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의 사랑(2012. 봄아필)>은 전남 강진 다산에 유배를 와 실학을 집대성하던 시기의 정약용에 대한 ‘소설 연구’이다. 강진 읍중 제자와 초당 제자, 홍씨 부인, 혜장과 초의 스님 등이 다산과 어떤 인간관계를 맺었는지 소설적 상상을 가미해 풀어나간 소설이다. 인간 정약용의 삶과 내면의 풍경이 오롯이 살아나고 있다.

“이 소설에서는 다산과 혜장과 초의 스님이 남겨놓은 기록들이 많아 쓰기가 쉬었습니다. 특히 혜장 스님을 다산에 비해 낮추어 평가하던 그간의 기록들의 관점을 반대하고 다산과 혜장이 유불을 떠나 얼마나 큰 영향을 주고받았는지, 그리고 혜장이 얼마나 천재적 감성을 지닌 스님이었는지 올바르게 평가하려고 노력했습니다. 이 소설에서 황상과 다산이 이별하던 장면에서 많은 남자 독자들이 울었다고 들었습니다.” 소설을 쓴 정찬주 작가의 설명이다.

강진 사투리 속에 녹아낸 다산 정약용의 고뇌

아름다운 풍경의 강진, 그 속에 녹아든 구수한 강진 사투리가 정겹다. 다산이 살았던 유배지들의 묘사를 통해 다산의 고독과 슬픔, 더 나아가 우리들의 고뇌를 애잔하게 느낄 수 있다.

다산을 스승의 예로 모셨던 초의 스님은 다산에게 한시 작법을 배웠는데, 초의 스님의 첫 번째 쓴 시가 바로 화순 쌍봉사에서였다. 정찬주 작가는 이 첫 번째 초의 스님의 한시를 기록으로 남겨 화순의 쌍봉사를 찾는 사람들이 읽어볼 수 있도록 했다. 또 쌍봉사 대웅전 옆의 안내문은 대웅전 목조 삼존불상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글도 소설가 정찬주가 쓴 글이다. 지장전 목조상 안내문도 썼다.

정찬주 작가는 쌍봉사 앞에 내려다보이는 길 건너 계당산 자락에 ‘솔바람으로 시비에 집착하는 귀를 씻어 불법을 이룬다’는 뜻의 ‘이불재(耳佛齋)’라는 집을 짓고 창작에 전념하고 있다. 작가는 “쌍봉사와의 인연은 금생에 겹겹이고, 전생에도 있었을 것이고, 내생에서도 있을 것이다.”고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13년 전인 2000년 이곳에 둥지를 틀었다.

<다산의 사랑>에서 정찬주 작가는 인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진리는 내가 날마다 밟고 지나가는 밭에도 있다. 절집에서 말하는 연기(緣起)의 가르침이다. 흙이 있으니 배추와 상추가 자라고, 배추와 상추가 있으니 흙이 살아나는 것이다. 햇볕이나 비나 바람 중에 어느 하나만 없다 해도 채소는 살아날 수 없을 터. 만물의 영장이라고 호기를 부리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알게 모르게 서로 얽혀 있는 것이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인연으로 얽혀 있다

정찬주 소설가는 1953년 전남 보성에서 태어났다. 쌍봉사는 작가의 할머니가 고향 보성 복내

면에서 쌀을 이고 가 불공을 드리던 절이다. 인근 쌍봉 마을은 15대조인 호남 명현 정여해 때부터 자리를 잡은 하동 정씨 집성촌이다. 그러나 보성에서는 태어나 1백일밖에 살지 않았기 때문에 특별한 추억은 없다. 6.25 전쟁 시기 제주도로 부산으로 피난을 다니다 광주에서 공부했다.

젊은 시절 작가에게 문학의 영감을 준 작가는 카뮈다. 실존주의와 카뮈의 전집을 독파했다. ‘인간이 갈구하는 것은 오아시스가 아니라 혼도 의지할 수 없는 사막이다.’ 이 말은 그 무렵 작가의 화두였다. 오아시스란 이상향이나 극락 같은 곳인데, 인간은 정작 지옥 같은 사막을 갈구한다니! 이 언명은 작가에게 큰 충격이었고, 사지(死地)로 몰아넣는 말이었던 것이다.

그 사지를 돌파하기 위한 문이 문학과 독서였다. 문학 수업기는 동국대 국문과 시절 동기인 박주관 시인과 동인 활동을 하던 시기다. 중고등학교 때는 문예부보다는 미술부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대학 2학년 때부터 신춘문예에 투고를 했다. 첫 번째의 응모 때부터 최종심에 올라 더 분발하는 계기가 되었다. 두세 차례 신춘문예에 실패하고 난 뒤 졸업을 하게 되어 교사로 나갔다. 그러나 다시 글을 쓰고 싶어 교직을 그만두었는데 그해 결국 한국문학 신인상을 받으면서 문단에 이름을 올렸다. 그 당시 문학 얘기를 나누던 친구로는 임철우, 연극인 박효선 등이었다.

동국대 국문과 다니던 70년대 소설을 쓰러 모포 하나 들고 수시로 쌍봉사를 찾았다. 쇠락한 절을 혼자 지키던 주지 스님은 길게는 한 달씩 그를 기꺼이 먹이고 재워줬다. 그 스님의 배려와 은혜를 못 잊어 나중에 소설가로 성공하면 ‘소설 불사(佛事)’로 쌍봉사를 일으켜 절밥 얻어먹은 빚을 갚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대학 4학년 때 그 스님에게서 편지가 왔다. ‘나 이제 생사를 끝낸다/얻은 것도 잃은 것도 없다.’고 이어지는 오언절구 한시였다. 그 편지를 받은 정찬주 작가는 스님이 절을 떠나 산으로 들어간 모양이구나 생각했다. 졸업하고 서울에서 국어교사를 하던 그는 스님이 강화도 절벽에서 뛰어내렸다는 소식을 1년 뒤에야 들었다. 그 편지는 절명시였던 셈이다.

마침 조계종이 월간 <불교사상>을 낸다고 해서 그는 학교에 사표를 냈다. 불교와 쌍봉사 주지 스님에게 진 묵은 빚을 갚겠다고 생각했다. 81년 <불교 사상>에 들어갔다.

3년 동안 잡지 만들고 경전 읽으면서 불교 공부가 깊어졌다. 84년에는 샘터사에 있던 대학 선배 정채봉에게 이끌려 일터를 옮겼다. 박몽구 시인이 후배였고, 정호승 시인의 후임이었다. 이곳에서 작가는 16년 동안 근무했다.

정찬주는 82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등단했지만 <불교사상>과 <샘터> 책 만드는 데 빠져 단편을 이따금 발표했다. 그러던 91년 암자 순례에 나섰다. 10년 동안 수행하듯이 암자 400곳을 돌며 200곳을 기행문 네 권으로 엮어냈다.

94년엔 만해 한용운의 삶을 담은 첫 장편 <만행>을 낸 뒤로 여러 고승 얘기를 소설로 썼다. 그중에 성철 스님 일대기 <산은 산, 물은 물>이 베스트셀러가 되면서 ‘불교 작가’로 이름을 높였다.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작가는 인도에 반해 몇 차례 다녀왔다. 거기서 브라만 계급 귀족들이 쉰을 넘어 할 일 다하고 자식 다 키우면 숲으로 들어가 남은 삶을 혼자 보내는 걸 지켜보았다. 자연을 스승으로 모시고 사는 그 임간기(林間期), 임서기(林棲期)가 부러웠다. 그는 화순 쌍봉사를 떠올렸다. “이제부터라도 나를 위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화순 쌍봉사으로 내려왔다.

이때 작가는 “나는 이제 여기서 뼈를 묻겠다.”고 선언해버렸다. 사이비 낙향이 아님을 보여주기 위해 이때 퇴거를 아예 화순군 이양면으로 해버렸다. 13년이 지난 올해 화순군 이양면에서 ‘자랑스러운 이양, 청풍인의 상’을 주었으니 이제 작가는 화순 고향에서 인정받는(?) ‘고향 사람’이 된 것이다.

이불재로 내려온 이후 한해 두 권 이상씩 책을 내고 있다. 새벽 네 시 정도 일어나 뒷산을 한두 시간 걷고 오전엔 글 쓰고 오후엔 밭을 일군다. 법정은 그의 집 사랑채 편액도 써 주고, 추운 겨울 잘 나라고 내복도 보내주곤 했다. 샘터사에 입사해서 법정 스님의 원고를 담당했다. 당시 법정스님은 불일암에 주석하시면서 월간 <샘터>에 ‘산방한담’이라는 원고를 연재했다. 2년 정도의 터울로 원고가 모아지면 단행본을 만들었다.

내가 만든 법정 스님의 단행본만 10여 권이 된다. 이런 인연으로 법정 스님의 재가제자가 되었고 스님이 입적하신 뒤에는 <소설 무소유>를 집필하게 됐다. 스님은 작가를 재가제자로 받아들여 ‘세속에 있되 물들지 말라’는 뜻으로 무염(無染)이란 법명을 내렸다. 법정 스님께서는 “석가모니 부처님은 한 분이면 족하니 너만의 꽃을 피워라”며 말씀의 죽비를 치셨다.

<샘터> 단골 필진인 최인호 작가와 교유하면서 소설 창작에 대한 불을 지피기도 했다. 최인호 작가는 ‘작가로서의 태도’를 가르쳐주었다. 명절 때 남들은 다들 글을 쓰는 것을 쉬는데 이 작가는 명절 때 글을 쓰러 들어가 두문불출했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작가의 실존

그래서 정찬주 작가는 혼자이길 원한다. 문단 정치를 실어한다. 무문관에 들어가 죽기 전까지는 길에 나서지 않겠다고 길과 문을 닫아버리는 선승의 패기로 글을 쓴다. ‘무소의 뿔처럼 홀로 가는’ 작가의 실존을 보여주고 있다. 또 그는 현장에서 보고 들은 것들을 글의 기초자료로 한다. “내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작가적 양심입니다.”고 단언한다.

작가의 문학에서 엿보이는 ‘불교적 명상이나 깨달음’에 대해 “저의 소설은 불교에서 그 몸을 빌린 것이 많지만, 그 본질은 종교를 떠난 문학의 보편성, 즉 한국인의 중요한 인간적 덕목은 무엇인가를 염두해 둔 인간 탐구의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고 강조했다.

“신라나 고려 때는 향가나 고려가사들 같은 불교 문학이 우리 문학의 중심부 역할을 했다. 그러나 지금은 주변으로 밀려나 있는 느낌입니다. 저는 불교 문학의 전통을 되살리는데 징검다리의 돌 하나가 된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미당 서정주나 고은을 넘어서는 더 좋은 작가가 나타나 우리 불교 문학으로 세계인의 사랑을 받는 역사성과 보편성을 얻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습니다.”고 강조했다.

정찬주 작가는 “한글 창제를 소재 삼아 <천강에 비친 달>이란 장편소설을 쓰고 있으며, 그것이 끝나면 대하소설 <아쇼카대왕>을 집필하여 작가로서 후반기를 장식하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50권의 작품을 남겼고, 죽을 때까지 100권의 작품을 남기고 싶다.”고도 말했다.

작가는 네팔 부탄 기행을 끝나고 이 기행에서 이곳의 언어가 우리말과 비슷하다는 것에 착안해 그 시원을 더듬는 글을 쓰고 있다. 기행을 끝나자마자 출판사에서 도착한 <조선에서 온 붉은 승려>라는 책을 선물로 건네주었다.

장편소설 <산은 산 물은 물>, <하늘의 도>, <다불>, <만행>, <대 백제왕>, <야반삼경에 촛불춤을 추어라>, <다산의 사랑> 등을 썼다. 산문집으로는 <암자로 가는 길>, <자기를 속이지 말라>, <선방 가는 길>, <돈황 가는 길>, <나를 찾는 붓다 기행>, <정찬주의 다인기행> 그리고 어른을 위한 동화 『눈부처』등이 있다. 1996년 행원문학상, 2010년 동국문학상을 받았다.

대동문화 79호 [2013 11,12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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