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선생이 고향 남양주군 조안면 능내리로 18년 동안의 유배를 끝내고 돌아온 것은 1818년. 탄생지 마재는 철마산(鐵馬山)을 등지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류하는 곳이었다.

전남 강진 유배 생활은 인생에서 가장 참담했던 시간이었지만 자기 모든 학문적 역량을 쏟은 학문으로 패기 넘기던 시기였다. 그리고 돌아온 고향에서는 미진한 학문 연구를 마무리하고 경학을 연구하며 학자들과 교유했던 시간이었다. 이 마지막 18년 동안은 형형하던 눈빛이 사위어기는 했으나 눈매는 더욱 깊어졌을 것이다.

두 강 합하는 좋은 풍경 속 수종사 다회

1930년 가을 10월 보름 해거재(海居齋) 홍현주(洪顯周, 1793~1865)와 동번(東樊) 이만용(1792~1863)이 찾아와 스승을 청해 함께 운길산(雲吉山) 중턱 수종사(水鐘寺)에 나들이를 나가 차회(茶會)를 열어주시길 청했다. 자주 있던 일이었다.

그러나 그제에 다산은 이미 몸이 늙고 백발이 성성했다. 그래서 일행을 어서 가라고 보내고 홀로 무료함을 달래는 10여 수의 시를 지었다. 그 ‘수종사 와유편(水鐘寺 臥遊篇)’의 한 구절은 다음과 같다.

수종산은 그 옛날 나의 정원/생각나면 훌쩍 가서 산문에 도착했지/지금은 문득 빼어난 죽순과도 같이/하늘 높이 우뚝 서있어 아득하여 잡기 어렵네.(2수)

높은 산봉우리 앞에 아득히 높은 누각 있어/두 강이 합하는 좋은 풍경 일시에 거둬들여라/녹효(강원도 홍천)는 허리띠같고 황효(경기도 여주)는 멀기만 하니/여기에 이르면 응당 백발이 가엾으리라(5수)

은퇴기의 다산 선생을 찾아왔던 차인으로는 앞에 말한 홍현주, 이만용, 추사 김정희, 추사의 동생 산천 김명희, 정약용의 아들 유산 정학연 등이었다.

운길산 수종사는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치는 두물머리[양수리]를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금강산에서 흘러온 북한강과 태백과 오대산에서 지맥을 끌며 내려온 남한강이 만나 팔당호를 푸짐하게 해놓고 한강을 해산하는 장면이 일목요연하다.

초의 스님은 일생의 스승인 다산을 뵈러 이곳에 왔다가 수종사에 오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한 잠 자고 일어났는데 차 한 잔 줄 사람 없을까/게을러 경서 쥐고 눈꼽 씻었네/그대가 여기 있는 줄 알고/이곳 수종사까지 오지 않았나

초의 스님이 이곳에 와서 교유했던 인물의 가장 중심에 홍현주가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의가 우리 차의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 <동다송>을 지은 이유는 바로 홍현주가 초의에게 차 만드는 법을 물었기 때문이다. 그 뒤 이들의 차를 통한 교유는 계속됐다.

그대 만나 차 마시러 이곳까지 왔지 않은가

홍현주는 자를 세숙, 호를 해거재라 했다. 숙선옹주와 결혼하여 영명위에 봉해졌다. 숙선옹주는 정조의 둘째 딸로 홍현주는 부마여서 중요한 벼슬을 할 수 없었다. 대신 시문과 서화와 차를 좋아하여 자하 신위, 위당 신헌, 다원 김홍도, 풍석 서유구 등 여러 문인 재사들과 교유했다. 당시 청나라의 난설 오숭량, 성원 옹수곤, 다농 장심 등과도 시문으로 교유했다.

재사였던 아버지 족수거사 인모, 여류 시인이었던 어머니 서씨, 석주, 길주, 원주 등 형제들 모두도 다인들로 일가 다풍이 쟁쟁했다. 그러나 해거는 옹주와 사별한 쓸쓸한 만년을 지내면서 차에 경도되었다. 초의로 하여금 <동다송>을 짓도록 촉발해 차의 중흥기가 시작됐으며, 숙선옹주도 차를 놓아해 남긴 다시가 많았다.

홍현주는 어릴 때부터 차 생활을 했고, 차시도 110여 편을 남겼다. 청나라 보이차도 마셨으며, 문방서화로 차문화를 예술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다층 다양한 차인들과 교유하면서 우리 차 문화를 생활화한 다인이기도 했다.

초의는 1831년, 스승 완호의 삼여탑을 건립하며 이 탑에 새길 글을 홍현주에게 부탁한 일이 있다. 해거는 이 일을 계기로 초의와 만나 초의차를 맛본 후 부쩍 우리 차에 관심을 가지게 됐다. 해거는 1817년 북산도인(北山道人) 변지화(卞持和)를 통해 초의에게 다도에 대해 물었고, 초의는 그 대답으로 <동다송>을 짓게 되었다.

초의 <동다송>을 짓게 한 장본인

초의는 1831년 첫 대면과 1838년의 재회 때마다 자신이 직접 만든 떡차를 해거에게 선물했다. 해거는 초의를 초청해서 시회를 열어주고, 자신의 집에 묵게 하는 등 초의에 대해 각별한 정성을 쏟았다. 둘다 둘도 없는 다우였다.

초의를 생각하며 쓴 홍현주의 다시 ‘수종사를 바라보며(望水鍾寺)’가 유명하다.

只有鐘聲遺淨界 다만 종소리만 맑은 세상을 울리고 있는데

空敎樓影落寒江 누대의 그림자가 찬 강물에 떨어지네

行狀猶有山中物 행장 속에 산중의 물건이 아직 남아 있어

茗飮携來小瓦缸 가져온 찻그릇에 차를 달여 마신다

정약용 선생 생가인 여유당과 묘소를 둘러보고, 다산 선생이 누워서 이미지 여행했던 길을 따라 운길산 수종사에 오른다. 수종사는 피부병을 고치기 위해 금강산을 다녀오던 세조가 이곳 바위굴에서 떨어지는 청명한 종소리의 약수를 발견하고 ‘수종’이라는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그때 세조가 심었다고 전해지는 은행나무 두 그루가 넉넉하다.

수종이라는 이름처럼 물맛이 깨끗하고 청명한 우물이 약사전 아래 있고, 삼정헌이라는 경내 다실이 있어 한강을 조망하며 이 약수로 끓여낸 차맛을 맛볼 수 있다.

(…)황토 먼지로 한치 앞 아득한 산길 오르며/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게/사람 몸인 줄 비로소 알 것 같다/한 생애 마친 듯 산길 굽이돌며/등과 배꼽이 맞붙는 적막한 식욕/눈앞에 비틀거리는 아지랑이 어른거려서야/깨진 기왓장 위에 민들레 무성한 산문/빼꼼하게 귀 내민다/이제, 돌아갈 아득한 길 달래며/봄가뭄 걱정에 잠 못 이룬 채 모로 누운/정약용 유택 훤히 내려다보이는/수종사 무료찻집에서 봄볕을 부신다(…)/저렇듯 빛깔과 몸피가 다른 강줄기들도/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줌으로/몸 활짝 열어 하나가 되는 것/눈물겹지 않느냐고/봄물 절 마당에 백 지게쯤 풀어놓는다

박몽구 -「수종사 무료찻집」- 중에서

눈물겨운 다인들의 우정과 봄소식

수종사에 올라 다아(茶芽)는 멀리 양수리의 물줄기를 바라본다. 북한강의 끝을 따라가면 그리운 금강산이 나올 것이고, 남한강의 시원을 따라가면 태백산맥의 줄기에 닿을 것이다. 그리고 팔당호 물은 서울로 흘러 서해로 빠져나갈 것이다. 그 물줄기를 거슬러 봄이 오고, 봄물이 넘쳐흐르고, 생령들은 봄볕 아래 살아 오르며 환호성을 지르고 있다.

절 마당에 백 지게쯤 봄물이 흘러서 또 세월이 가면 우리네들도 다산 정약용 선생처럼 이미지로만 이곳에 올라볼 수 있을 것이다. 수종사는 그래서 다산 선생과 또 선생과 교유한 조선 후기 다인들의 차 이야기가 고스란히 스민 영원한 차 유적으로 남을 것이다. 누군가는 늙어가고 봄은 새로이 오고 있다.

[2014년 3.4월 <대동문화> 81호]

백승현 기자  porum88@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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