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甲午)년 해가 떴다. 떠오르는 해는 어제 오늘 똑같은데 새해 아침 떠오르는 해는 왜 이렇게 경건한가. 섣달그믐 시원섭섭 지던 해가 하룻밤 사이 희망과 설렘의 아이콘으로 다가선다. 올해는 ‘청말(靑馬)띠’의 해-힘과 순결의 상징인 유니콘(unicorn)처럼 신비로운 말로 알려진 ‘파란 말-갑오년’에 거는 기대는 크다.

한반도 역사 속 갑오년엔 잊지 못할 사건이 있다. ‘갑오경장(甲午更張)’과 ‘동학농민혁명’이다. 모두 1894년에 일어났다. 나라의 제도를 바꾸려했고 민족의 자존을 세우려 했던 일들이다. 불행하게도 실패로 끝난 이 사건들은 나라와 민족이 갈 길을 새롭게 조명하는 ‘역사의 교훈’을 남겼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은 인본주의(人本主義) 뿌리를 깊게 내린 ‘전라도 정신’의 큰 줄기다. 지역이나 도시에 ‘정신’을 붙여 사용하는 것은 세계적으로도 드물다. 전라도 정신은 한국 사회를 밝혀 온 촛불이었다.

전라도 정신 세계적으로 조명되어야할 진실

1592년 임진왜란 당시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백의종군, 왜군을 격파한 전라도 사람들의 애국정신은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라는 말을 남겼다. 전국에서 제일 많은 의병이 일어난 것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탐관오리를 축출하고 제대로 된 나라를 세우려고 했던 동학 정신은 3·1운동, 광주학생독립운동,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으로 이어져 왔다.

넓고 온화한 풍토와 풍요로운 물산(物産)은 ‘나눔의 정신’을 낳았고, 문화를 키우는 자양분이 되었다. 중앙에서 떨어진 이 땅의 사람들은 외적의 침략과 내부 단결을 위한 자조(自助)·자경(自警)정신이 남달랐다.

중앙의 정치판에 밀려 귀향한 송강(松江)정철, 당쟁의 파도에 밀려온 다산(茶山) 정약용, 고산(孤山) 윤선도를 비롯한 선비들은 민초들의 삶과 중앙 정치를 재조명하며 실학사상과 같은 민주 정신을 찾아냈다. 그리고 찬란한 문화를 만들어냈다.

농어업 중심의 1차 산업으로 이 나라를 먹여 살리던 전라도는 기계 산업과 첨단 산업이 경제 중심이 되면서 ‘떠나가는 고을’이 되었다. 그러나 세상은 돌고 돈다. 삭막한 공장과 각박한 배금주의(拜金主義), 물욕(物慾) 만연의 세상에 염증을 느낀 현대인들이 이제 다시 인간 중심, 자연으로 되돌아오고 있다.

자연 풍광이 넘치는 전라도, 한국적인 것이 온존한 전라도는 ‘문화의 세기’를 맞아 시대의 중심에 서게 될 것이다. 사람들은 잃어버린 ‘마음의 고향’-자연을 찾게 될 것이고 전라도는 그 마음의 고향 땅이기 때문이다. ‘힐링(치유)’이라는 단어가 넘치고 순천정원박람회가 성공한 것이 그 징조다.

전라도, 문화의 세기 시대의 중심에 서다

정부는 ‘창조 경제’의 기치를 내걸고 있다. 추격형 경제 개발에서 선도형 경제 개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문화가 돈이 된다.’는 얘기는 얼마 전까지도 비웃음거리였다. 그러나 지금 전라도가 문화로 경제 발전을 도모할 수 있다는 것을 확인시키고 있다. ‘문화 산업’이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문화 경제’는 창조 경제의 견인차다.

스무 살을 넘긴 ‘광주비엔날레’와 준공을 앞둔 ‘문화의 전당’이 희망을 불어넣고 ‘여수 엑스포’와 ‘순천 정원박람회’가 가능성을 입증했다. 지역마다 넘치는 문화 행사와 전통 음식과 힐링 명소들이 탁한 공기에 절은 도시 사람들을 불러들이고 있다.

이제 다시 호남의 명예와 전라도의 품격을 높일 시대가 온 것이다. 전라도를 부러워하고 ‘살고 싶은 고을’을 만드는 것은 우리들이 해야 할 책무다. 그러한 시대를 만들기 위한 조건 다섯 가지를 제안한다.

변화에 도전하라, 소통하고 교감하라

첫째, ‘군림의 조직’이 없어야 한다. 경직된 사회에 창조는 없다. 문화의 창조는 상하 관계에선 더더욱 이뤄지지 않는다. 특히 행정 조직의 일방적 파워는 삼가야 한다. 행정의 지원은 있되 간섭은 말고 예술인의 자율성을 보장해야 한다. 수평의 문화가 이뤄지고 시민 사회의 관심과 참여폭을 넓히는 방안도 필요하다.

둘째, 변화의 수용과 도전 정신이 자유로운 환경 조성을 해야 한다. 20년이 지난 광주비엔날레는 처음 ‘안티 비엔날레’가 생길 만큼 반대도 많았다. 초기의 ‘혼란’은 소통과 교감의 부족도 원인 중의 하나였다.

아시아문화전당의 콘텐츠 개발, 광주 폴리 운영도 처음엔 그랬다. 관심 있는 곳에 ‘시끄러움’이 있다. 이견이 많은 것은 그만큼 관심이 크고 다양성이 요구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친밀감을 갖고 편안함을 유지하려고 한다. ‘새것’에 대한 생소함과 거부감은 당연한 것이다. 창조물은 생소하기 마련이다. ‘창조적 파괴’와 ‘파괴적인 창조’는 구호가 아니라 인정해야 할 도전 정신이다.

셋째, 문화의 창조는 전통의 기반 위에 생성토록 해야 한다. 한국 사회는 전통을 무시하고 부정하는 습성에 젖어있다. 구도심·옛길·고건축물·역사의 터를 훼손해서는 안 된다. 특화시켜야 한다. 전라도의 대표 음식이던 ‘용봉탕’ ‘애저’를 찾는 외지인에게 안내할 식당이 없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다. 이런 전통음식 위에 새로 개발한 ‘육전’ ‘오리탕’ 등이 함께 해야 되는 것 아닐까.

넷째, 지역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상품의 브랜드화로 연결해야 한다. 인류 최초로 핵폭탄이 투하된 일본 히로시마는 피폭 이듬해인 1947년부터 지금까지 줄곧 ‘비핵 평화 도시’를 도시 슬로건으로 삼고 있다. 모든 도시 계획과 행정 방향을 여기에 맞춰 결정한다. 파리는 ‘문화 도시’ 헐리웃은 ‘영화 산업 도시’ 밀라노는 ‘섬유와 패션’으로 도시 얼굴을 정했다. 어느 도시나 곧바로 특징이 연상되어야 하는 것은 사람과 같은 이치다.

다섯째, 일과성 구호나 행사가 아닌 지속적인 운영과 변화를 추구해야 한다. 대전 엑스포의 실패가 여수 엑스포로 연결될까 걱정하는 사람이 많다. 월드컵 축구 때 탄생한 ‘붉은 악마’ 이후 세계를 흥분시키고 있는 ‘현대의 한류’는 ‘겨울연가’ ‘대장금’ 등 드라마와 영화에서 이젠 ‘싸이’와 ‘K-Pop' 등 대중음악으로 바뀌고 있다.

시대 흐름이다. 이 흐름을 타고 다음엔 무엇을 창조할 것인가가 궁금하다. 지속적인 변화는 훈훈한 ‘스토리텔링’과 함께 만들어져야 한다.

대동문화 80호 [2014 1,2월호]

서영진 언론인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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