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 속에도 늘푸른 소나무 있어…

양원호 대표는 효자이다. 아버지 석정(石晶) 양재두(梁在斗, 82) 선생을 모시고 살면서 아버지의 눈이 되고 있다. 한쪽 시력을 잃은 아버지의 마음의 눈이 되고 있다는 뜻이다. 양원호 대표가 12살 무렵,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석정은 한쪽 시력을 잃었다.

93년도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조대병원에 입원한 석정은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았다. 노환에 협심증, 폐질환이 겹친 합병증이었다. 양 대표와 가족 모두는 지극한 마음으로 간호하고 좋다는 처방은 팔도를 뒤져서라도 마련했다. 지극한 정성은 버리지 않는 하늘의 뜻대로 완쾌가 되었다.

석정 양재두 선생은 알만한 사람은 아는 설경산수의 대가이다. 담양 봉산면에서 머슴을 거느리던 집안 출신으로 태어난 그는 생활의 여유가 있었다. 한학으로, 시조 창작으로 동양적 인문을 쌓은 바탕 위에 24살 때부터 의재 허백련 선생에게 그림을 배웠다. 설경(雪景)을 골똘히 연구했다. 그림이든, 인품이든 남에게 무언가를 드러내는 것을 극히 싫어하는 성품 때문에 1977년에야 겨우 그것도 겨우 담양에서 전시회를 한번 갖고는 들어온 돈을 모두 방위성금으로 기탁해버렸다. 화우(畵友)와 가족들에게 부담을 줄 수 없다는 문인화가적인 고집이었다.

남농 허건 선생은 석정의 그런 마음을 헤아려 ‘석정 귀우(石晶 貴友)’라는 칭호를 얹어 ‘쌍송(雙松)’에 두 사람의 ‘쌍낙관’까지 넣은 그림을 그려주었다. ‘당신은 내 제자가 아니라 내 화우(畵友)요’ 하는 선언이었다. 1977년 광주로 이거한 후에도 ‘전국시조대회’에서 장원을 한 시조시인으로, ‘대한전통미술대상’ 추천작가로, ‘전남유도회’ 자문위원으로 활발한 활동을 했다. 지금도 붓을 잡고 있다.

송림화랑 양원호 대표를 이야기하면서, 석정 양재두 선생의 이야기가 너무 길어졌다. 그만큼 양원호 대표의 정신적 바탕에 아버지의 이바지가 컸다는 말이다. 양 대표는 군대를 제대한 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다가 아버지의 권유로 그림을 그렸다. 80년 연진회 9기였고, 나이 27살 때였다. 금봉, 희재 등 지금의 대가들에게서 배웠다. 동시에 동구 동명동에 표구점을 냈다. 연진회는 1년간 사군자를, 2년 후에는 화조도(花鳥圖)를, 3년 후에는 산수화를 그렸다. 그 후로도 그림 공부에 마음이 이끌리면 대가들을 찾아 ‘사사(師事)로 갔다.’ 양 대표는 아버지에게 ‘사사로 가서’ 배웠다. 그러나 표구점 일은 늘 번거롭고 그림 공부는 늘지 않았다.

86년에는 예술의 거리로 표구점을 옮겼다. 동명동 시절과 예술의 거리 시절인 80년대에 표구 사업이 호황을 맞았다. 예술가가 대우받고, 그림이 귀하고, 그림을 구하는 사람이 많았다.

남농 선생 소품이 10만 원, 30만 원 하던 시절이었으나, 외지에서 온 손님들이 미리 돈을 내놓고도 한두 달 기다려서 그림을 받아가던 시절이었다. 양 대표에게는 ‘그림을 파는 것’이 그림 수업이었다. 붓을 놓고 표구붓을 들었다.

참 희한한 일도 있었다. 화랑에 화재가 있었다. 표구를 맡은 그림과 소장 작품이 몽땅 소실(燒失)되었다. 늘 자랑스럽게 표구점의 진열장에 전시되어 있던 아버지의 그림도 연기에 쐬어 새카맣게 변해버렸다. 이런 일도 있는가? 아침에 출근한 그는 눈을 의심했다.

그림을 찾으러 온 친구에게는 그을린 아버지 그림 5점으로 보상을 했다. 친구는 이해했다. 그러나 다음날 찾아올 당시 보성군수가 문제였다. 곧 퇴임식을 갖을 예정이었던 군수는 재임시절 모았던 고가의 작품 5점의 표구를 맡겼었다.

“이것이 무슨 일인가?”

양 대표는 무릎부터 꿇었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화랑에 들어선 순간 모든 정황을 알아버린 분에게 구차한 변명이 있을 수 없었다. 아주 긴 침묵의 순간이 지났다. 어깨에 닿는 손길이 느껴졌다.

“여보게, 젊은 사람이 안됐네. 그림 맡긴 사람이 한둘이 아닐텐데, 다 보상하려면 불탄 이 집값 보다 돈이 더 들어가겠네. 나는 그림 보상 해달라고 하지 않을테니, 기죽지 말고 열심히 살게.” 그리고는 아무 말도 없이 그냥 가버렸다. 다음에 보상하라는 말도 없이 그 노신사는 표표히 사라졌다.

‘가게에 한번 불이 나면 사업이 불같이 일어난다’는 속설은 들어맞았다. 1년 만에 화랑을 새롭게 단장하고, 그림 보상도 모두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 군수만은 아무리 수소문해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 시절’에는 ‘그런 일’이 ‘있을 수 있었다’.

1990년 3월에는 ‘광주화랑협회’가 생겼다. 이 협회의 총무를 10년 간 맡으면서 ‘예술의 거리’ 터줏대감이 되어가고 있다. 이 외에도 번영회, 동창회, 종친회를 맡아 일을 꾸려나가고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성품 때문에 늘 송림화랑은 예술의 거리 사랑방이 된다.

“예술의 거리가 피폐해서 가게 인심도 예전만 같지 못하다”는 것이 ‘예술의 거리 번영회’ 총무로서의 양 대표의 말이다. 무엇보다 낭만과 정감이, 장삿속에 인심마저 사라져버렸다. “중앙초교에 예술 타운이나, 현대미술관이나, 문화공원이나를 막론하고 뭔가가 좀 생겨서 예술의 거리가 활기를 찾는 일”이 사람 대접하기 좋아하는 양 대표의 희망이다.

소설가 박혜강이 그의 친구이고, 형제들이 화가의 길을 걷고 있는 가족 내력은 모두 ‘예술로 밥을 먹는’ 직업의식 때문이기도 하다. 아버지 석정이 “너는 나무 기운으로 먹고 살 것이다”고 예언처럼 내려준 송림(松林)이라는 상호도 그래서 20년이 한결 같았다.

[대동문화 31호, 2004년 가을호]

백승현 기자  webmaster@chkorea.ne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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