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선비들의 계모임 그림(계회도)

옛 그림 한 장면 찬찬히 읽어본다. 수 백년이라는 간극은 그림과 나 사이의 건널 수 없는 강이런가. 빛바랜 종이에 남겨진 연한 먹빛, 늘 등장하는 산과 나무와 바위, 해독 불가능한 시를 따라가다 보니 이내 지루해지고 만다. ‘화중유시(畵中有詩) 시중유화(詩中有畵)’라지만 시도 그림도 일상 너머의 ‘흔치 않은 것’이 된지 오래다.

푸념하듯 조선시대 산수화 정도로 지나치려다, 커다란 너럭바위에 둘러앉은 작은 사람들을 발견한다. 깊은 골짜기의 적막을 깨고 흥에 겨운 이야기 소리가 들려온다. 안개 자욱한 강 가운데 가느다란 배 한 척이 보인다. 저 배를 타고 바위에 닿으면 그이들을 만날 수 있지 않을까. 고요한 수면을 헤치고 노를 저어 가 본다.

관리들의 모임

바위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아름다운 폭포가 한눈에 들어온다. 아련하면서도 우렁찬 소리는 담백한 자연의 연주다. 바위를 뚫은 운치 있는 두 그루의 소나무까지. 이곳은 그야말로 선경(仙境)이다.

나무다리를 건넜거나 배를 타고 이곳에 왔을 일곱 사람이 술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다. 나머지 두 사람은 이들의 술잔을 나르며 웨이터 노릇을 하느라 분주하다. 사각 상에 준비된 술항아리가 제법 크다. 소나무 마디 넣어 빚은 송절주(松節酒)나 그윽한 가을 향을 머금은 국화주가 담겨져 있지 싶다.

서둘러 긴 제목과 여백을 채운 화제(畵題)를 찾아본다.

당시 과거에 함께 급제한 선비들 / 십년 동안 과명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정 신하로 요로를 같이해 새로운 계는 아니나 / 도성 아래 부서가 나뉘어 각기 반열이네

가는 곳마다 진면목 펴지 못해 / 한가함을 틈타 좋은 강산으로 향하네

서로 따라 잠시 세속 굴레 벗어나니 / 술잔 앞에 두고 우스개 소리 막지 마소

(광주박물관 2007특별전Ⅵ 하서 세상으로 나오다‘하서 김인후와 필암서원’발췌)

제일 위에 전서체로 쓰인 제목은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蓮榜同年一時曹司契會圖)’. 아, 과거 급제 동기생들의 계모임이구나.

조선시대 관리가 되기 위해 치렀던 과거시험을 문과는 용방(龍榜), 무과는 호방(虎榜), 소과는 연방(蓮榜), 대과는 계방(桂榜)이라 별칭 했다. 즉 제목은 같은 해, 같은 소과 시험에 합격하여 조정의 관리[曹司]로 지내고 있는 이들이 모인 동기생들의 계모임을 그린 그림이라는 뜻이다.

선비들의 빛바랜 앨범, 계회도

입신출세하여 조정 곳곳에서 활약하고 있는 동기생들이 모였으니, 그간의 번다함을 잊고 술 한잔 주고받으며 담소 나누는 장면을 그린 일종의 보고서이자 기념사진이다. 이 그림에 시를 쓴 사람은 장성 출신 조선 유학의 거두 하서 김인후(河西 金麟厚, 1510~1560)다. 1531년(중종 26)에 과거에 급제한 김인후 등 7명이 11년쯤 후 1542년에 다시 한자리에 모인 장면이다.

양반관료 사회였던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문인들의 계모임은 70세 이상의 덕망 높고, 2품 이상의 관직을 지낸 원로 문인들로 이뤄진 기로회(耆老會), 그리고 동기나 동료, 동갑끼리 모이는 일반 문인계회가 있었다. 이렇게 봄, 가을의 세시절일이나 화창한 날에 산과 강에 모여 시와 술을 즐기며 친목을 도모하는 모습을 영원히 기념하기 위해 그린 그림을 계회도(契會圖)라고 한다. 오늘날 모임을 가진 자리에서 기념으로 단체사진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

계회도는 전문 화공이 참석자 수만큼 그 장면을 그려서, 하나씩 나누어 각자의 가문에 보관했다. 똑같은 장면의 계회도가 남아 있고, 간혹 TV의 문화재 감정 프로그램에 등장하는 이유이다. 계회도는 삼단으로 나뉜 일정한 형식이 있었는데, 연방동년일시조사계회도 역시 상단에는 전서로 쓴 계회 명칭, 중단에는 계회하는 장면, 하단에는 참여한 이들의 성명 및 자와 호, 본관, 관직 등을 기록한 좌목(座目), 그리고 그 좌우에는 묵죽과 묵매가 그려져 있다.

그림과 시, 여유가 함께한 모임

다산 정약용은 시를 알고 뜻이 맞는 지인들과 모임을 결성하고, 이렇게 약속을 정했다고 한다. 요즘 우리와는 어떻게 다른지 들어나 보자.

살구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복숭아꽃이 피면 한 차례 모이고, 한여름 참외가 익으면 한 차례 모이고, 서늘한 바람이 불어 서지에 연꽃이 피면 구경하기 위해 한 차례 모이고, 국화꽃이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이고, 겨울에 큰 눈이 오면 한 차례 모이고, 세모에 화분의 매화가 피어나면 한 차례 모인다. 모일 때는 술과 안주, 붓과 벼루를 준비하며 술을 마시며 시가를 읊조릴 수 있게 해야 한다. (…) 그러는 사이에 아들을 낳으면 한턱내고 고을살이를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한 턱 내고 벼슬이 승진한 사람도 한턱내고, 아우와 아들 중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있어도 한 턱 내도록 한다.

듣고 보니 바쁘기 그지없는 현대인들에겐 그림의 떡이다. 철따라 어떤 꽃이 피는 지 놓치기가 다반사. 한 턱 내는 것은 경제적인 고려를 해 봐야겠고. 무엇보다 여유로움이 일상이었던 옛 선비들에게나 가능한 일이었겠다. 다산의 벗들이 모일 때 준비해야 하는 것은 술과 안주 외에 ‘붓과 벼루’라는데, 요즘 우리들의 준비물은?...

계회도의 시대, 자연에 든 선비들의 심사

오늘날의 계모임 하면 으레 경제적인 목적을 위한 것들을 떠올린다. 하지만 지금처럼 계가 영리 목적의 저축 수단이 된 것은 건국과 한국전쟁 이후의 일이라고 한다. 사실 옛사람들은 실제 생활에 필요한 특별한 계를 만들기도 했는데 청상과부들이 만든 청상계가 있었고, 젖이 나오는 엄마들끼리 젖계를 맺어 아이들에게 젖을 먹이기도 했다. 향촌에서는 마을의 안녕과 친목, 상부상조를 기반으로 동계(洞契)가 만들어졌다. 이러한 다양한 모임은 오늘날 인터넷과 각종 매체의 발달로 정보공유와 친목도모를 위해 모인 동호회와도 다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조선시대 관리들의 계모임은 관직의 길로 들어선 이후 평생을 두고 이루어진 것으로, 일정 신분 이상의 직업, 혈연, 지역, 학연을 엮어주는 끈과 같은 것이었다. 게다가 일반 백성들의 모임과 달리 오직 관리들의 계회 장면만이 그림으로 그려졌으니, 계회도는 조선의 특수한 회화 장르였다고 할 수 있다.

16세기를 ‘계회도의 시대’라 할 만큼 문인들의 계회는 조선 중기에 접어들면서 유난히 활발하게 이뤄졌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개국 이후 150여 년의 세월 동안 조선은 숱한 정치적 홍역을 치르고, 새로운 사림 세력들이 정계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성리학에 바탕을 둔 도학과 선비 본연의 모습을 찾기 위한 사회 전반의 유교적 시스템을 갖춰갔던 시기. 과거 제도를 통해 선발된 관리들을 성리학적 틀 속에 안착시키고 지속적으로 이어주는 역할을 한 계회는 이 과정에서 정착된 문화 현상이었던 것이다. 계회도는 산수가 중심이 되고 정작 계원들이나 계회 장면은 아주 작게 상징적으로만 표현되는데, 항상 의관을 정제하고 있는 계원들의 모습에서도 이러한 유교적 분위기를 엿볼 수 있다. 속세를 벗어나 대자연에 흠뻑 취하고자 했지만, 조선의 성리학적 지배 질서에 포함된 이들은 결국 정치적으로는 행정 관료였던 것이다.

[대동문화 69호, 2012년 5.6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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