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 관련된 글을 써오면서 역사 사실과 역사 해석은 별개의 학문영역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다. 많은 역사학자들이 기록이나 유물 또는 구전을 통해 당시에 있었던 사실을 규명하는 데 평생을 바치고 있다. 기록 중심의 학자들은 기존의 기록들을 종합해 당시 상황을 설명하기도 하고 새로운 기록을 찾아내 과거 기록의 오류를 지적하기도 한다.

고고학자들은 유적과 유물을 통해 기존의 기록을 보완하기도 하고 기록의 잘못된 부분을 교정하기도 한다. 때에 따라 한문으로 쓰인 기록의 번역을 중심으로 시비를 걸기도 하고 명문이나 기록상의 글자를 가지고 논쟁을 벌이기도 한다. 이 같은 노력들로 역사 사실은 사실에 가깝게 복원되어가고 있다.

필자도 기록을 중심으로 그 시대에 실재했을 사실에 대한 관심이 높았던 편이다. 그런데 근래 나이를 먹어가면서 실재했을 사실의 진실과 함께 그때 일어난 사건과 유물·유적들이 어떤 인과 관계를 가졌는가에 더 관심이 쏠리고 있다.

글자 한자 한자에 집착하는 정확한 인식 못지않게 그 시대의 전체 상황 파악이 역사 공부의 과제가 되어야 하겠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 같은 학문을 일러 역사학이라 부르는 것 같다. 과거 사실의 정확한 규명은 그 규명 자체보다 어째서 그 시대에 그런 상황이 전개되었으며 그 결과는 시대 발전이나 진화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에 대한 인과 관계를 밝혀 우리가 사는 지금을 진단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인문과학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역사는 미래 예측하는 인문과학

그 좋은 본보기로 옛 광주였던 무진주 명평현에 세워져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국가지정 보물 제111호 개선사 터 석등이다. 지금은 담양군 남면 학선리 개선동에 있어서 광주에 관계없는 문화재로 생각하기 쉽지만 당시 이곳은 무진주 영현에 속하던 명평현(鳴平縣)이었고 뒷날 창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가 1914년 담양 땅이 된 곳이다.

이 보물이 서있는 개선동은 비록 담양군에 속해 있지만 광주호에 길이 묻혀 지금은 광주시 땅인 덕의동과 충효동을 거치지 않으면 왕래가 불가능하다. 높이 3.6m에 달하는 거대한 이 석등

에는 등기름에 쓰도록 덕의동과 충효동 일대 논 14결을 샀다는 내용과 함께 그 위치까지 적고 있어서 우리나라 토지 매매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라는 점이 높게 평가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이 석등의 등창 문설주에는 이 석등은 891년 여왕이 된 경문왕의 맏공주인 김만(曼·진성여왕)이 아버지 경문왕과 왕비인 문의황후의 만수무강을 기원해 세웠다는 내용의 글이 새겨있다. 글 중에는 함통(咸通 9)이라는 중국 연호와 용기(龍紀 3)라는 연호가 나와 학자 간의 의견이 다르다.

함통 9년은 868년이고 용기연호는 889년 단 1년간 쓴 연호인데 3년은 잘못된 것이지만 이를 그대로 인정할 경우 891년이 된다. 이 때문에 868년에 세운 뒤 글씨는 891년께 새겨 넣었다는 설과 891년에 세울 때 같이 글씨도 새겼다는 주장이 나와 있다. 이 주장에 대한 반론으로 891년에 세웠다면 공주가 왕위에 오른 지 5년이 지난 때이므로 공주라고 새길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이처럼 사학계의 관심은 이 탑의 명문의 해석과 탑을 만든 시기에 치우쳐 있다.

신라 왕실이 백제 땅에 탑을 세우다

필자는 이 같은 미세한 시기나 글자의 해석보다 더 관심을 갖는 것은 어째서 이 석등이 신라 서울인 경주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무등산 서북쪽 산자락에 세워졌을까 하는 데에 있다. 이 석등이 세워진 곳은 큰 절이 있었던 흔적이 밝혀진 바가 없어 학자 중에서는 개선사 터 석등이라 부르는 것은 잘못이고 개선동 석등이라 불러야한다는 주장까지 내놓고 있는 터이다.

만일 891년에 세우거나 글씨를 새겨 넣었다면 그때는 이미 후백제 진훤이 신라에 반기를 들어 세력을 떨치기 시작한 시기이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비록 광주 사람들이 반기를 들었을지라도 아직은 신라 중심에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이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다. 그러나 석등 건립의 기획은 이미 868년께였음이 확실하므로 어떻든지 광주 사람들의 환심을 사기 위한 의도가 숨어있었음은 확실하다. 그렇다면 신라 왕실이 어째서 경주에서 머나먼 옛 백제 땅 무등산 기슭에 석등을 세울 생각을 했을까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광주사람들이 헌안왕을 왕위에 오르게 하다

굳이 따지자면 경문왕은 47대 헌안왕(憲安王·857∼861)의 사위이다. 헌안왕은 광주 사람과 장보고 청해진 대사의 응원을 받아 왕위에 오른 신무왕(神武王·839)의 이복동생이다. 신무왕은 김우징(金祐徵)으로 광주와 완도를 전전하다가 광주도독을 지낸 김양(陽)과 장보고의 부하들이 경주에 처들어가 왕위에 올린 인물이다.

오늘날 광산 김씨들은 김우징이 광주에 머물러 있을 때 낳은 흥광(興光) 왕자가 시조라 한다. 김우징은 왕이 되어 1년 만에 죽고 아들이 문성왕(文聖王)이 되었으나 아들이 없이 죽어 숙부인 헌안왕에 왕위가 이어졌으며 숙부 또한 아들이 없이 죽어 사위에게 왕위가 물려졌다.

사위 경문왕의 부인이 헌안왕의 딸이므로 경문왕은 김우징의 조카사위로 얽힌 혈연관계가 작용한 지연을 생각 할 수 있다. 실제로 광산 김씨 시조가 김우징 신무왕의 아들이라면 경문왕의 부친 문의황후는 흥광과 4촌간이다. 이런 혈연관계 때문에 이곳에 석등이 세워졌다는 생각을 해본다.

대동문화 80호 [2014 1,2월호]

김정호 광주향토문화연구소장  webmaster@chkorea.news

<저작권자 © 채널코리아뉴스,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