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 포충사는 제봉산을 등 뒤로 하고 양옆을 원산들이 에워싸고 있다. 포충사 곁 필문 광산 이선생 부조묘 비석이 안내해주는 길을 따라 들어가면 만산마을이 나오고 마을 입구에 괘고정수(掛敲亭樹)로 불리는 나무가 있다. 이 왕버들나무는 가지마다 푸른 잎들을 하늘로 뻗어 올려 자기 몸보다 열 배는 너른 그늘을 만들어낸다. 나무 자체가 푸른 정자이다.

이 마을은 광산 이씨 세거지로 조선 전기 세종 때의 문신인 필문(畢文) 이선제(李先齊, 1389~1453)가 태어나고 자란 곳이다. 마을 안에는 필문 이선제 부조묘가 있고 필문의 묘소도 있다.

필문은 세종 원년(1419) 급제했으며, 1423년 <고려사>를 개수(改修)할 때 참여했다. 세종 13년(1431) 집현전 부교리로 춘추관 기사관이 되어 <태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했다. 형조와 병조의 참의, 강원도 관찰사, 예조 참의, 호조 참판, 예문관 제학 등을 역임했다. 1448년에도 집현전 부제학 정창손, 우찬성 김종서, 이조판서 정인지와 함께 <고려사>를 다시 찬술하는 데에 힘을 보탰다.

세종 12년(1430) 광주목에서 무진군으로 강등되는 사건이 일어났다. 광주 목사인 신보안을 만호 벼슬을 지낸 광주 사람 노흥준이 구타한 사건 때문이었다. 윤리를 어긴 강상죄는 매우 무겁게 취급되어 고을의 호칭이 강등되기도 했다. 광주의 불명예였다.

문종 원년(1451)에 필문은 광주의 원로들과 함께 임금에게 상소했다. 무진군을 다시 광주목으로 복귀해 주도록 주청했다. 그래서 강등이 된 지 21년 만에 명예를 회복하게 됐다. 광주목으로 회복된 것을 ‘함께 기뻐하고 축하하기 위해’ ‘희경루’가 세워지기도 했다.

필문 이선제는 고을 원로로서 고을 풍속을 바로잡아나가야 한다는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남구 칠석동 부용정의 주인공 김문발(1358~1418)과 함께 광주 최초의 향약을 기초하고 실시했다.

그 시기쯤 아마 이 괘고정수를 필문이 심었을 것이다. 필문은 나무를 심으면서 “이 나무가 죽으면 가문이 쇠락할 것이다.”고 말했다. 필문을 이어 그의 두 아들인 시원과 형원이 과거에 합격했고, 형원의 아들 달손, 달손의 아들 공인, 공인의 아들 중호, 중호의 아들 발과 길이 대를 이어 합격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서 난 인재가 과거에 합격하면 축하하기 위해서 나무에 급제자의 이름과 북을 걸어놓고 두드리며 잔치를 벌이고 가문의 영광을 알렸다. 그래서 왕버들나무는 ‘괘고정수’로 불렸다. ‘북을 걸어놓았던 정자나무’라는 뜻일 것이다.

그런데 5대손인 발이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멸문지화를 당했다. 마을의 괘고정수도 말라죽기 시작했다. 그런데 300년이 지나 발이 신원되자 왕버들나무에 다시 새잎이 피어 살아났다고 한다. 지금은 높이가 약 15m 가량이며, 가슴 높이의 직경은 약 1.7m 정도, 수관(樹冠) 너비는 13m 내외, 수령은 약 600년 정도이다.

필문은 최근까지 생몰 연대마저 알 수 없는 잊힌 인물이었다. 저술이 매우 많았으나 기축옥사로 소실되었고, 후대에 만들어진 <수암지>와 <조선왕조실록>에 몇 구절이 남아 있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1997년 청자에 새겨진 필문의 묘지(墓誌)가 일본으로 밀반출되기 직전 김해공항에서 문화재 감정관에 의해 필사됨으로써 극적으로 필문의 정확한 생몰 연대가 알려지게 되었다. 1988년에 서방 4거리~산수 5거리~남광주 5거리 구간이 ‘필문로’로 제정되었으며, 이후 2009년 ‘필문대로’로 고시되었다.

땅 속을 비추는 햇빛 신비하기 그지없어/따스한 봄바람에 새싹이 돋아나네./선대 유업 닦은 것이 나의 복을 닦음이니/큰 공을 쌓은 사람에게 천복이 내리네

지역이 무참하게 욕을 먹거나, 고을 사람들이 명예롭지 못하게 되면 그 지역의 지식인들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반성하게 만드는 이 600년의 가르침의 그늘 아래서 가슴이 늘 서늘해진다.

[2014년 3.4월 <대동문화> 81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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