이 집단예술촌의 ‘촌장’이나 ‘이장’쯤이라고 해도 좋을 것 같다. 우리 지역에서 가장 정통성과 철학, 생명과 환희 감동이 일상적으로 흐르는 예술 마을이자, 감동적인 예술 작품이 에덴병원인 것이다.

우주와 나무의 교잡(交雜)이 일구어낸 공간

마을 자체가 예술인 곳에서 예술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우매한 필자에게 그래도 굳이 ‘그림’을 찾는다면 ‘식당’에나 가야 찾을 수 있을 것이라며 안내해 준다.

안내해 준 병원 지하 직원 식당에서 만나게 된 작품은 손영환(목포대학교 미술학과 교수)의 “CHAOSMOS - 나무 두 그루 01”(Digtal Print, 2005년)이었다. 광남일보 김옥조 편집국장은 그의 책 <행복한 남도미술 산책>(대동문화재단, 2011년)에서 호남 근현대 화가 84인의 삶과 예술을 담았다. 그 84인 중에 한 명이 서양화가 손영환이다. 나무 두 그루의 강인한 생명력과 푸르른 기상이 기하학적 형상을 한 구형의 입체와 교잡(交雜)하고 있는 모습은 이곳이 산부인과라는 생각에서 보면 맞춤해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실제 에덴병원의 분위기에 맞춰 손영환의 작품이 이곳에 걸린 것은 아니란다. 앞서 말한 대로 허 원장은 병원문을 잘 나서지 않지만, 대신 자신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곳이면 손길을 마다하지 않는다고 한다. 손영환의 작품도 허 원장이 보낸 후의에 대한 감사의 뜻으로 전달된 것이란다.

그의 작품은 2011년 서울 갤러리 이앙에서 선보인 개인전 ‘만화경 세상’의 출발점에 해당되는 작품으로 보인다. 추상성과 실경의 절묘한 조화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주제 의식을 강렬하게 만들고 복합적인 상상력의 극대화를 꾀하고자 하는 작가의 의도가 고도로 은유화하지 않은 단계에 있는 작품이었다.

둥근 원형의 세계와 우주를 연결하는 상상력은 딱히 색다를 것이 없는 사유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초록 나무의 기상과 욕망의 자세도 주제의식이 평이하기는 마찬가지다. 손영환의 작품이 무거운 주제를 단순한 구도 속에서 그 함의(含意)를 천연덕스럽게 던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우주의 원리, 자연의 욕망과 성장의 평범(平凡)과 무상(無常)이 예술적 기교 안에 있지 않고 바로 보이는 것 자체에 있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기 때문인지 싶다.

에덴병원이 가장 예술적인 공간, 신의 영역이 관통하는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담백하고 깨끗하면서도 군더더기 없이 생명 그것 자체에만 시공간을 할애하는 것과 손영환의 작품이 일맥상통한다는 생각이다. 이런 생각마저도 이곳이 산부인과 병원이기에 더욱 그렇게 풀이되는 측면이 있지만, 어쨌든 손영환의 작품은 엄마와 아이 사이를 잇는 탯줄처럼 에덴병원의 역사와 전통을 잇는 영양분이 되고 있었다.

한국 최고의 미술관이자 예술 작품

다음에 만난 작품은 우리 지역 중견 화가 김해성의 판화 “숲의 친구들-선물”(실크스크린, 2012년)이다. 에덴병원이 소개되고 나면 사람들은 놀랄지도 모른다. 예술 작품의 부재에 놀라고, 걸린 작품의 검박함에 두 번 놀랄 것이다. 한 가지 더 이처럼 몇 안 되는 그림마저도 식당에 걸어 놓은 무감함에 기겁할지도 모른다.

그나마도 김해성의 작품은 에덴병원에서 가장 화려한 색감과 활달함을 갖춘 무대를 선사한다. 상당히 튄다. 당초 김해성 작가의 최근 작품들은 유화와 판화를 막론하고 유년의 동화 속을 여행하는 듯한 작품이다.

그러나 에덴병원이 병원으로서의 충실한 기능에만 목매는 동안, 뻐꾸기가 자신의 알을 남의 새 둥지에 낳아 키우는 것처럼 에덴병원은 ‘숲의 친구들’을 ‘선물’처럼 키우고 있었다. 바쁜 병원 업무에 쫓겨 허겁지겁 점심을 맞이하는 병원 식구들에게 김해성의 작품은 파프리카처럼 상큼하고 싱싱함이다.

필자는 그림이 있는 곳은 그곳이 어디가 됐든 갤러리요, 미술관이라는 생각을 감히 하곤 한다. 그러나 어느 결엔가 항상 그림이 있어야 할 만한 공간, 그림과 어울릴 만한 공간을 상상하고 기대하는 것 또한 쉽사리 포기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이번 에덴병원 방문을 통해 깨닫게 되었다.

병원을 돌아 나오면서, ‘병원은 병원다워야 한다.’던 허정 원장의 말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작가의 창작 공간을 떠난 그림이 갤러리와 미술관을 거쳐 그 어딘가에서 어떻게 존재하는가를 조명하는 작업이 이번 기획의 묘미라고 할까. 그런데 생각보다 너무도 빨리 새로운 사실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치열한 삶의 현장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사실을 놓쳤다는 사실이다. 에덴병원은 한국 최고의 미술관이자 예술 작품이었다.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고 생명의 가치를 지켜가는 곳이 곧 예술영역의 최댓값이지 않을까. 작품과 예술을 대상물로 인식하고 그 대상물 속에서 세상을 해석하려는 우매한 행동을 겁 없이 반복하는 일을 여기서 멈춰야겠다.

대동문화 79호 [2013 11,12월호]

설정환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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