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국은 벌겋게 단 인두를 들고

낙죽(烙竹)을 놓는 일이지

한때는 산과 산을 뛰어넘는

사슴의 발자국을 남기는 줄 알았으나

한때는 맑은 시냇물의 애무를 견디다 못해

그만 사정해버리는 젊은 바위가 되는 줄 알았으나

결국은 한순간 숨을 멈추고

마른 대나무에 낙을 놓는 일이지

남을 사랑한다는 것

아니 나를 사랑한다는 것

남을 용서한다는 것

아니 나를 용서한다는 것 모두

낙죽한 새 한 마리 하늘로 날려 보내고

물이나 한잔 마시는 일이지

숯불에 벌겋게 평생을 달군

날카로운 인두로

아직도 지져야 할 가슴이 남아 있다면

아직도 지져버려야 할 상처가 남아 있다면

정호승 -「낙죽」-

사람의 삶이 그렇다. 늘 지져야 할 가슴이 남아 있는 것이고, 지져버려야 할 상처 또한 남아 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생의 낙죽’이 지겹기보다 단지 두려울 뿐이므로 시간이 지나면 상처는 안으로 단단해져 옹이가 된다. 생은 해묵은 상처를 인두로 지져버리고, 지지다가 또 다시 상처를 내는 그런 과정을 반복하다가 결국 서로를 보듬는 과정이다.

낙죽(烙竹)은 인두를 불에 달궈 대나무 표면을 태워 그림이나 글씨를 새기는 기법을 말한다. 낙화(烙畫)·도락(刀烙)·낙각(烙刻)·낙(烙)이라고도 한다. 낙화에 주로 사용되는 도구는 ㄱ자형 인두이며, 끝이 뾰족한 것과 무딘 것, 두 가지가 있다. 인두를 달구는 데는 소나무 숯불을 피운 질화로를 사용한다.

낙죽의 기본무늬는 대개 을자(乙字)·박쥐·구름·산수·사슴·송학(松鶴)·매화·난초·포도덩굴·죽엽(竹葉)·다람쥐·왕새우·속새·조 등 민화풍이다. 이 무늬들을 여러 가지로 변형시켜 그리기도 한다.

낙죽의 무늬는 간결하다. 농담의 차가 심하거나 선(線)의 오르내림이 있는 것은 잘된 작품이 아니며, 성글고 조밀함이 잘 조화되어야만 한다. 인두를 잘 부리는 것이 낙죽장의 능력이다. 인두가 뜨거우면 곧추세우고 식으면 눕혀서 온도를 조절해야 한다. 인두가 완전히 식기 전에 연속된 무늬를 완성시켜야 된다.

우연히 시작된 대마무 공예

조운창, 그는 인두를 아는 사람이다. 혹은 생의 상처를 아는 사람이다. 그도 지지다가 또 다시 상처를 내고, 그 상처를 인두로 다시 지지는 삶을 오랫동안 반복해 왔다. 그에게서 인두와 대나무를 빼고 나면 남는 게 아무것도 없다.

“서른다섯 살 되던 때 5월 8일 어버이날이었어요. 그때 이발소를 하면서 취미로 목근각(木根刻)을 했는데, 그게 자연 훼손죄가 되었어요. 당시 나무뿌리 채취는 사방업(防事業)에 역행하는 일이었거든요. 결국 전라남도 산림 기동대에 체포됐어요.” 젊은 시절의 그에겐 배짱이 좀 있었던 것 같다. 형기를 마치고 군수를 찾아가 덕분에 ‘잘 쉬었다 왔다’며 호기를 부렸다.

그 호기가 생을 바꾸는 계기가 될 줄은 몰랐다. 군수가 충고를 했다. 손재주가 있으니 불법인 목근각을 그만 두고 대나무 공예 쪽으로 눈을 돌리라는 조언을 해줬다.

단지 말에 그치지 않고 군수는 군청 직원들을 시켜 그에게 용달차 가득 대나무를 실어다 주었다. 그래서 1년 동안 쉼 없이 만들어볼 수 있었다. 그 결과 1년 뒤 ‘제1회 죽제품 경진대회’에 출품해 괜찮은 성적을 거뒀다. 그렇게 대나무가 일생의 업이 됐다.

낙죽을 만난 것은 조금 뒤다. 틈틈이 낙죽장 이동연, 국양문 선생을 찾아가 낙죽 기술을 익혔다. 세밀한 기르침 같은 것은 없었다. 그가 배운 모든 기술은 어깨 너머로 배운 것들뿐이다. 그러나 금방 성과를 냈다. 그는 ‘깎고 새기는 데’ 타고난 재주를 가졌다. 그 재주로 여러 일을 전전했다. 이발사와 전파기술자에 도장 파는 노점상을 한 적도 있다. 모두 손재주로 밥을 구하는 일이었다.

불의 온도가 결정하는 그림의 색

지난 30년 대나무로 무엇이든 만들었다. 필통과 차도구(茶道具), 죽비, 낚시대, 대나무병풍 등 그의 손을 거치면 모든 대나무는 쓰일 곳을 얻었다. 특허를 낸 상품도 여럿 있다. 대나무로 만든 머리핀과 대나무 호루라기, 대나무 차 숟가락, 대나무 휴대폰줄이 그것이다.

그의 생은 인두로 시작해 인두에서 끝난다. 낙죽이 그렇다. 인두의 온도가 그림을 결정한다. 숯불에 가열시킨 인두의 끝을 볼에 갖다 대 온도를 가늠하는 것으로부터 낙죽이 시작된다.

달궈진 인두는 섬세하다. 발갛게 온도가 오르면 반드시 인두닦개에 문질러 줘야 한다. 인두에 작은 재만 묻어도 불길 속에서 피어나는 그림이 일그러진다.

“손이 미세한 떨림도 없이 고정되어야 좋은 그림이 나옵니다. 단 한 번이라도 인두가 엇나가면 이전까지 그려낸 작품을 전부 다 망칩니다. 낙죽처럼 섬세한 일도 드물어요. 인두를 손에 들면 고도의 집중이 필요합니다.”

낙죽은 색의 명암이나 농도를 오로지 인두의 인도로만 조절한다. 인두 끝의 열이 높으면 대나무의 색이 검게 변하고, 열이 낮으면 옅은 갈색이 된다. 인두를 든 자가 열을 잘 조절하면 검정색과 갈색 사이에 무수한 색들이 작품에 고스란히 투영된다.

인두가 대나무 위를 지나가는 속도 또한 색을 결정하는 요소다. 빨리 그으면 색이 연하게 나오고, 천천히 그으면 색이 짙어진다.

인두의 온도가 작품의 모든 색을 결정하지만 인두의 온도 측정은 과학적 방법과는 거리가 멀다. 오로지 인두를 손에 든 장인의 경험과 감에 의존한다. “인두가 달궈지면 꼭 볼에 인두를 갖다 댑니다. 몸으로 온도를 읽어내는 겁니다.”

그가 평생 낙죽을 붙들고 산 이유는 우리 것에 대한 애착이었다. 인두를 들고 산 세월 30년, 그 시간에 대한 보상일까? 그는 노동부가 지정하는 ‘낙죽 기능 전승자’로 선정됐고, 2009년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 44호 낙죽장’이 됐다.

전통을 잇고 싶은 마음은 자식에게도 전이됐다. 두 아들이 전승 계승자다. 손자들도 휴일이면 찾아와 낙죽 기술을 배운다. 손자들이 서툰 인두질로 매화를 피워 낼 때면 그의 얼굴에서 환한 웃음이 핀다. 인두로 생의 상처를 지지며 그는 묵묵히 걸어왔다. 그는 인두와 함께 행복했다.

대동문화 80호 [2014년 1,2월호]

한경숙 기자  -08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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