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과 마음이 다 아픈 시대다. 아프면 약을 구해 먹고 아픈 세상을 견디면 된다. 그런데 아프면서도 병원에 가고 약을 구할 수 없을 정도로 가난한 사람들도 더러 있다. 그런 소식을 들으면 더 아프다.

서울 강서구 가양동의 구암공원에 있는 의성 허준(許浚; 1539~1615)의 동상은 어린 소녀처럼 보이는 환자 곁에 앉아 이마를 짚으며 진맥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아픈 아내나 아이의 곁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있는 모습은 지켜보는 사람을 더 마음 아프게 한다.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 기념 축제 열리다

마침 구암공원과 허준 박물관에서는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 행사가 열리고 있었다. 구암(龜岩) 허준은 이곳 강서구 가양동에서 출생했고, 이곳에서 <동의보감>을 집필했고, 또 이 위대한 저작을 끌어안고 최후를 마쳤다는 허가바위(서울시기념물 제11호)가 또 바로 곁이다.

한의학을 집대성한 허준의 숭고한 인간애와 학문적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한국 최초의 한의학 전문 박물관이 바로 허준 박물관이다. 그리고 이곳에 들러 대한한의사협회와 한국한의학연구소가 근처에 있는 것을 처음 알았다.

한의학 박물관은 2005년 문을 열었다. 지상 3층 규모로 허준 기념실에는 허준 관련 유물, <동의보감(東醫寶鑑)> 제작 과정 및 집필 모형, 허준의 저서와 한의학 관련 서적, 한의학의 미래 등에 대한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동의보감>에 나타난 약초와 약재, 처방별 약재 자료가 전시되어 있다. 체질 알아보기, 한의학 체험 공간실 외에 약초공원에는 <동의보감>에 나타난 약초 70여 종을 재배하고 있었다.

올해 14회 의성 허준 축제는 10월 12일과 13일 열렸으며, <동의보감> 발간 400주년을 기념해 열렸다. 허준 마당극, 열정 콘서트, 한의약 약재 체험관 운영, 세계 음식과 풍물전 등이 다채로웠다. <동의보감>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2009년 지정되었고, ‘힐링’을 찾아 아픈 몸과 마음을 이끌고 현대를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폭넓은 관심을 받았다.

약초 공원 체험의 숲에서 차나무를 찾아보았으나 없었다. 차인들에게 <동의보감>은 차가 약으로 쓰인다는 의학적 소견을 적어놓은 최초의 책이다.

차는 아픈 몸을 다스리는 약이다

1596년 5월 선조는 전쟁과 기근의 고통으로부터 백성을 구할 방도를 찾으라는 어명을 내린다. 어의 허준은 정작, 양예수, 김응탁, 이명원, 정예남 등 태의와 유의 5명이 함께 의서 편찬을 시작한다. 그러나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면서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선조는 의서 500여 권을 허준에게 내어주며 혼자서라도 집필하라고 격려한다.

두 번의 왜란 동안 임금을 보필한 공로로 1604년 허준은 ‘양평군’을 하사 받는 등 파격적인 직위에 오르게 되고, 다른 신하들의 질투를 사게 된다. 1608년 선조가 급사하자 그 책임을 지고 의주로 귀양을 가게 된다. 광해군은 허준을 내치라는 공신들의 탄원을 막아내며 의서 저술을 격려한다. 마침내 1613년 11월 광해군 5년 <동의보감> 활자본이 25권 25책으로 탄생한다. <동의보감>은 당대 아시아 최고의 의학서로 불멸의 명작이다. 동아시아 한의학 정보를 집대성한 일종의 임상 백과사전으로 내경편, 외형편, 잡병편, 탕액편, 침구편 등 다섯 편으로 이루어져 있다. 다양한 질병과 그 치료 방법을 제시하고 병의 발생 원인까지 밝혔다. 그리고 수백 수천에 달하는 기존의 의학 이론가 서적을 집대성해 한의학의 새로운 길을 모색한 역작이다.

다섯 가지 맛이 나고 아홉 가지 공덕이 있다

이 <동의보감>의 「고다편(苦茶編)」에 허준은 차를 ‘작설차’라 한글로 쓰고 ‘차나무의 성질은 약간 차고, 맛은 달고 쓰며 독이 없다. 기운을 내리게 하고, 체한 음식을 소화시키고, 머리와 눈을 맑게 하며, 소변을 잘 보게 한다. 또한 소갈증을 멈추게 하고, 잠을 적게 자게 해주며, 화상 입은 곳의 독을 없애준다.’고 적고 있다.

차나무의 여러 가지 이름도 소개하고 있다. ‘나무는 치자와 같고 겨울에 잎이 나는데 일찍 딴 것을 차라고 하고, 늦게 딴 것을 명(茗)이라 하며 그 이름은 다섯 가지가 있다. 차(茶), 가(檟), 설(蔎), 명(茗), 천(荈)이다. (…) 어린 싹을 작설, 맥과라고 하는데 이는 싹이 아주 어린 것으로 납차라고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의 떡차와 같은 방식으로 먹거나 차를 마시는 방법도 소개하고 있다. ‘어린 싹을 따서 찧어 떡을 만든 뒤 불고 구운 것이 좋다. 입수족궐음경에 반드시 뜨겁게 마시라고 했다. 차게 마시면 담이 모이고 오래 마시면 사람에게서 지방을 빼서 여위게 한다.’고 적었다. 허준은 또 다섯 가지 맛이 나는 차의 공덕을 이렇게 적고 있다.

‘머리를 맑게 해준다. 귀를 밝게 해준다. 밥맛을 돋운다. 소화를 촉진시켜준다. 술을 깨게 해준다. 잠을 적게 자게 해준다. 갈증을 없애준다. 피로를 풀어준다. 추위와 더위를 덜 타게 해준다.’

또 녹차 외에도 국화 꽃잎을 끓여 먹으면 수명이 연장된다거나 무궁화꽃차를 끓여 마시면 풍을 다스린다며 여러 가지 꽃으로 차를 만들어 마시는 방법도 적었다.

허준은 또 「탕편(湯編)」에서 ‘물은 생명의 근원으로 생로병사의 열쇠를 쥐고 있는 것’이라고 했다. 허준은 물에 대해 모두 35가지라고 적어 물 중의 으뜸은 천기가 충만한 새벽에 처음 깃는 정화수(井華水)라고 했다.

허준은 양반 가문의 서자로 태어났다. 할아버지 허곤과 아버지 허론은 무관이었다. 허준의 의학 수업기는 기록이 전하지 않는다. 내의원에 들어가 <조선왕조실록>에 등장하기 전까지 허준은 선조 때 유학자인 유희춘(柳希春)의 문집에 등장하는데, 허준은 유희춘이나 일가의 병 치료에 참여하기도 하고, 유희춘에게 책을 선물하기도 한다. 1569년 유희춘의 얼굴에 생긴 종기를 완치한 적이 있는데, 유희춘의 신임을 완전히 얻은 계기가 되었다. 유희춘은 이조판서에게 허준을 천거하는 편지를 보냈고, 그 덕분에 몇 년 뒤 허준은 종4품 내의원 첨정의 자리에 오른다. 파격적인 승진이었다.

신화가 된 허준과 <동의보감>

1590년 광해군의 두창을 고치면서 비로소 남다른 의술을 인정받는다. 살아날 가망이 없어 보일 정도로 병이 깊었는데, 허준이 나서 과감히 고친 것이다. 선조는 정3품 당상관인 통정대부의 벼슬을 내렸다.

임진왜란 중 다시 한 번 광해군의 병을 고치면서 동반(東班)에 올라, 신분의 한계가 없어졌다. 임진왜란이 끝나자 선조는 피난길을 끝까지 함께한 허준을 공신에 책봉하고 종1품 숭록대부 벼슬을 내렸다. 조선 왕조가 개국된 이후 의관으로서는 최고의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1608년 선조가 세상을 떠나자 유배 길에 올라야 했다. 이때 바로 허준은 <동의보감> 편찬에 모든 열정을 바쳤다. 1609년 사간원의 극심한 반대에도 어릴 적 두 번이나 자신을 의학으로 살려낸 허준을 광해군은 내의원에 복귀시켜 자신의 병을 돌보게 했다. 허준은 완성한 <동의보감>을 광해군에게 바쳤고, 이후 역병에 관해 저술한 <신찬벽온방>, <벽역신방>을 편찬했고, 1615년 77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동의보감>은 조선 의서의 어머니로 평가되고 중국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져 그곳에서 더 많이 읽히는 동아시아 최고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리고 허준의 의술과 <동의보감>의 명성은 시대를 이어가면서 신화를 만들어냈다. 허준은 ‘신의(神醫)’로까지 불렸다.

그러나 이런 신화성이 허준의 진실은 아니다. 신화는 오히려 백성들에게 약 이름을 쉽게 알 수 있게 하라고 선조가 허준의 <동의보감> 집필을 독려하면서 내린 책자의 편집 방향이다. 백성들이 읽어 몸과 마음을 스스로 치료할 수 있는 의서를 남겨 시대를 뛰어넘어 한의학이 우리뿐만 아니라 동양에서도 탁월한 의학으로 자리매김하도록 한 그 선진성에 있다.

가장 천기가 충만한 정화수에 차를 끓여 차와 허준의 공덕을 생각하며 정갈한 마음으로 뜨거운 찻잔을 기울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조금이라도 치유될 것이다.

대동문화 79호 [2013 11,12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