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오는 날 종묘(宗廟)의 긴 정전을 바라보면 그 어두컴컴한 공간에서 누군가 매서운 눈초리로 내 쪽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느낀다. 무겁게 내려앉은 하늘과, 정전 처마 아래 어둑한 공간에서 맹렬한 시선이 눈발보다 더 서늘하고 차갑게 발광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 때면 등골이 오싹해진다.

사직단(社稷壇)에 가보면 종묘 때와는 느낌이 사뭇 다르다. 사직단 제례는 국가와 왕실의 가장 엄숙한 대례였을 것이고, 국가 행사인 사직대례는 그 준엄한 존칙이 서릿발처럼 날카롭게 참례자들을 지배했을 것이다. 그러나 토지신인 사(社)와 곡식의 신인 직(稷)은 너무 추상적인 숭배의 대상이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종묘사직은 일종의 추상체계였다는 말이다. 조선이라는 국가와 왕실의 정체성과 상징이었다. 국가는 지금도 세상에서 가장 큰 상징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일제는 그 상징체계를 짓밟아 동시에 백성들의 국가적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는 만행을 저질렀고, 지금도 그 기억을 가끔 주변 국가 국민들에게 환기시키고 있는 것이다. 독도 영유권 주장도, 야스쿠니 신사 참배도 다 그런 속심이 담긴 정치적 상징 행위이다.

제사도 종교 상징체계의 하나다. 사직단 대례도 물론이다. 사직대례는 왕실은 물론이고 일반 백성도 정해진 규모와 형식에 따라 제사를 지낼 수 있었다. 사직에 모시는 신은 국가의 위상에 따라 태사(太社), 국사(國社), 치사(置社) 등으로 구분되었고, 국가 안에서도 중앙과 지방의 제례에 차이를 두어 중앙 권력을 정점으로 하는 위계를 반영했다.

사람은 땅이 아니면 살 곳이 없다

‘사람은 땅이 아니면 살 곳이 없고 곡식이 없으면 길러질 수 없다.’ 이것이 사직단의 존립 근거였다. 그래서 나라를 세우면 토지신과 곡식의 신을 모신 사직단을 세워 백성을 살게 하고 길러주는 공덕에 보답했던 것이다. 사직제는 태사(太社)와 태직(太稷)이 북쪽을 향하면서 태사에는 후토(后土), 태직에는 후직(后稷) 신을 배향했다. 후토는 토지신, 후직은 곡식신이다.

백제 시대부터 사직제는 있었고, 조선 시대에 들어와 사직단 제례는 국가 제례 중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 사직은 민생에 관련된 최고의 신을 모신 제단이란 점이 강조되었고, 농업신과 연결되어 기우제(祈雨祭), 기고제(祈告祭)를 중심으로 운영되었다. 모든 국가적 제사를 지내기 위해서는 우선 종묘와 사직에 제사를 올렸다. 종묘는 서울에만 있었지만 사직단은 지방 주현(州縣)에까지 설치되어 수령들이 제사를 주관했다. <국조오례의>에서 국가 제사의 서열은 사직, 종묘, 영녕전의 순서였다. 그도 그럴 것이 백성이 없으면 국가가 없고, 땅이 메말라 흉년으로 백성이 굶주리면 국가를 다스리는 제왕은 백성들에게 할 말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존립 기반이 흔들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정조 대에 사직단 기곡제가 대사로 승격되면서 사직대제에는 기곡(祈穀), 춘향(春享), 추향(秋享), 납향(臘享)이라는 네 가지 제사가 있었다. 곡식을 기르는 철에 따른 제사였다.

소사(小祀)도 있었다. 비가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우제(祈雨祭), 비가 그치기를 기원하는 기청제(祈晴祭), 눈이 내리기를 비는 기설제(祈雪祭), 괴이한 일이 있을 때 거행하는 해괴제(駭怪祭), 귀신을 위로하는 위안제(慰安祭), 사직단 신위를 이동시키는 이안제(移安祭), 중요한 일을 알리는 고유제(告由祭)가 이에 해당한다. 국장(國葬)과 같은 국가의 중요한 의식 때 종묘와 사직단에 고했다.

국가의 제사에 차와 술을 올렸다

<세종실록> 17권, 4년(1422 임인 / 명 영락(永樂) 20년) 8월 14일(무술) 1번째 기사에는 이렇게 국장의 의례에 대해 서술한다.

예조에서 계빈전의(啓殯奠儀)·조전의(祖奠儀)·견전의(遣奠儀)·사후토의(祠后土儀)를 계하였는데, 그 계빈전의에 말하기를,

“사흘 앞두고 사직(社稷)과 종묘(宗廟)에 고하고, 하루 전에 충호위(忠扈衛)는 전하의 악차(幄次)를 빈전(殯殿) 앞에 조금 동쪽으로 설치하고, 왕세자는 그 뒤로 하는데, 남쪽에 가까이 하면서 모두 지형에 따라 적당하게 하고, 그날이 되면, 통례문(通禮門)은 전하의 판위(版位)를 전정(殿庭)의 길 동쪽으로 북쪽에 가까이 북향되게 하고, 공조 판서의 자리는 그 뒤로 북향되게 한다. 집사자(執事者) 한 사람은 재궁(梓宮)을 털고 닦을 수건을 가지고 그 뒤에 모시게 된다. 종실(宗室) 이하 문무 여러 관원의 자리는 외정(外庭)에 설치하되, 지형에 따라 적당하게 하고, 문관은 동쪽, 무관은 서쪽으로 하고, 중심이 머리가 되게 하되, 관위[位]가 다르면 여러 줄로 서게 되는데, 모두 북향되게 한다.

(…)지통례(知通禮)는 왕세자를 인도하여 위차에 나아가게 하고, 판통례는 전하를 인도하여 악차에 나아가 자리에 앉게 하고, 봉례랑(奉禮郞)은 공조 판서를 인도하여 들어와 위차[位]에 나아가게 하고, 통례문은 종실 이하 문무 여러 관원을 나누어 인도하여 들어와 위차에 나아가게 하여, 좌석 위차가 정돈이 되었으면, 지통례는 왕세자를 인도하여 들어와 위차에 나아가게 하고, 예조 판서는 악차 앞에 나아가 꿇어앉아 예를 거행하기를 청한다. 계하기를 마치고 구부렸다 엎드렸다가 일어난다. 판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악차에서 나와 판위에 나아가 북향으로 서게 한다. 판통례가 ‘재배하고 곡하라.’고 아뢰어 청하면, 전하는 재배하고 슬피 운다. 전의(典儀)가 ‘재배하고 곡하라’고 말하면, 왕세자 이하 위차에 있는 자는 모두 재배하고 슬피 운다. 판통례가 전하를 인도하여 관세위에 나아가 관세하기를 마치고, 전하를 인도하여 동계에서 올라와 영좌 앞에 나아가 북향으로 서게 하고, ‘꿇어앉아 삼상향(三上香)하라.’ 청하고, 근시가 다주(茶酒)를 드리면, 전하는 뇌다(酹茶)와 삼전주(三奠酒)를 한다.

선왕과 선후의 기신재제, 국장 의례인 계빈전의(啓殯奠儀)·조전의(祖奠儀)·견전의(遣奠儀)·사후토의(祠后土儀), 이밖에도 왕과 신하가 만나는 조회, 사신을 맞아들이는 의례, 왕과 왕비의 생신을 축하하는 진연 의식 등이 왕실의 큰 행사로 이런 행사에서는 빠짐없이 다주(茶酒)로 뇌다(酹茶)했다. ‘술’과 ‘차’로 의식을 존엄하게 한 것이었다.

일제는 이런 국가적 상징체계를 무너뜨리기 위해 사직단 제례를 크게 축소했고, 선농단과 선잠단에서 거행하던 제례를 사직단에 합쳤다. 그러다가 사직단 제례는 1910년 한일병탄과 함께 완전히 폐지되었다.

사직단 부지는 한일 병탄 이후로 국유지로 등록되어 있었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사직공원이 만들어졌다. 해방 이후에는 체육, 문화, 교통, 안보, 종교 시설들이 사직공원에 들어섰으며 서울 도시 개발로 역사적 경관으로서 의미가 퇴색되어왔다.

사직단 일원은 한양 성벽과 연결된 도성 내 서부의 유일한 녹지 공간으로 최근 서울시가 의욕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한양 도성의 세계유산 등재 노력과 함께 사직단의 복원 노력도 계속되고 있다.

또 사직대제의 정기적인 시연을 통한 대중적인 관심의 환기와 시민단체와 전문가 그룹의 적극적인 참여로 진행되는 대국민 홍보와 역사자료 고증 사업 등도 사직단 복원의 필요성을 촉발시키고 있다.

북-북악, 동-낙산, 서-인왕산, 남-남산으로 둘러싸인 조선의 심장부였던 곳. 이곳 사직단의 불필요한 시설들을 다른 곳으로 이전하고 사라진 재실들을 복원하고 사직제례와 제례악을 복원하는 것은 서울의 역사 생태도시로서의 위상을 높이는 일이고, 일제의 의해 훼손된 민본주의 국가 정체성의 회복을 도모하는 일이 될 것이다.

사직단 복원 민족의 찢긴 자존심 되찾는 일

사직단 복원을 위해 서울의 문화예술 단체인 재단법인 예올(이사장 김영명)에서 캠페인 서명 운동, 봉사 활동, ‘역사성 회복을 위한 포럼’, 다큐멘터리 제작, 퍼포먼스 등의 다채로운 시민운동을 계속해나가고 있다.

사직단은 종묘와 함께 국가의 정신적 근간이었다. 그리고 농업을 중시하고 풍요 속에 백성들이 살기를 바랐던 민본주의 통치 철학이 살아 숨 쉬던 공간이었다. 국가적 의례 중에서도 가장 큰 대례가 모든 백성들의 참여 속에 열리던 곳이고, 술과 함께 차가 진설되었던 곳이다.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과, 국가를 위하던 백성의 마음이 만나던 곳이다. 곡식과 토지의 신에게 국가가 가장 큰 예를 바치던 곳이다. 이런 사직단의 역사적, 철학적 복원은 우리 민족의 상징체계와 자존심을 되찾는 일이다.

사직단은 제단 위에 오방색인 청색, 백색, 적색, 흑색, 황색으로 된 흙이 방위별로 덮여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 사직단에는 황토로만 흙이 덮여있다. 그 황토 위에 서서 조선이라는 나라와 그 백성들, 우리의 선조들과 사직대제를 지내던 제왕들의 눈매를 잠깐 생각했다. 12월 26일 일본 아베 총리가 야스쿠니 신사 참배를 강행하던 날이었다.

대동문화 80호 [2014 1,2월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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